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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동을 주는 인생 / 마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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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5-10
"감동을 주는 인생"

저는 요즈음 '2002년 6월의 한국땅에서 사는 우리에게 삶의 화두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6월의 상순을 지나면서 제게 화두처럼 떠오른 두 단어는 바로 '감동(感動)'과 '선동(煽動)'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2002년의 6월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별다른 감동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 경기가 주는 감동입니다. 지난 6월 4일 한국이 가진 첫 경기인 대 폴란드 전에서 한국은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승, 그것도 48년에 첫 번째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그 승리의 현장을 여러분도 보고 느끼셨겠습니다만은 온통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경기가 있었던 부산 운동장만이 아니라 서울의 광화문, 대학로, 서울역 그밖의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습니다. 제가 구독하는 조간 신문의 다음날 아침 칼럼 제목은 '벅찬 가슴, 내 어휘는 왜 이리 짧은가'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온 국민들이 하나되어 맛보는 거국적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맞은 현충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낮10시 나라를 위해 숨져간 호국선열들을 기리는 묵념 사이렌과 함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도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맛보고 누리는 이 자유는 그들의 희생의 결과였기에 맛볼 수 있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러한 선진들 앞에 부끄럽고, 역사 앞에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심정을 가지게 되지만 그래도 그 찾아오는 감동 앞에서 다시금 인생을 추스리게 되고 새 마음을 다짐하는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6월의 나날이 모두 다 감동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펼치는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는 감동이 아닌 선동이었고 그 선동은 우리에게 희망 대신 실망, 치유 대신 고통, 기쁨 대신 슬픔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나흘 동안 우리는 막판 폭로전이 기승을 부리고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선동이 가져다 주는 실망과 회의를 더욱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치판이 이러다 보니 아예 국민들은 선거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누가 나오는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감동인데 선동만을 일삼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이 성공 인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이 열망하는 권력과 재력과 지력을 많이 가진 인생이 성공 인생일까요? 그래서 유력한 정객이 되고, 재벌이 되고, 석학이 된 사람이 성공 인생일까요?... 누가 제게 '성공 인생이란 어떤 인생을 가리키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성공 인생은 감동을 주는 인생'이라고... 이 땅에 한평생 살면서 남에게 감동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인생이라면 그는 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이라고 단언해도 좋다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떠올리면서 이 물음에 한번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정말 후회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겁니다. 성공적 인생을 살아가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만약 지나온 한 주간, 한 달, 1년, 지나온 한 평생 동안 나로 인해 감동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재고해 보아야할 삶입니다. 감동은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인생은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생'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물론 감동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감동이 선동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감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더러운 겁니다. 감동은 강요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한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겁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겁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수수하고 가난했던 옛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세대가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생들이 감동을 잃어버리고 선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도, 유행도 사실은 모두가 다 선동입니다. 그런 선동에 휩쓸려 살다보니 자기를 잃고 점점 더 삭막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동이 있어야 하고 감동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는 우리는 한 '감동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가버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을 찾은 주님 앞에 나아가 자기 하인의 병낫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좀 고쳐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그의 간청에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 집에 주님 모시기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다만 여기서 말씀만으로 자기 종을 낫게해 달라'는 믿음을 피력합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요즘 말로 하면 감동을 먹습니다. 10절에 보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건 깜짝 놀랐다는 말이요 신기해 하셨다는 말이요 감동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노라...' 이것은 주님의 처녀 경험이라는 말입니다. 전에 이런 믿음의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이런 놀라운 감동을 맛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두 가지를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할 선민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지 않는 것에 놀랐고, 또 하나는 믿음을 갖기 어려운 이방인들이 오히려 믿음을 갖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도 주님을 향해 갖는 믿음이 너무도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놀랄 수밖에요, 감동을 받을 수 밖에요...

이 사람은 두 가지 감동을 주는 인생이었습니다. 첫째는 사람 곧 이웃에게 주는 감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략되고 있습니다만은 병행 본문인 눅7장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발벗고 나서서 이 백부장의 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건 매우 이례적이고도 드문 일입니다. 어디 유대인 그것도 장로들이 경멸하는 이방인을 두둔하고 높입니까? 그것은 백부장이 저들을 사랑했고 존중했고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회당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저가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의외로 손쉽게 감동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속아서 감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감동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감동케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요 또 그렇기에 그런 삶을 산다면 그는 진짜 성공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주님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감동시킨 것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을 향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정말 오늘 본문 10절 말씀이 그 사실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바로 그 백부장의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믿음만큼 감동을 주는 게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만큼 감동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감동은 물질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건 믿음의 차원입니다. 신뢰하고 믿어주는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겁니다. 모두가 다 나를 안믿어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동 있는 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주님을 감동시킨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병든 것을 안타까와하며 주님께 그 하인의 병낫기를 간구합니다. 이것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의 병낫기를 위해 간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당시 물건처럼 취급받던 비천한 종을 위해 주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습니다. 무가치한 것을 위해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다 접습니다. 여기에 진정 타인을 사랑하는 애틋한 정이 있습니다. 하잘 것 없는 것을 향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정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풍병이 어떤 병입니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쉽게 그 하인을 포기하는 게 현명했습니다. 종이 일을 해야지 밥만 축내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회복한다고 해야 이젠 일꾼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긍휼히 여기는 백부장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님을 감동케 한 것은 주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나타낸 반응입니다. '주님, 주님을 어찌 저희 집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감히 주님을 맞을만한 처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냥 여기서 말씀만 한 마디 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저도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또 제 밑의 부하들도 제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데 그러니 굳이 수고롭게 누추한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없이 여기서 한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제 하인의 병이 낫겠나이다...'
만약 제가 주님이었다면 참 헷갈렸을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버나움에 저만큼 유력한 자가 또 어디 있을까요? 로마 백부장이면 그 사는 정도가 꽤 부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누추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하지만 본문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의 말이 결코 가식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주님을 너무도 크게 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 자기가 너무도 작게 여겨지는 겁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백부장은 주님 앞에서 그런 자신을 느낀 겁니다. 자기가 세상에서야 좀 산다 싶겠지만 주님은 너무도 크신 분으로, 너무도 귀한 분으로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에는 송구스럽다는 얘기겠습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이 좀 살면 과시적이기 쉽지 않습니까? 이참에 뭔가를 좀 보여주려고 굳이 데려다가 은근히 과시하고픈 마음도 없지 않은 게 인간심사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백부장의 집이 검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했는데 그 건축비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허리띠를 졸라맸을 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생각하나 저렇게 생각하나 그의 믿음은 놀라운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신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만 복받고 살겠다고 열렬히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까? 신앙인이란 적어도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보면 평생 자기 문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단 한번도 남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러 나오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점점 이기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변질되어가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병들고, 자기가 어려움만을 위해서 기도할 뿐 남의 아픔과 고민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을 줄을 모릅니다. 바삐 살아서만은 아닙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는 주님도 그리고 이웃도 감동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평안의 나날을 주시는 것은 불안 속에 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라고 주신 은총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화목을 주시는 것은 어려움 당하는 이웃을 위해 마음을 나누며 살라고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수고가 있습니까? 오늘 이웃 초청 생명열매 맺기를 위해 여러분은 얼마나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살피고, 찾아가셨습니까? 나만 예수 믿고 나만 예수 안에서 맛보는 은총을 누리면 되는 겁니까? 만약 누군가를 위해 이 백부장처럼 간절함으로 주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신앙을 부끄러워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주 약하고 여린 철부지 신앙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웃을 위해 주님 앞에 나가 저를 위해 간구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감동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감동한 그의 믿음은 약한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귀한 것을 드릴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눅7:4-5절에 보면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백부장의 청을 들어줄 것을 요청할 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였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먹고 주님 앞에 저를 추천하러 왔겠습니까? 유대 장로들이 주님께 그를 위해 청하는 것이 쉽지 않듯이 그 또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짓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식민지의 얼을 키워주는 것으로 로마의 얼을 새겨넣어야할 로마의 입장에서는 탐탁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회당을 짓는다는 건 뭐니뭐니해도 금전적 뒷받침이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분명 회당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드렸을 겁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백부장이라는 직위는 많은 돈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근검절약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 백성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준 것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백부장의 처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 드림이 아까운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이 봉헌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들 가운데도 교회 건축에 부담을 갖고 안나오는 분들이 몇 됩니다. 정말 제직은 아무나 세워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은 재물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세상에 집착하게 하고 주님을 등지게 하는가를 단적으로 짚어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서 고쳐 주겠다'고 했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는 백부장의 고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를 그의 마음에 맞이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겸손은 나눌 수가 없는 겁니다. 믿음 좋다면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백부장의 신앙은 상승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록 그의 집은 누추하지도 않았고 초라하지도 않았겠지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각할 때 자기 집이 주님을 모시기에는 누추하고 초라하다는 그의 판단은 겸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정확성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겸손으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하나님은 커지고, 교만으로 자신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작아지십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까? 그건 그의 가장 큰 자질이 겸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겸손이 뛰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런 모세가 평생에 딱 두 번 혈기를 냅니다. 한번은 애굽의 왕자로 있던 젊은 시절에, 그리고 또 한번은 물을 달라고 투정하는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지녀야할 겸손은 얼마나 완벽한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같이 거듭나지 못한 성정으로 혈기를 부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11:29절에 보면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아무리 남에게 잘하고 하나님께 헌신적이어도 교만하면 그 모든 것은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주님을 감동케 한 이 믿음의 사람은 바로 겸손으로 무장한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힘좋은 사람, 능력있고, 재주 좋고, 돈 많은 사람이 흔드는 게 아니라 바로 겸손한 사람이 흔드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백부장의 믿음은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여기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할 때 주님이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자 그는 그대로 그 말씀을 믿었고 그 하인은 나음을 얻습니다. 말씀을 믿으면 믿는대로 될 것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될 것이고, 정확하게 믿으면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면 의심대로 될 것이고, 작게 믿으면 작은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했는데 그리 되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말씀을 붙드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여러분의 감정과 지식과 체험보다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감정과 체험은 내 것이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 이방 백부장이 바로 주님을 감동시켰고 그로 인하여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은 결코 믿음을 갖기에 좋은 위치나 조건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감동케 했습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긍휼의 사람이었고, 겸손했고, 하나님께 부요했고, 말씀을 붙들었던 그였기에 그는 감동을 끼치는 성공 인생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이 이와 같이 감동을 주는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감동케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긍휼과 헌신과 겸손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인생을 주님은 아름답다 하실 것이고 잘 살았다 하실 것이고 승리했다 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 어디에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 참된 믿음으로 감동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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