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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적의 시작 / 요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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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시작
(본문/ 요 2:7-8)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는 요한 복음에서의 첫 번째 예수님의 이적의 내용입니다. 오늘의 물이 포도주가 된 이 이적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공통된 예수님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원칙은 우리가 해야할 일, 즉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 먼저 우리 앞에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 앞에 떨어진 명령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예비적인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들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고자 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환경에서 나오는 말씀이든지 주님의 말씀대로 100%실천할 수 있다면 예수님도 놀랐던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순종의 모습이 아닌 의심의 반응을 보인다면 연약한 믿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연약한 믿음의 특징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들의 경험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의 믿음이 갈등하는 연약한 믿음이라면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100%의 순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라는 수준의 작고 연약한 믿음이라 할 찌라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의심의 울타리를 깨트리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얼마 전에 하나님의 법칙, 세상의 법칙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 같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배경은 혼인잔치 중에 있는 기쁨의 축제의 장소입니다. 결혼은 어느 민족에서나 중요한 축제의 자리입니다. 때문에 결혼식을 치르는 의식도 다양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의 풍습 중에서 특이한 의식은 신부의 처녀성을 공개로 확인하는 처녀의식입니다.
유대 사회에서의 신부의 순결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혼인 첫날밤을 보낸 후에 신랑과 신부는 신부가 순결한 처녀라는 증거를 가지고 밖에 나와 하객들에게 확인을 시킴으로 결혼식의 축제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면서 잔치가 흥이 나면서 이런 잔치가 일주일 정도 계속됩니다. 이때에 하객들은 춤을 추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신랑 신부를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 흥겨운 잔치에 아주 심각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혼인 잔치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아직 축하연은 일주일이나 계속되어야 하는데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는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흥겨운 잔치의 판이 깨어질 상황이 되었습니다. 잔치를 주관한 사람들은 조롱의 대상이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님이 일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주님의 말씀은 "물을 채우라"라는 말로 시작이 되지만 먼저 포도주가 모자르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백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일하시기 전에 반드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자란 부분을 그분께 아뢰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추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분께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들을 위한 주님의 역사 하심은 우리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현재의 삶 속에서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주님 앞에 고백하는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서 여러분의 추한 모습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저는 아직까지 주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이심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솔직하게 그분 앞에 무릎꿇고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이적은 이렇게 단순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주 조용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이 이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이적입니다. 이러한 이적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야 그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수많은 권력자들 앞에서 이런 이적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증거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아주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이제부터 주님의 이적의 명령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이적을 나타낼 때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하여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원칙입니다. 주님은 그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직접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물을 채우라" 가 아닌 "포도주를 내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물을 채우라" 라는 명령의 말씀을 우리들 앞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원칙을 뛰어넘는 교만함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 포도주를 주십시오." "그러면 그 포도주를 우리가 마시고 주님의 일에 더욱 헌신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그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은 이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느냐? 먼저 물을 채우라 포도주를 마시고 싶으냐? 먼저 물을 채우라. 구원의 은혜를 얻고 싶으냐? 먼저 주 예수를 믿으라 앞을 보기를 원하느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이 우리가 준비한 물을 가지고 포도주로 변하는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포도주는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바로 그 포도주는 누가 마실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분명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기를 명령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비전들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주시는 가장 고귀한 포도주를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야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면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그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얼마나 함께 계시며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복을 주실 이들에게는 명령을 하시면서 우리들의 순종의 모습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주님의 명령 앞에서 우리는 의심의 안개를 가지는 연약한 믿음의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넘어지기 쉬운 의심의 덫에 빠져들 위험을 갖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포도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야기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포도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을 채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주님 ! 우리는 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손을 씻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은 잔치자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포도주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현재의 우리의 필요한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과정을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행위를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하는 순종의 자세를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과를 얻기를 원합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죄를 이기게 해주시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먼저 빛으로 오신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자녀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능력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 항아리와 같은 존재일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물에 채워진 결례의 항아리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사전이나 외출하고 들어 올 때마다 손을 씻는 항아리입니다. 마땅히 물로 채워져야 했을 항아리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 잔치에 있는 이 항아리는 텅 비여 있는 돌 항아리였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마치 비어 있는 돌 항아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빈 항아리가 예수님의 이적이 없을 때 잔치 집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 항아리가 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물로 채워져야 했습니다. 물을 채우는 이 작업은 누가 해야 합니까? 바로 여러분과 제가 채워야 합니다. 물을 채우는 모습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물을 채우는 모습을 보십시오. 물을 채우는 사람들의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저희가 아구까지 채우니"
물을 채우는 이 순종의 모습이 우리가 배워야 할 최선의 모습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구까지 채운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도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생황에서도 우리는 아구까지 채우는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아귀까지 채우는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빈 항아리의 모습으로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찌라도 여러분은 끊임없이 이 자리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채워야 합니다. 아구까지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하는 만족감에 멈추어 설 수 있습니다. 들을 만큼 들었습니다. 알만큼 알 정도까지 신앙의 연륜도 쌓였습니다. 나름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서 죽음이후의 설레는 천국의 삶을 동경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까지의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이제 나의 항아리는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물을 채우라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주님을 쳐다 봅니다. "우리는 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포도주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물을 채우라" 자 이제 보십시오. 물을 우리가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물이 흘러 넘치기까지 채웠습니다." 모두가 손을 놓고 주님을 쳐다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사람들이 다시 물 항아리를 쳐다봅니다. 그것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물 항아리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의 절정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가야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100%의 순 믿음입니다. 요단강까지 가는 것만으로는 물이 멈추는 이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발을 담그어야 물이 멈추는 이적이 일어납니다. 여리고성을 여섯 번 돌았다고 여리고성이 무너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일곱 번을 돌아야 여리고성이 무너집니다. 여러분의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포기하게 만드는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연회장이 마십니다. 그것은 물이 아닌 포도주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이 역사 하셨습니다.
물을 채우라 할때 물을 채우는 이 사람들에게도 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는 이 사람들에게도 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지금의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의심이 치밀어 오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하며 의심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더 심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니 갖다 주었더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원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순종입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의 순종이 아닙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데 까지의 순종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남모르는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털어 놓으십시오. 여러분이 남모르는 상처 속에 신음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이 남모르는 부족한 믿음 때문에 두려워하며 주님의 뒤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갈등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는 명하신 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차례입니다. 주님께서 완성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저는 항아리를 물로 채웠습니다.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러나 나의 노력만으로는 포도주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옵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채워진 물 항아리가 포도주가 되게 하옵소서. 저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높여 드리는 믿음입니다. 먼저 우리의 모자란 부분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 최선을 다해 순종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합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복이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있는 그곳이 상처로 얼룩진 구렁텅이라고 할 찌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로 그곳까지 주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곳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으로 오는 상처와 핍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구렁텅이라 할 찌라도. 우리가 그곳에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치는 곳이라 할 찌라도 우리 주님의 은혜로 그곳까지 주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이 요구하는 곳까지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나가면 됩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문고리를 잡은 자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문고리를 잡은자라면 이제는 그 문고리를 잡아 제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문을 열어젖힌 그 후에 다가오는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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