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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집의 위험 / 마 12:43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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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빈 집의 위험
본 문 :  마태복음 12 : 43 ∼ 45 


어떤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단어와 그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르시스라고 하는 소녀가 살았는데 숲 속의 은빛 고요한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거기다 대고 사랑을 고백했지만 물론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만 물 속에 빠져서 죽고 수선화가 되었다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자애병, 이것을 나르시시스즘이라고 한다 라고 설명을 했더니 어느 여학생 하나가 하는 말이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병에 걸린 것인가 봐요.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 예뻐요. 너무 예뻐서 거울을 떠날 수가 없고 때로는 내 얼굴을 내가 들여다보면서 아주 미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애병이 아니라 착각증이란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자신을 안다는 것, 이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다는 것, 그것처럼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잠깐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 운명의 시점이 어디까지 왔는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걸 생각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파생됩니다.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분이 "The Will to Meaning"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쓰시는데 그 속에서 '공허감과 무의미'를 지적해서 논문을 전개합니다.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인간상태를 그는 철학적으로 이렇게 불렀습니다. '존재적 진공상태'라 그랬습니다. Existential Vacuum 이라구요. 존재적 진공상태, 아주 의미 있는 말이올시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멀쩡한 것 같은데 속이 텅 비었습니다. 진공상태라니까요. 여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 빠지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왜빠지는가? 하면 뭔가에 착각이 와서 그래요.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충동이나 본능이 인간에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아무래도 인간의 본능적 충동, 그것을 따라가서는 인간은 만족할 수가 없어요. 동물은 배만 부르면 됩니다. 동물적 충동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인간은 그것이 아니에요. 배고픈 것과 배부른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것 되고싶은 것, 그런 인간적인 본능, 이것을 충족한다고 해서 내 내적 존재가 채워지는 건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걸 모르기 때문에 문제 에요. 또 하나는 전통이나 관습 그리고 문화적 가치관, 여기에 따라간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삶의 존재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남들이 가진대로 가지고 남들이 먹는다고 먹고 남들이 뭐라고 해서 내가 따라하고 문화, 풍속, 전통을 충실하게 따라가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거기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더냐 하는 것이에요. 될 것 같은데 안되는 게 이거예요. 한평생 따라 왔는데 Nothing. 그게 아니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이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문제요 이건 나 자신만이 해결해야될 문제입니다.
존재적 진공상태에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은 두 가지 경우로 빠지는데, 하나가 동조주의입니다. 무조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멍청하게. 이건 남이 충동해서 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없습니다. 또 하나가 전체주의에 빠집니다. 그래서 다른 그 누군가가 본인에게 무엇인가 해 주기를 바라고 강압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고 나는 그저 따라가고만 싶은 거예요. 그래서 독재자, 전체주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성경을 볼 것 같으면 현대인에게 주시는 대단히 심오한 교훈의 말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빈집이 있습니다. 깨끗이 수리된 집이 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들어와서 자기 집을 만들었다 뭐 그런 얘기입니다. 빈 집이 문제라니까요. 좀 죄송스럽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 자랐던 집은요, 얼마 전에도 가보았습니다만은, 이 언덕 위에 언덕을 깎고서 이렇게, 뭐 기초공사 같은 거 옛날에 뭐 튼튼하게 못하고 집을 지었어요. 그런 집이라서 세월이 가면서 자꾸 그 메운 땅이 내려앉아 가지고요 저희 집은 집이 삐딱했어요. 제가 누우면요, 머리맡은 베개 안 베어도 높고요 밑에는 낮고요. 이런 집이었어요. 그래 어느 정도냐? 어른들이나 이해할 겁니다. 등잔불을 이렇게 해서 바람벽에다 걸어놓으면 등잔 갓이 벽에 부딪치질 않아요. 알아들어요? 이거 못 알아들을거야. 그냥 대충 알아두세요. 그 정도로 삐딱한 집이에요. 가끔 걱정이 되요. '이거 집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아버지께 "집이 자꾸 이렇게 되는데 이거 무너지지 않습니까?" 저희 아버지 제게 말씀하시기를 "걱정 마라. 사람 사는 집은 무너지는 법이 없다" 그러시더라구요.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그래요. 이걸 잊지 말아야 되요. 사람이 출입하고 사람이 사는 집은 안 무너져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잘 수리하고 잘 깨끗하게 청소된 집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아요. 그래 엉뚱하게 일곱마귀가 들어가서 자기 집을 만들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옛날 바리새 교인들, 아주 소극적으로 그들은 의를 지켜가려고 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손을 깨끗이 하고, 밤낮 손을 씻고, 깨끗이……. 그런 의를 생각했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그런 말이 있잖아요. 바로 요 며칠 전에 텔레비젼 프로에 나오는데 한국의 개그맨이 예루살렘을 갔어요. 뒤에는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있고 그 거리를 왕래하는데, 점잖은 사람이 하나 붙들고 하는 말이 "저희 집에 잠깐 들어오십시오"하고 초대를 해요. 이 개그맨이 뭣도 모르고 "왜 그러십니까?"하고 따라 들어갔더니 전기 스위치를 가르치면서 "이 전등스위치를 이렇게 내려주세요" 그러더랍니다. "왜요?" 그러니까 "오늘 안식일이라서 내가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당신이 좀 대신 해주십시오." 아니 그게 성경에나 있는 얘기인줄 알았더니 2000년 후 오늘도 있더라니까요 그런 위선자가. 아니 그 안식일 범하는 게 그게 죄라면 내가 범하고 남을 안식일 지키도록 해줘야지 자기 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남보고 죄지으라니 이런 얌체가 어디있습니까 도대체? 그게 바리새 교인이에요. 자기는 깨끗하게. 그래서 옛날 바리새 교인 가운데는 소위 이마에 피가 흐르는 바리새 교인이 있었다고 해요. 이것이 뭐냐하면 '그저 보는 게 문제다. 물건을 보니 가지고 싶고, 여자를 보니까 음욕이 생기고, 뭐 그저 다 보는 게 문제니까 가능한한 눈을 감고 다녀라' 하다가 '딱'하고 받아요. 기둥을 '딱'하고 받고 벽도 받아서 이마에 피가 마르질 않아요. 나을만하면 또 터져요. 그래서 이마에 피가 흘러야 '아, 경건한 사람이다' 그랬다고 그래요. 여기 이마 다 멀쩡한 여러분은 이거 안되지요 이래가지고는. 딴에는 얼마나 깨끗하게 의롭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여기까지 간 거지요. 이걸 알아야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보세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보면 여리고로 가는 길에 불한당 맞은 사람이 누워서 지금 죽음 직전에 있어요.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보고 지나갔다. 그들에게 묻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노라. 내가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누굴 미워한 것도 아니고, 나는 죄가 없노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지 아니한 것은 네가 죄인이다 이말이에요. 너는 죄인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높은 차원에서 죄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폴란드에 그 히틀러 정권, 나치 정권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그때에 그 젊은이들이 레지스탕스를 만들어가지고 저항운동을 했죠.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지하에서 조직적으로 저항운동을 하다가 많은 청년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 레지스탕스, 그런 청년들이 붙들려가지고 지금 트럭에 실려서 사형장으로 나가고 있는데 그 안에 왜 이렇게 막 체포하다 보니까 레지스탕스가 아닌 장사치 하나가 거기에 붙들렸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죄 지은 게 없습니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다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장사만 했을 뿐이지 나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고 자꾸 사정을 합니다. 레지스탕스 청년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요,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오." 여러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죽어 마땅한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죄가 무엇입니까? 미워하지 않으면 죄가 아닙니까?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요. 그래 내가 용서했다고 죄가 아닙니까? 봉사하지 않은 것이 죄요. 오래오래 꾸역꾸역 참았다고 죄가 아닙니까?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요. 그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은 것이 죄요. 여러분, 이거 생각해야 합니다. 텅빈 마음이라는 것은 사탄의 무대가 되는 것이요. 서양사람들의 격언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한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았는데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서 배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가졌던 사람,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이제 주인은 책망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르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악하다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지 않아요? 왜 악하냐?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악한 거죠. 여러분, 아무 일도 안한다는 것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국사람들의 견문기에 나타난 대로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보나? 지난 100년 동안에 얼마나 변화가 왔느냐? 하는 데 대한 것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서 한국 심리학 학회지에 실린 논문이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보는 한국사람, 이렇습니다. "신념과 태도에 대해서는 90%가 변화를 일으켰다만 행동은 30%밖에 없다." 결정적인 것입니다.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많고, 외침도 많아요. 그러나 행동이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외국사람에게 비취어진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은 높은 지성이 있어요. 그러나 의존도가 높아요. 친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후한 인심도 있어요. 그러나 비합리적 사고에 매여있더라는 것입니다. 교육열은 높아요. 그러나 행동이 없어요. 이것이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람들이에요. 아는 것은 많은데 행동이 없어요. 의식은 바꿔진 것 같은데 실천이 없어요. 대개 보면 그렇더만요. 뭐 인권 문제를 말하고 무슨 뭐 경제 문제를 말하고 사회 문제를 말하고, 그렇게 떠드는 사람들 보면 생활은 엉망이에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루이스 쉐릴이라고 하는 분이 The Gift of Power 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해 줍니다. 사람을 두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실존상태와 가능적 상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실존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디 살던지 불안합니다. 그리고 상황적 불안이 있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존적인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가능적 상태라는 것은 이제 만남의 관계가 있어요. 우리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요.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의 길이 열려가고 있더라 하는 것이죠. 이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변화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는 가능적 상태에서만 새로운 역사를 볼 수가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열풍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다이어트 라고 하는 열풍. 북한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살깍기 라고 해요. 살빼기가 아니고 살깍기. 좀 강한 표현이죠? 그런데 요새 화재가 된 것은 남자 탈렌트 박철씨가 무려 25Kg을 뺐다며. 아 그거 위대한 청년이다, 그러구요. 그리고 이영자씨, 개그우먼. 아 6개월 동안에 30Kg을 뺐어요. 요새 연애한답디다. 그러게 됐대요. 30Kg을 뺐어요. 와∼,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거 다 우리 높이 칭찬해야 됩니다.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지방질을 근육질로 바꿔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굶어가지고 빼면 죽어요. 이 지방질을 이 기름덩어리를 근육질로 환원하는데는 변화시키는데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죄송하지만 먹기는 하고 운동은 안했거든요. 그게 기름덩어리로 남는 거예요. 운동을 해서 일을 해서 다 태워버리고 말아야 되는데 이걸 태우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이 두사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공허와 진공과 허탈. 그 다음에는 절망입니다. 빈 집은 위험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소극적으로 그렇게 일을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시골에서는 늘 그런답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은 깨끗하다. 그러나 소가 없으면 아무일도 할 수가 없다." 여러분, 중요한 일을 하려면 비난도 받아요. 욕도 먹어요. 어려움도 당해요. 그래야 밀고나감으로 일이 되는 거지 요리피하고 저리 피하고. 이런 기회주의적인 결국은 어떻게 되냐구요? 자기 자신의 존재적 진공이 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뭐 건강의 비결이라구요? 뭐 별다른 거 있겠습니까? 운동을 해야되고 그리고 일을 해야되고, 일을 열심히 해야되고, 더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것이에요. 보세요. 발을 안쓰면 발이 약해져요. 허리를 안쓰면 허리가 약해져요. 눈을 안쓰면 눈이 침침해져요. 그래 어떤 분은 머리를 안쓰면 머리가 멍청해진대요. 그래서 산 이름을 외운대요. 백두산, 무슨산, 무슨산……. 강을 또 두만강, 압록강……. 하루 종일 강을 외운대요. 여러분, 뇌를 안쓰면 치매가 걸리는 거예요. 뭐든지 사용해야 되요. 건강해서 일하는 것보다 일 함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열심히 기쁜 마음으로 사랑과 충성된 마음으로 일할 것이요. 그것이 삶의 길이요, 존재의 의미를 창출하는 길이에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힘써 일함으로 보람을 찾고 내 존재의 가치가 확충이 됩니다. 존재를 채우라. 말씀과 성령으로 채우라. 그리고 일하면서, 충성되게 일하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룰 때, 아주 충만한, 아주 충만한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이처럼 부르셨습니다만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도 하고 내가 해야할 일을 남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여러모로 기피하는 가운데서 일해야 할 사람이 일하지 아니함으로 마침내 일할 수 없게 되기도 하고 건강할 때 일하지 아니하므로 때로는 건강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주님 용서해 주시옵고 이제는 멍청하게 빈 마음, 빈 집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되지 않게 하시고, 단순한 마음으로 말씀과 성령과 사랑으로 충만충만하게 채워서 열심히 일함으로 강건하고 또 창조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은혜와 축복을 더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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