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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설교] 이 사람의 감사 /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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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감사
누가복음 19:1-10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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