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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와 은혜 /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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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가시와 은혜
성구 : 고린도후서 12장 1∼10절

『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가시와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 당하지 말아야 하는 고통이 있는가하면 당해야만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고통은 우리가 마땅히 당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에는 저항하고 물리쳐야만 합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청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결치 못하여 당하는 고통은 당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병으로 인한 고통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주의 고통은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저주를 받아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말할 필요 없이 당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갔다가 사흘만에 사망과 음부를 멸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미 다 당하시고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2장 1절로 10절에 기록된 바울 선생이 당한 고통과 같은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숙한 성도로서 성장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첫째로, 바울선생의 생활속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신앙인이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선생의 생애 속에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로 4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럼 바울선생께서는 삼층천에 올라간 체험이십니다. 너무나 인간으로써 육체속에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선생이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를 명해서 그를 괴롭히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선생은 또한 말하기를 지극히 큰 여러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너무나 위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바울선생의 받은 계시로 말미암아 그 기초를 확고히 하고 온 천하 만국에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로 받은 근원적인 기독교의 계시가 없었으면 오늘날 신약성경은 존재할 수 없고 기독교의 신앙이란 오늘날처럼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한 위대한 계시를 바울 선생은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인 이상 자랑할 수 있고 교만해질 수 있고 스스로 높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자를 주어서 바울 선생을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을 겸손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셔서 항상 바울을 쳐서 괴롭게 만들었었습니다. 바울선생은 이것이 자기 몸에서 떠나기 위해서 세 번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오다가다 부르짖은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혹은 금식하며 혹은 철야하며 부르짖어 "하나님이여, 내게 있는 이 가시를 제하여 주시옵소서." 몸부림치며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바울선생의 부르짖음을 거부하고 만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더 구하지 말라. 네가 약할 때 목숨을 바치고 내게 의지하므로 능력이 너희에게 머물수가 있다. 네가 스스로 자만하고 만족하여 이만하면 되었다고 자기를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 속에서 역사할 틈이없다. 그러므로 네가 깨어지고 약하고 허약해서 두손들고 주님께 의지할 때 비로서 내가 너희속에 임하고 능력과 권세를 너를 통해서 나타낼수 있으니 그러므로 약할 때 네가 강해지므로 더 이상 구하지 말라. 육으로 약해지면 영으로 강해지는 것이니 그러므로 더 이상 구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 계시를 받은 바울선생은 그의 가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로 10절 이하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여기에 바울선생께서 목회를 하고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하고 능욕을 당하고 궁핍하고 핍박을 당하고 곤란을 당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당하는 시련과 환란과 고통이었습니다. 육체가 약해질 때 그는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고 주님을 의지하므로 성령이 더욱 충만해서 육체는 약하나 영적으로 강해져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시를 통하여 깨어지고 은혜가 넘쳐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선교기지를 건설하고 신약 절반가량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로써 역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바울선생은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교만이 들어오면 은혜는 떠나갑니다. 교만이 사라지고 깨어지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낮추어지면 넘치는 은혜가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낮아진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높아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거할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충분히 높아지고 교만해질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사람이 체험할수 없는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감히 사람의 말로써 표현할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경을 체험했지 않습니까? 너무나 크고 위대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일반사람들과 비교할수 없는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자랑할수도 있고 자만할 수도 있고 교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에 가시를 주어서 끊임없이 괴롭게 하므로 그가 얼마나 허약하고 무능력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자신속에 깨닫게 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일분일초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나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일어서고 앉는 것을 주장하시고 나의 모든 삶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겸비한 마음을 유지하게 하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은 높은데서 낮은곳으로 더욱 흐르시고 더욱 넘치게 채우셔서 바울선생을 통해서 주의 역사가 넘치게 나타나고 온천하 만국에 미치고 역사를 뛰어 넘어 오늘 이시간 까지 임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도 삶의 크고 작은 가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구원을 받고 난 연후에도 너무나 부족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나고 천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나 인격적으로는 아직 모자라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게 하기 위하여 말씀의 젖으로 먹이시고 성령의 감화를 주시고 그 다음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여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도를 반드시 먹어야 됨과 성령님의 감화감동을 받아야 되지만 고난의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가 고난으로 깨어지고 항복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이러한 변화가 다가와야 우리가 영적으로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가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의 사자, 귀신들이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려고 하는 것만 가시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환경이 가시가 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가시를 통해서 우리를 괴롭힘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겸비하게 낮아지도록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 가시는 민수가 33장 55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원주민을 다 멸하고 쫓아내지 아니하면 그들이 눈의 가시가 되고 옆구리에 찔리는 것이 될것이라 해서 사람이 가시가 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3절에도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저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가나안에 있는 일곱족속을 다 쫓아 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섞여 살고 타협하기 때문에 저들이 결국엔 눈에 가시가 되고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서 이스라엘이 필경에는 패망할 것이라고 여호수아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시는 사람과 환경이 가시가 될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8절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환경이 우리에게 가시가 되고 찌는 엉컹퀴가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삶속에 여러 가지 가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편이 가시가 되어서 사사건건이 찌르는 체험을 한 아내들도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눈의 가시가 되고 옆구리에 가시가 되어서 고통을 주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아내가 가시가 되어서 사사건건이 바가지를 긁고 고통을 주고 눈에 가시처럼 되고 옆구리에 가시처럼 된 남편들도 있습니다. 자식이 가시가 되어서 땅을 치고 울며 탄식하고 통곡하는 부모들도 있고 형제가 가시가 되어서 계속해서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남보다 더 못하게 공격을 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혹은 부모님이 가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혹은 이웃이 가시가 되고 안믿는 사람들이 가시가 되어서 여러분을 괴롭힐때도 허다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업에 가서 사업이 잘 안되고 가시가 될 때가 있고 직장 생활의 가시가 고통이 가시가 되어서 여러분을 드글드글 볶고 괴로울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체험하는 가시들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가시가 있어서 우리를 찌르냐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 가시가 우리를 찌른 것입니다. 우리는 태생으로 교만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피속에 교만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조그마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하고 자기 주장을 합니다. 이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가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혹은 마귀를 보내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고통을 당하여 깨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남편, 아내, 자식, 부모, 이웃, 형제들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내 환경과 생활이 갑자기 불어닥치는 시련과 환란으로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집, 불순종, 불신앙, 성결치 못한 것들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님앞에 다 내어놓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종국적으로 우리는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점점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킬 이 교만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눈에 가시, 옆구리의 가시를 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가시가 올 때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간절히 주님께 간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가 가시에 찔려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면 이 가시는 굉장히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이 시험과 환란을 당하여 염려, 근심하면 그 염려와 근심은 파멸을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시가 반드시 우리에게 손해가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시가 오면 인간의 허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지혜나 총명이나 수단이나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내 능력이나 청춘을 의지하지 말고 내가 약해질 때 강해지므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탄할때는 좀처럼 목숨을 바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허약해지면 살아 남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하나님을 부여잡게 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죽게 되므로 자기를 건지러 온 사람을 결심하고 끌어안고 휘어감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 건지러 들어가다가는 잡히면 함께 빠져 죽습니다. 왜, 물에 빠져 절망했기 때문에 자기를 건져온 사람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끌어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지면 목숨을 바치고 하나님을 끌어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나오라면 얼마나 괴로워 합니까? 그러나 큰 시련과 환란을 당했을때는 새벽에 일어나지 말라고 해도 일어납니다. 일찍이 나와서 부르짖습니다. 철야기도도하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배고픈줄을 모릅니다. 왜, 우리가 고난당하면 육신으로 가시에 찔릴 때 영적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허약함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로 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질때가 되면 세세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가 잠깐 고난을 받아서 깨어지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가 우리의 성장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착한 인격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가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칠고 화 잘내고 완고한 인격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시에 찔려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많이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옛 아담에 속한 성품이 사라지고 육체의 사람이 죽고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는 체험을 해야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가시가 와서 이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에 가시에 찔릴 때 어떠한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왜 가시가 나를 찌르냐? 왜 남편이 가시가 되느냐? 왜 아내가 가시가 되느냐? 아이고 내팔자야! 왜 자식들이 가시가 되느냐? 심지어는 왜 부모님이 가시가 되느냐? 내 피를 나눈 형제가 왜 내 가시가 되느냐? 이럴수가 있느냐? 내 그렇게 신뢰하던 친구가 어떻게 변해서 내게 가시가 되느냐? 왜 저들이 나를 괴롭히느냐?" 그렇게 우리는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왜 가시가 나를 찌르느냐? 좀 안찌를수 없느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시는 찌르라고 있는 것입니다. 장미꽃 가시를 보고 "왜 너 나 찌르니?" 그러면 장미꽃 가시는 "찌르라고 날 만들어 놓았지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만들어 놓았느냐?" 그렇게 할것입니다. 가시는 찌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가시가 여러분을 부드럽게 안마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찌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면 남편이 여러분을 찌르거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가시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편을 가시로 만들어 놓았으면 그는 가시노릇해야지 가시노릇 안하면 안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찌르거든 하나님이 찌르라고 가시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찔러야 돼요. 안 찌르면 가시가 안돼요. "왜 나를 찌르느냐?" 하나님이 가시로 만들어서 찌르라고 보내놓은 것이니 하나님께서 찌르라고 한 것 안 찌를수가 있나요?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가시가 되든지 아내가 가시가 되든지 가시의 본분은 찌르는 것이므로 마땅히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고 괴롭지요. 아프라고 찌르는 것이므로 아픈 것은 당연한 것이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시에 찔려서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울 때 "왜 이러느냐? 왜 아프느냐?" 그러지 마십시오. 아프라고 찌르는데 안아플턱이 있어요? 아프라고 남편가시를 주었는데 남편 때문에 고통 안당할턱이 있어요? 아프라고 아내가시를 주었는데 아파야지요. 자식이 가시가 되면 부모가 아파야죠. 그렇기 때문에 바울선생이 말한 것처럼 가시를 저항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이런 가시가 왔느냐? 아이고 내 팔자야. 이놈의 남편, 이놈의 아내, 이놈의 자식, 아이고 내팔자야 이런 부모, 이런 형제, 아이고 내팔자야 이것 없앨수 없느냐?" 그러지 마십시오. 바울선생도 세 번이나 저항하고 가시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가시를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내가 그를 찔림을 받아서 변화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 가시가 와서 찌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시에 찔릴 때 이로 인하여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항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싸우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찌르는 자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찔리는 자가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면 가시가 사라집니다 여러분! 변화가 안되면 계속해서 가시가 찌르지만은 내가 가시에 찔려서 변화를 받으면 가시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와 싸우면 끝까지 가시가 찌르고 피투성이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가시에 찔려서 내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되고 순종하고 훌륭한 인격이 되면 가시는 이이상 더 찌를 힘을 잃어 버리고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남편이 가시가 될 때 저항하지 마십시오. 싸우지 마십시오. 찔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면 남편가시는 나중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아내가 가시가 되어서 자꾸 찌르고 바가지 긁고 고통을 주거든 아내하고 싸우고 주먹으로 때리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하고 그런 것 반복하지 마십시오. 찌르거든 변화 받으십시오. 하나님께 깨어지고 회개하고 내가 뭐가 부족함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려고 내 아내를 가시로 만들어 놓았으니 내가 깨어지자. 내가 깨어져서 변화 받으면 가시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가슴에 가시가 되는 것은 부모가 변화 받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깨어져서 회개하고 변화받으면 여러분! 그 자식의 가시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는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보낸 것이기 때문에 변화를 받으면 가시의 목적이 성취되기 때문에 더 이상 가시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토록 가시에 찔리는 것은 저항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시를 물리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시하고 싸우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가 왔을 때 가시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회개하고 낮아지고 변화받으면 오히려 가시는 여러분에게 큰 축복의 원천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육은 죽고 영이 살아나고 인간은 약해지나 속사람은 강해지는 위대한 역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가 가져다 주는 축복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가시가 오면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시에 찔리게 되면 내가 교만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낮아지게 되죠? 가시가 얼마나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가시가 오기 전에는 자꾸 바깥만 내다보다가 가시에 찔리면 자기를 내려다보게 되고 자기의 찔린 상처를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겸비하게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도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가시가 찔릴 때 겸손해 지면 영광의 영,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히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넘치게 하는 것이니 가시에 찔려서 겸손해 지는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또 가시에 찔리면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종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의 종들이 많은 시련과 환란과 고통을 당한 주의 종은 그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기도를 많이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므로 말씀을 증거할 때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환란과 고통을 당한 체험이 없이 조용하게 화초 키우듯이 가꾸어진 주의 종은 지식은 많고 웅변은 잘할지 몰라도 그 말씀에 은혜가 없습니다. 왜, 깨어지지 않아서 성령이 넘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은혜는 깨어지고 겸비하게 낮아진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과 같아서 높은데서 낮은데로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은혜가 넘쳐나면 우리의 생활속에 굉장히 아름다움과 행복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가 와서 우리를 약하게 만들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런 체험을 많이 하셨지요? 여러분이 물질도 풍부하고, 환경도 좋고, 건강하고 좋을때는 자기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만하면 성공한 사람이다. 내 지혜와 총명과 능력과 청춘과 건강을 의지하자." 그래서 종종 주일도 빼먹고 하나님 뜻도 무시하고 자기를 의지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시에 찔려서 피투성이가 되고 깨어지고 약하게 되면 자기 힘으로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힘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능하고 연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숨쉴 수도 없고 일어나서 걸을수도 없고 일을 행할수도 없습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약하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위기를 당해서 마음에 약해지고 정신적으로 고통 당해서 정신병원에 찾아와서 치료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항스트레스성 약을 많이 먹어서 중독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 약을 먹어서 마음에 안정을 얻으려고 하지말고 깨어져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이 임하여 주셔서 염려와 근심을 이길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깨어져야 믿음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할 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임하여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게되면 강한 저 앗시리아나 바벨론이나 메데파사나 헬라나 로마 등이 어디로 갔습니까? 역사적으로 막강한 나라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허약해서 앗시리아에 지배를 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히고 페르샤에 짓밟히고 로마에 식민지가 되고 온갖 구박을 당한 약하디 약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렇게 허약한 나라가 그 강대한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다 사라지는데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제2차대전때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참살했습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육을 당하고도 히틀러도 죽고 독일제국도 사라졌지만 그러나 유대민족은 아직도 이스라엘에 살아 있습니다. 왜, 약한자가 하나님께 의지하므로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강한자는 자기를 의지하므로 심판을 받을 때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약한 민족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음으로 어떠한 역사적인 위기와 역경도 이기고 살아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장 11절로 13절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부자일때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가난해도 비천하지 아니하고 약할때도 버림받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살수 있는 비결을 배울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도 고난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를 비워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자기를 비우게 됩니다. 여러분 빈그릇에 다른물을 채울 수 있지 물이 가득한데는 채울 수 없지 않습니까? 잉크병에 잉크가 가득한데는 물을 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잉크를 부어 버리고 그리고 맑은 물로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비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가시의 체험입니다. 고통과 가시가 오면 내 교만과 자만이 다 부어지고 비어지고 빈그릇이 되고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실거리고 충만하게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가시는 우리에게 굉장히 축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선생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시 때문에 약해지고 능욕을 당하고 궁핍하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했으나 원망이나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원망, 불평, 탄식을 할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주의 위대한 종으로써 주의 사명을 받고 온천하에 다니면서 내 육신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는데 왜 내게 가시가 있습니까?"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위대한 일을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위대한 일을 하고 현재 큰그릇 이상으로 큰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더 깨어지고 더 겸손해야 된다. 깨어지고 겸손한 것은 자기 힘이나 능으로 수양과 도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 찔려야만 된다. 가시에 찔려야만 네가 더 겸손하고 깨어지고 헌신하고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므로 더 큰일을 하게 되고 더 큰그릇이 되고 더 큰 하나님의 은총을 채험하게 된다."고 하나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기를 "가시 때문에 내가 약할 때 곧 하나님이 능력으로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의 의미를 모를 때 원망하고 탄식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시를 통하여 우리를 돌보심을 알게 되면 안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된 남편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가시된 아내를 인하여 춤추며 감사하고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가시가 있는 자식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형제가 이웃이 가시가 되거든 여러분이 신령한 사람이 되고 자기를 비워 버리고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약할 때 강하게 될 수 있다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는 가시를 자꾸 물리치려고 하고 가시와 대적하여 싸우다가 더욱 피투성이가 되고 가시는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가시를 하나님의 뜻으로 품에 품어 들이십시오. 그리고 한껏 찔리십시오. 그러면서 비명 소리를 내고 깨어지고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허약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여러분은 놀랍게 강해지고 능력이 있어지고 은혜가 충만해 지고 신령해 지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됨과 동시에 가시는 무력해 지고 사라져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가시의 체험을 합니다.
그 가시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가까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부모가 형제가 이웃이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가 내 직장이 내 사업이 가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가시를 저항하고 가시를 물리치려고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더욱 피투성이가 되는 것이 옵니다 하나님! 가시를 끌어안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내가 변화 받으면 가시가 사라집니다. 찌르는 사람이 변화 받는 것이 아니라 찔리는 사람이 변화를 받으면 찌르는 사람이 변화되고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시고 아버지여 오히려 가시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가시로 인하여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받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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