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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의 때를 기억하라 / 마 24: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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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때를 기억하라
마태복음 24:37-39


마태복음 24장은 3절 말씀에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시며 가르치신 내용으로 감람산 강화라고도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난이 닥쳐도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권고와 아울러 세상 끝날에 있을 여러 가지 징조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거짓 선지자, 난리소문, 기근, 지진, 사랑이 식어지는 현실이 그날에 대한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를 세계 만국에서 모으는 일로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그 때를 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시기를 알 수 없기에 항시 깨어 있으라고 권고합니다.
인자의 오심이 노아의 때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롯의 때와도 비교합니다. 저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을 묵상하며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는 말씀에 힌트를 얻어 '노아의 때를 기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아의 때를 말씀하심은 극단적인 악함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사에 몰두하는 위험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38절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지 않는 까닭에 죽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 때의 사람들을 지적합니다.
실제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죽음이 미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전15:32)고 일상사에 완전히 빠져있는 그들을 지적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은 그 때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온다는, 정말 뜻밖의 사건임을 가르쳐 줍니다. 같이 읽지는 않았지만 40절 이하의 말씀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과 같이 볼 때 세 그림을 보게 됩니다. 들에서 일하고 있는 두 남자, 매를 갈고 있는 두 여자, 같이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의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는 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분리를 보여줍니다. 지상에서 매우 밀접한 사람들도 나뉘는 사건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각 사건마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둠을 당합니다. 주께서 데려가는 사람은 아버지 나라에서 인자와 함께 있도록 데려감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절)고 명령하십니다.
깨어있으라는 명령이 잘못 오해되어 하루종일 하늘을 쳐다보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어느 때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왜 예수님이 세상 끝날 즉 말세가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을까를 묵상하며, 창세기 6장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 6장 초반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행한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말씀 표현대로 그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에 의해 다 멸망당했습니다.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도 없으며, 바른 삶도 없이 그저 일상적 생활에 만족하다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들의 먹고 마시며 결혼하여 살아간 것이 잘못입니까? 주님의 지적대로 그들은 그날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홍수가 임하는 그날까지 그들의 관심은 먹고사는 일, 결혼하는 일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명 이러한 일상적인 삶도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체적 죄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이상의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주님과 상관이 없고, 영원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죄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창세기 6장은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번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주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그런데 그들에게 준 이 복의 자리에 인간들의 죄가 침투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이 생육과 번성이라는 복의 영역 속에 꽃피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서로 아끼고 보호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생명의 신비를 통해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남녀의 바른 관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비밀스럽고 순결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육욕과 힘에 의해 지배되는 야비한 동물적 관계로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의 특징을 '본능적 야욕의 시대'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대는 인간의 타락한 본능과 힘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적 흐름에 맞지 않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계통에서 태어난 경건한 무리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이 두 종류가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3장을 통해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있음을 봅니다. 뱀의 후손은 사탄의 기질을 가지고 그 기질대로 지배받으며 사는 자를 뜻합니다. 여인의 후손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기의 죄된 본성을 누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타락했어도
하나님 말씀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가 있을 때는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의 해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원래 매우 탁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함으로 자신들의 욕구만 채우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무법적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합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 잘못일 수 없습니다. 그녀들의 잘못은 관능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요구하는 미인이 누구입니까? 살빼고 어깨 드러내고 속살도 비치며 살면 미인으로 둔갑해버리는 시대가 아니던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그들의 취한 것은 그들에게서 자기들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들이 갖지 못한 재미를 그들이 갖고 있음에 부러움을 가졌고, 결국은 그들의 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제껏 해오던 우리의 예배가 너무 재미없으니 세상적인 좋은 것들 다 가져와 섞어서(믹서하여) 재미있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인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곁에 잇는 경건한 여인들의 성경적 아름다움을 버린 것입니다. 뚱뚱해지고 매력이 사라진 육체에 실증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사용한 방법 역시 잘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좋게 보이는 모든 여자로 자기들의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힘으로 모든 것을 차지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 지배한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밀어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밀쳐내고 자신들의 능력으로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을 믿는 완력의 행사는 인간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원래 하나님이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을 지배해야 옳습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 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천사는 아닙니다. 다른 이와 똑같은 죄성이 있기에 실수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가?
오직 말씀에 따라 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얻는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으로 행복하기를 바랬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저 아름다운 여인들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세상 만사를 그것도 주먹 세고 돈 많은 자가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무시이며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여 태어난 아들들 중에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 용사들은 결국 이 세상을 살리지 못하고 함께 수장의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용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원래적으로 정해준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네피림이 아닌 보통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6:4 네피림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사람을 쳐죽이는 자, 쓰러뜨리는 자'라는 명칭입니다. 네피림은 용사라는 말을 듣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남을 많이 죽여야만 했습니다. 이 모습이 누구의 자녀에게 있는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이러한 폭력에 동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권력 지상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힘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이러한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가진 예배의 삶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마지막 방어막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들 모두 육체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육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욕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가 됨으로 그들의 생각이 항상 악하기에 더 이상 그들과 교제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억제해서 이 몸을 바르게 사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자가 없기에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나타나는 인간들의 죄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심으로 '너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주님의 노아의 때에 대한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모두 악해져서 홍수의 심판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본질적 문제를 멀리하고 먹고 마시는 쾌락에만 빠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이 왜 사는지를 생각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먹기 위해 삽니까?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면 그만입니까?
인간의 본래 목적은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훤씬 고상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밥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노아처럼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죄성을 가진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도덕적 흠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당시 사람들의 무서운 죄에 빠지지 않고 강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른 삶과 똑같이 죄짓고 싶으며 폭력 휘두르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못하도록 간섭하신 것입니다. 이 간섭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죄를 지으면 부끄러워 견딜 수 없게 하시고, 지은 죄를 해결하도록 강권하십니다.
노아는 이 은혜를 누리면 산 것입니다. 다수의 길에 같이 걷지 아니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묵묵히 걸어갔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은 '노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를 좋아하셨다'는 의미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실 때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알았습니다. 아벨의 제사에 대한 교훈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노출하게 하였고, 자유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자신의 부족을 아는 자입니다. 제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사오니 지금 저에게 오시사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 주십시오.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초청하는 자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노아의 믿음이 방주를 짓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전혀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비웃음과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외치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히11:7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주먹질과 온갖 폭력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갑니다. 강포와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기들 하고싶은 대로 다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노아는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그 심판에 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노아의 때는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제멋대로 가더라도, 나 한사람이라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보다 한 사람의 헌신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왜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영향력 있게 살지 못할까요? 우리의 경건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건의 능력을 찾기 위해 우린 텔레비젼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요구를 듣고 준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건이란 겸손한 의존과 감사한 순종이다."
강포가 가득하고 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믿는 자들이 비록 죄를 짓는 약함이 있다 하여도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자비가 없으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홍수의 심판을 통하여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즉 신자와 불신자를 철저하게 구분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혼합되어 섞여 있지만 , 그날에 ... 심판의 날에 우리의 위치를 구분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심판과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입니다.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의의 계통이 계속되도록 하시었습니다. 철저한 심판 중에서 그의 백성으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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