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떠나 온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 히 11:11∼16

  • 잡초 잡초
  • 320
  • 0

첨부 1



떠나 온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히브리서 11:11∼16

이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습관과 본능에 따라서 반복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숙련된 기술이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인데 삶의 의미와 보람을 추구하면서 정신적 활동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사람과는 또 다른 세 번째 형태의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세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로서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땅에 예속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향해 전진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이 역사적인 제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 땅에서만 살게 하지 않고 언제나 영원한 세계를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만들며 그 영원한 세계를 날마다 사모하도록 만듭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완전해서도 아니고 또 우리가 실수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을 따라 죽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데, 첫째는 13절에 弩?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澾箚?기록된 대로 믿음을 따라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기에 보면 믿음의 사람은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라는 말은 믿음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 뜻인데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죽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그 약속을 붙들고 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갑자기 재앙이 오고 불의가 이기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것일까? 정말 그분의 약속은 신실한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끝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기대하는 것처럼 되어지지 않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확신하고 죽는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을 계속해서 보면 弩?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그 다음에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환영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영했다’라는 말은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순교자들이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원수들에게 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의 미소와 기쁨을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엄청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怒翎?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澾箚?말하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믿음입니다. 스데반이 이러한 고난을 겪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늘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순교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또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합니다

둘째, 믿음은 그 다음에 나오는 13절 후반절에 나와있습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살지만 결코 세상에 집착하거나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살아있는 또 살아가는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부름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물질적이고 세상적이며 세속적인 문화와 사상에 젖어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반쯤 죽어 산다.’ 여러분, 매 맞아서 반쯤 죽은 사람을 혹시 본 적이 있습니까? 병들어 가지고 사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게 반쯤 사는 사람, 현대인들은 물질에 완전히 집착하여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반쯤 죽어서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조차 잘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를 변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깨어야 합니다.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고 우리의 고향은 천국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은 그 곳임을 날마다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대개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감각이 둔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이 없는 사람이 현실에 대한 감각이 둔합니다. 천국 갈 것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시시하게 살지 않습니다. 천국 간다는 사실이 분명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부끄럼 없도록 이 삶을 잘 정돈하고 정리하며 살아갑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는데 그 약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실제로 예수의 역사적 사실을 목격하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래서 실제로 순교의 삶과 선교의 삶은 구약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약시대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이 순교의 삶과 선교의 삶을 찾아보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희미하게 예수를 바라봤기 때문에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에 국한된 종교였지만 그 희미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분명히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종교로 변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은 보통 가난할 때는 정신차리고 똑똑하게 삽니다. 그런데 돈 좀 생기고 여유가 있으면 자세를 흐트러트리고 삽니다. 희미하게나마 예수를 바라보던 구약의 사람들은 똑똑하게 예수 믿고 믿음의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희미하던 약속이 분명해지고 그 예수를 내가 목격하고 영접하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구약의 사람들보다도 그 믿음에 있어서는 오히려 해이해지는 역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