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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좇아 행하라 / 갈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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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행하라

말씀 갈라디아서 5:16-26
요절 갈라디아서 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신자가 영적 삶을 살려고 할 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영적으로 생활을 잘 하려고 하는데 육체의 생각과 욕심이 나를 붙들어 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육신에 저서 끌려다닐 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무조건 영적 생활을 잘 하겠다고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 생활을 잘 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이러한 육체의 욕심을 잘 다스리고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심 3일로 끝나고 육신에 패배 자가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이 것을 거스리는 육체의 욕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19-21)? 갈 5:19-21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음란' 곧 정욕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우상숭배는 같은 부류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과 정 반대입니다. 음란한 육체의 소욕에 지배를 받으면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더럽혀서 거룩한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음란에 빠지게 함으로서 영적인 삶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사단의 전술입니다. 그 유명했던 다윗을 넘어지게 한 죄가 무엇입니까? 바로 음란입니다. 그는 부하들이 아람과 전쟁에 나간 동안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정욕이 동하여 데려다가 간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것을 은폐하려고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정욕의 죄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부흥 목사가 스트레스를 감당지 못하여 컴퓨터 음란사이트에 들어가 밤마다 빠졌습니다. 그 아내가 극극 말렸지만 계속하다가 결국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음란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과거 우상숭배나 모든 이단이나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속에 음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역시 음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육체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만이 아닙니다. 사단이 탐욕을 심어서 영적으로 우리를 더럽히고 하나님과 대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7장을 보십시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계17:3,4).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이 이 음녀와 더불어 음행을 하고 포두주에 취하였습니다(2). 이는 장차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가 세상을 위협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정말 위협적입니다. 세상은 이 음녀의 지배하에 있어왔습니다. 이미 여자가 붉은 짐승을 타고 음행을 일삼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

이런 육체의 일은 정욕, 우상숭배뿐이 아닙니다. 술수(마술, 투기)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과 당 짓는 것 분리 이단도 있습니다. 투기 술 취함 방탕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으로 품지 못하고 시기하고 분을 내는 일을 잘 합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런 자기 감정과 분이 일어나는 것이며 영적으로 막히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게 영적인 소원이 없어서 보다도 이런 육체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막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주의 종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비전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집회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은혜를 받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는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때 성령은 그에게 아버지와와 관계문제를 지적하여주셨습니다. 그에게는 어릴 때 아버지께 받은 거절감과 육체적 학대로 인해서 미움과 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 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서 자신의 속에 것들 다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믿기지 않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이 대 있었던 일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는 말이냐?" 아버지는 용서를 구했고 서로 껴안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아버지와의 만남이 삶에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업사고 교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이민 목회 2세로 미국에서 철저한 복음주의노선과 함께 성령의 운동의 불을 지피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왜 이런 육체의 욕심이 들어옵니까?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욕심이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도를 넘어서게 이웃 아내를 탐하게 되면 간음 간통이 되고, 좋은 음식도 지나치게 먹으면 탐식이 되고, 돈도 지나치게 가지고자 할 때 맘몬이라는 물질 우상이 되고, 사람을 하나님보다도 지나치게 사랑하며 섬길 때 역시 우상이 됩니다. 사단은 이처럼 간교하게 하나님이 주신 것한 것들에 탐심을 심어주므로서 죄악 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막힐 뿐 아니라 더 무서운 경고가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고전15:50).

우리가 어떻게 이런 육체의 일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의지적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 2:22 ). 고자가 된다고 해서, 깊은 산 중으로 들어가 수도를 한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타이스의 성자를 보면 성자가 무녀를 구원하고 나서 자신은 오히려 점점 여인에 사로잡혀 타락해 가는 것을 봅니다. 죄악의 나락으로 빠져가던 정염의 여인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어가지만 성자는 요염한 여인 타이스를 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수십미터 되는 나무에 올라가서 고행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끌어안고 세속으로 끌어내려는 성자에게서 사람들은 흡혈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의지로는 다윗도 실패하였고, 솔로몬도 실패하였습니다. 바울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오는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롬7:23,24). 어떤 사람이 노름을 하다가 전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안 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됩니다. 큰 결심으로 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발가락으로 다시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갈 5:16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현대어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멘. 육신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가 극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립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만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멘.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를 옳은 길로 ,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리스도의 성품의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율법을 지키려할 필요가 없이 속 사람이 근본 변화됩니다.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덕들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기 때문에 율법의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육체의 소욕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으면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율법은 지키더라도 의무적이고, 못 지키게 되면 얽매입니다.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런 신앙은 자유가 없습니다. 성장이 없습니다.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따라 살면 너무나 좋습니다. 자유합니다. 열매가 맺혀집니다. 자연스럽게 육체의 소욕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띄어 넘어 영적으로 진보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 이것만이 육체의문제를 극복하고 한계를 띄어 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좇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24, 2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입니다. 신자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자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된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산상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 거기서 나도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며 사는 것도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신앙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신앙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 순간 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물으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손을 잡고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살고 싶습니까? 아름다운 열매 맺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분의 실체를 인정하고 인격체로 모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분을 부름으로 시작하십시오. " 성령님! 성령님!" 그 다음에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성령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수없이 반복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 인도해주세요. " . "어떻게 할까요? 올라갈까요 말까요? " 그리고 아침에 일어날 때 잘 때 인사하십시오. " 성령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하세요". "에이. 어린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처음에 베니힌의 '성령님 안녕하세요'를 읽고 은혜를 받았지만 너무나 어색하고 우스워서 그만두어 버렸습니다. 성령과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색함을 극복해야합니다.

저는 어려서 누이들과 여동생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들어갈때까지 큰 누님을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언니가 아니라 누나라는 사실을 알고 언니를 누나로 바꾸어 불러야하는데 너무나 어색하고 우수원서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누나.." . 그런데 어느정도 지나니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성령님" 부르고 찾는 것이 나중에는 자연스러워집니다. 그 후에는 인격적인 인도함을 바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성령님하고 불렀더니 40년 동안 그렇게 불러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제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얼마 전 우리 센타에 J 목자님은 건강도 좋지 않은 가운데 양들을 섬기며 너무 피곤해서 누운채 " 성령님, 그래도 양을 섬겨야 하는데요 "하고 기도할 때 두 줄기 빛이 위로부터 임하는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제 동역자도 목이 아파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성령님 이렇게 목이 아프네요. 찬송도 기도도 할 수 없네요. 도와주세요". 그러자 괜찮아졌습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고 부른다면 언제든지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자유함 속에서 더 열심히 주를 섬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저도 요즘은 수없이 성령을 구합니다. 사랑을 고백합니다.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독서할 때도 ...이후로 꾸준히 새벽기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지속적으로 말씀을 사모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도 얻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백번 천번 옳은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부르고 지금부터 인도함을 받읍시다. 성령을 부르는 것과 안 부르는 것은 안전히 다릅니다. 부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부르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응답이! 성령을 따르는 삶을 통해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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