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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 말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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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4:4-6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옛어른들은 '사람은 세상에 나오면서 세 가지 복을 잘 타고나야 된다'는 말을 하곤 하십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잘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은 서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낳아 주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내가 부모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결정적인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선생을 잘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단 한사람의 좋은 선생 만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단 한사람의 못된 선생 만나서 일생이 망가지기도 하기에 이 복도 앞의 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만나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합니다. 이거 실패하면 또 큰일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고 하니 부모와의 만남이 인생의 초반기를 결정짓고, 선생과의 만남이 인생의 중반기를 결정짓고, 배우자와의 만남이 인생의 후반기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이 셋 중에서도 가장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바로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정말 이것이 '타고나는 복'인 것은 자기 선택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부모를 주었느냐' 항변할 수 없고 또 반대로 '왜 이런 자식을 주었느냐'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가 바로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옛어른들이 일컫는 세 가지 복이란 것이 사실은 모두 가정이라는 공동체 속에 관련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만남이나 배우자와의 만남이나 스승과의 만남이란 것이 다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연관된 만남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는 스승도 되는 것이고 부모의 만남 속에 자식들의 미래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거기서 자식이 태어나고 그 자식들이 부모의 영향 속에서 커가는 것이기에 이 세 가지 복은 결국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하나로 엮어지는 만남인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이 자기 딸 결혼 주례를 하면서 신랑신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행복을 찾아 오늘 결혼한다만은 이것을 꼭 명심하거라. 너희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결혼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행복의 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오늘 천국에 들어가는 거다. 그러나 이것도 명심해라.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사실을 잊지말라. 알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정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통전적 자리로 천국과 지옥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곳입니다. 가정이 누구에게나 다 행복의 보금자리가 아니고 때로는 불행의 무저갱일 수 있습니다. 가정이란 우리네 인생의 행, 불행을 좌우하는 가장 밀접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밖에서 다 형통해도 가정이 불화하면 더할 수 없는 불행이고, 밖에서 좀 힘들어도 가정이 화목하면 덜 불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화목과 가족의 일치,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행복이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를 통해 마지막 때의 심판을 언급하시면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의 화합 여부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마음이 하나되면 복을 베풀겠지만 그 두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면 저주를 퍼붓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가정에 달려있다는 얘기입니다.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가족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감사하고 이해하는 화목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두 마음을 서로 하나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 두 마음이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주님이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느냐 복을 받느냐 하는 것은 바로 가정의 문제입니다.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복을 받겠지만 가정이 불화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기초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묘판'으로서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가정이 평화로워야 사회가 평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화목합니까? 평화롭습니까? 부모와 자식의 마음이 서로 하나되어 있습니까? 부모의 마음이 자녀의 마음 같고, 자녀의 마음이 부모의 마음 같습니까?... 그렇기는 고사하고 부모들조차도 반목하여 돌아서고 갈라지는 시대 아닙니까? 이래서는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이킬 수 있을까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게 참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부모 자식이라는 게 서로 마음이 하나되기 보다는 자칫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지 아니하고 평행선을 달릴 때가 많습니다. 소위 '세대차'라는 것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인 것입니다.
얼마 전 TV에서 '친구'라는 영화를 하길래 잠깐 들여다 보았습니다. 거기 보니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고등학교 교실에서 40대 중반의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합니다. 한 학생씩 불러내어 한손으로는 뺨을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사정없이 다른 뺨을 후려칩니다. '다음 학생'하고 부르자 또 한 학생이 움추린 채 두려움에 떨면서 다가섭니다. 여지없이 선생은 그 학생을 후려칩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느그 아부지 뭐하노?' 학생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예, 회사에 다니십니더.' '야, 이놈아, 상사에게 굽신거려가며 돈벌어서 널 공부시키는데 공부 꼴이 이게 뭐꼬?' 그리고는 또 한방을 먹입니다.
다음 학생이 다가서자 또 묻습니다. '느그 아부지는 뭐하노?' 이 친구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재촉하는 선생의 일갈에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예, 저희 아부지는요, 장의사합니더...' 그러자 선생은 눈을 부라리면서 '야 임마, 느그 아부지는 죽은 사람 염해 가며 오만 고생하면서 벌어 널 공부시키는데 도대체 성적이 이게 뭐꼬?' 그리고 또 한방을 먹입니다. 그 학생이 바로 장동건입니다. 그 다음에 유오성이 나타납니다. 역시 선생이 묻습니다. '느그 아부진 뭐하노?' 선생의 질문에 유오성은 '예, 건달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엔 그 대답에 선생이 잠시 움찔 놀라지만 또 다시 화를 내면서 그대로 한방을 먹입니다.
이 선생의 체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선생 편에선 저들이 잘되기를 바라서 손대는 '사랑의 매'라고 할 것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이 돌아서길 원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매맞는 학생들의 마음속에는 선생을 향한 반항이 불일 듯 일고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같이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그 매를 맞습니다. 결국 그 중의 두 친구가 자라서 건달이 되고 망가진 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끝났다는 그런 얘기가 '친구'라는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부모든 자식이든, 선생이든 학생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서로가 서로에게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맞추라고 한다면 이건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맞춰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것입니까?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잇는 종말의 역사를 위해 먼저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곧 그 두 마음 중 어느 한 마음을 기준으로서가 아니라 저들 마음이 서로 이어지는 '제 3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한 율법과 법도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저들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하는 겁니다. 이 '제 3의 자리'가 어디일까요?
사도 바울은 엡6장에서 자녀들을 향해 '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권고합니다. 또 부모들에게는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주 안에서'와 '주의 교양과 훈계'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런 훈계는 우리가 세상 살면서 도덕시간에 익히 듣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달리 추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그냥 훈련시키고 훈계하라는 게 아니라 '주님의' 훈련, '주님의' 훈계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권면의 초점입니다.
이 '주 안에서의 교양과 훈계'란 '자식이 사랑해 주어야 부모인 나도 사랑한다'가 아니고, '자식이 사랑하는 만큼, 공경하는 만큼 나도 사랑을 베푼다'는 상호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조건 없이, 상대적 반응과 관계없이 그냥 자식을 향하여 내리사랑을 베푸는 겁니다. 이게 부모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잘못에 대해서는 주님이 노하셨듯이 부모도 노할 수 있고 때로는 자녀를 방기하지 않고 책망으로서 바로 잡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 '주 안에서'가 바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하나됨의 자리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라고 정해놓고는 이것을 어떻게 영어로 옮길까를 놓고 설교제목을 번역해 주시는 이광열 집사님과 고민을 좀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이번 주 말씀 제목이 영문으로 옮기기가 쉽지않다고 말씀하시면서 'When we turn our mind to God'이라고 번역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돌아설 때...' 오늘 말씀의 초점을 분명히 파악한 참 적절한 제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돌아설 때 부모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그럼 이 제목을 또 한번 달리 풀어본다면 어떤 표현이 적절할까 생각하다가 마침 서재에 꽂힌 책제목에서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 부부가 쓴 '부부와 가족과 친구 사이에 친밀감을 키우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제목이 'Till the heart be touched'였습니다. '주님께 어루만져진 마음이 되기까지...' 그걸 보면서 오늘 영어제목과 더불어 본문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글귀다 싶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께 어루만져질 때 두 마음이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모된 내 마음과 내 자식의 마음이 서로 이어져 주님의 저주가 아닌 복을 누리는 가정이 될까', 아마 이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주님에 의해서 먼저 어루만져지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의 마음이 각각 주님에 의해 어루만져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될 수 있는 겁니다. 돈으로 되는 게 아니고 물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이 주님에 의해 어루만져져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돌아설 때 거기서 우리 마음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먼저 보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인해 새로워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의 손에 만져졌습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영혼을 스쳤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습니까?...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손에 어루만져진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손이 우리 속사람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서 병든 부분, 상한 부분을 새롭게 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옛사람의 썩고 상한 속내들이 다 치유되고 새로워짐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됨의 자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어루만져진 심령은 어떤 심령이 될까요? 이제 그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가 됩니다. 여기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께 하듯'이란 뜻입니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자세로 '공경'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공경'이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전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손에 어루만져진 마음은 마치 하나님께 하듯 부모에게 하는 그런 순종과 공경의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순종함으로서 부모를 존귀케 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앤 랜더즈라는 사상가가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아버지와 관련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나이 네살 때,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 나이 다섯살 때, 아빠는 많은 걸 알고 계셨다. 내 나이 여섯살 때, 아빠는 다른 애들의 아빠보다 똑똑하셨다. 내 나이 여덟살 때, 아빠가 모든 걸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내 나이 열살 때, 아빠가 어렸을 때는 지금과 확실히 많은 게 달랐다. 내 나이 열 두살 때, 아빠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빤 당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엔 너무 늙으셨다. 내 나이 열 네살 때, 아빠에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빤 너무 구식이었다. 내 나이 스물 한 살 때, 우리 아빠말이야,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졌어라고 나는 친구들에게 얘기했다. 내 나이 스물 다섯 살 때, 아빠는 그것에 대해 약간 알기는 하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오랫동안 그 일에 경험을 쌓아오셨으니까. 내 나이 서른 살 때, 아마도 아버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아버진 경험이 많으시니까. 내 나이 서른 다섯 살 때, 아빠에게 여쭙기 전에는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내 나이 마흔 살 때, 아빠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아버진 그만큼 현명하고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 내 나이 쉰 살 때,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이 모든 걸 말씀 드릴 수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었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까요? 그러기에 성경은 '순종'을 명하는 겁니다. 순종은 모든 걸 다 이해하고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는 게 순종입니다. 다 납득이 되지 않아도 '저분은 나를 결코 해롭게 하실 분이 아니다'라는 믿음으로 그 말을 따라가는 겁니다. 모리아산 제단 위에 올려지는 이삭처럼 그렇게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 자식의 순종하는 마음이 바로 부모의 마음에 이어지는 겁니다.

그럼 부모는 자식의 마음에 어떻게 이어져야 할까요? 언젠가 주님은 제자들 앞에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는 "누구든지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 얘기를 하신 게 아니라 어른 얘기를 하신 겁니다. 어떠한 어른이 되어야 하느냐, 바로 하나님 나라를 떠받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현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자가 바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어린아이 같은 자라는 것은 그 체험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가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함 없이 물질적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입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마르지 않는 사랑이 아니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된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해야할 일은 부모 사랑이 아닙니다. 그 차원에 머문다면 믿지않는 부모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자식 사랑이 자식을 망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역대 대통령 가정의 그러한 자식사랑이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를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챤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할 일은 그런 자식 사랑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미 나타난 그리고 경험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 어버이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바로 참된 사랑이 깃드는 것입니다. 참된 부모의 의무는 자기 자식들에게 그리고 이후 세대에게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줌으로 자식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따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뜻이며 주님께서 제자들 한 가운데 어린아이를 세워놓고 훈계하신 교훈의 참뜻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에 우리가 힘쓸 일은 '가족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가는 바로 그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마지막 타겟으로 가정을 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가정해체증상이 심각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무엇보다 가족들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마음도,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교우간의 마음도 그리고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인 우리의 마음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복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 우리 서로 서로 마음과 마음을 이으십시다.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 안에서 자기를 비우고 서로 하나되는 은총을 누리십시다. 그게 바로 우리가 그날에 주님 앞에 은총을 입는 길이요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가정의 달'이 시작되는 이 5월의 첫주일 우리는 부모로서 또 자녀로서 자기를 비우고 주님의 뜻 안에서 서로 하나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하나되는 은총을 누리십시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고 우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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