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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교회)는 승리합니다 /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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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교회)는 승리합니다
계 2: 18-29

  오늘은 요한계시록 2장 18절에서 29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성도(교회)는 승리합니다"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성도라는 말을 바꾸어서 '교회는 승리합니다'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전도하라고 보내셨던 제자들이 방방곡곡에 가서 전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너희들이 이 나라 곳곳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나에 대해서 하는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들었을텐데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그렇게 인기 절정에서 순교당한 세례요한이 아닌가? 엘리야가 아닌가? 선지가들 중에 하나가 아닌가?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라고 저마다 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정확하게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 때 주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라는 말 자체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진리 위에 세운 교회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라고 할 때 '음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음부는 무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 죄의 권세가 절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승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 시대를 지나오면서 큰 환란과 핍박이 있었지만 다 이겨내고 승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환란과 핍박에서 승리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끝이 좋은 성도(교회) (18-19)
  제가 결혼 주례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기록을 잘 안해 두기 때문에 얼마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눈에서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서 주위에서 보이는 가정들을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 결혼생활이 4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처음 시작 할 때 너를 떨어져서는 못살 만큼 사이가 좋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이가 점점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너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둘째로 중매로 결혼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가깝지 않고 서먹하게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둘 사이가 좋아져 마지막에 가서는 너 없이는 못살겠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집니다. 세 번째로는 처음에 서먹하게 시작했는데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끝까지 서먹한 사이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처음에 너 없이 못살겠다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하나가 되어 끝에 가서는 더 좋아지는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 역시 처음도 좋고 나중이 더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도 좋았지만 나중은 더 좋아지는 즉 끝이 좋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한 번은 충성된 일꾼에 대해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어느 부잣집에 종이 있었는데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농사일도 하고, 양떼를 돌보기도 하면서 뙤약볕 아래 온갖 고생을 다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밥상을 차려 놓고 '시장할 테니 어서 먹어라'고 하면 좋을텐데 주인이 저녁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저녁을 준비하라고 시킵니다. 저녁을 준비해서 차려 바쳤더니 '함께 먹자'고 하지 않고 '우리가 먹고 끝난 다음에 너는 먹어라'고 합니다. 주인이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에 "오늘 수고 많이 했다"라고 하자 종이 "주인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는 종으로써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는데 칭찬받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끝이 얼마나 좋습니까? 밖에서도 좋았고, 안에서도 좋았습니다. 처음도 좋았고, 나중은 더 좋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꾼이요, 얼마나 좋은 자세입니까? 이 말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좋아야하고, 일터에 나가서도 좋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도 좋고 나중이 될수록 점점 좋아지는 일꾼은 주님이 칭찬하고 예화로 들 만큼 훌륭한 사람입니다. 훌륭한 믿음입니다. 끝이 좋은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다 이겨낸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에서 19절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는 말씀은 끝이 좋다는 뜻입니다.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심부름으로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업'이라는 말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주님을 위한 사업을 가리킵니다. 즉 주의 사업입니다.
  '인내'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사업을 열심히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만을 해 줍니까? 그렇지 않고 별의 별 험담을 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인내는 '그런 소리는 너 혼자 해라'하면서 끝까지 버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사업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네 사업을 다 알고 있는데 네 나중이 처음 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중이 더 좋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나간 목요일에 박자호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박자호 장로님은 처음 믿음 생활을 광성교회에서 시작을 했고, 광성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안수집사가 되어서 제가 안수를 하고, 장로가 되어 장로 임직식에 안수를 했습니다. 장로로 봉사 잘 하다가 이주간에 세상을 떠났고 목요일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박장로님은 광성교회 밖에 모르는 광성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서 믿음 생활을 절반하고 광성교회에서 믿음 생활 절반을 한 것이 아니고 시작도 광성교회에서 했고 끝도 광성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는 힘들고 굳은 일, 감당키 어려운 모든 일들을 박장로님이 도맡아 다 처리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제3교육관 건물을 매입했을 때 세를 들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야단을 했습니까? 그 때 박장로님이 맡아 처리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좋아합니까? 여러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전혀 모르게 좋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저만 아는 일들도 많습니다. "목사님 정말 가난해서 공부를 하고 싶지만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써 주십시오"하면서 장학금을 가져오곤 하셨습니다. 그밖에 저만 알게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모르는 일들도 많을 것입니다.
  장례식을 마친 다음에 남부 광성교회를 개척해 나가 몇 일 전까지 노회장을 지낸 이강학 목사님이 당회장실에 들어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제가 '너무 안타깝고 아쉽다'고 했습니다. 이강학 목사님이 박장로님의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 이것 한가지는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강학 목사님이 개척해서 나가실 때 땅 한평이 7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700만원입니다. 그 때 "땅 100평을 사 드릴까요? 홀을 얻어 드릴까요?"했더니 홀을 얻어 달라고 했습니다. 저 같으면 땅을 사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100평짜리 홀을 얻어서 출발을 했습니다. 개척하고 일년이 지나니까 교인이 50-60명이 되어서 "이제는 자립해 보십시오"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일년 동안 광성교회에서 생활이나 할 정도의 생활비만 도와주고 일년 후에는 자립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꾸 더 주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이 만하면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해 줄수록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할 줄을 압니다. 어떤 사람은 개척하고 2년이 되어 200명, 300명이 되어도 더 뜯어내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잘 해 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더 잘 안해줘서 불평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더 주고 싶어하실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 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뜯어내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성교회에서 이강학 목사님의 생활비만 보조를 해 줄 당시 목사님의 딸이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오르간에 소질이 많아서 연세대에 가서 오르간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학과 시험만으로는 안되고 레슨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레슨이 한 두푼입니까? 그 당시 땅 한평에 70만원을 하는데 레슨을 받으려면 달마다 20만원이 필요했습니다. 그 레슨비를 어떻게 개척교회 목사가 감당하겠습니까? 부탁이나 청원을 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눈치를 채셨는지 그 때 장로님이 찾아오셔서 그 레슨비를 감당해 주셨습니다. 장로님이 레슨비를 대 주어서 딸이 레슨을 받고 연세대학에서 오르간을 공부해서 졸업했습니다. 그 딸이 몇 달 있다가 시집을 갑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님 그것은 모르셨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 인 줄 아십니까? 장로님은 믿음생활을 참 곱게 시작을 했습니다. "아니요"가 없었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성실했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 이런 것들이 더 많이 드러납니다. 끝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은 성도가 승리하고, 그 성도에게 놀라운 축복과 상급이 있있습니다.

  둘째, 뿌리깊은 성도(교회) (20-24)
  동방 우스 땅에 욥이라는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습니다. 알아주는 부자에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나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엎드려서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만 얼굴을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고 부럽습니까? 그쯤 되면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때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마귀가 나타나서 그 가정을 뒤엎어 놓았습니다. 10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데 집이 무너져 전부 다 죽었습니다. 얼마나 기가막힌 일입니까? 그리고는 종 하나가 달려와서 "내가 양떼를 치고 있는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전부 잿더미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종 하나가 달려오더니 "내가 소떼와 나귀떼를 치고 있었는데 강도들이 몰려와서 전부 다 끌어갔습니다. 겨우 저만 살아서 도망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 재산은 벼락치고 강도가 다 끌어가고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자녀는 다 죽었습니다. 이쯤 되었을지라도 자기 건강한 몸 하나만 남아 있어도 좋을 텐데 문둥병에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남았습니다. 그 때 그 아내가 "여보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받고 지금까지 이 만큼 잘 살았으면 그것만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재산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힘내세요"라고 격려를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는 말이 "아니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따위 하나님을 아직도 믿고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저주해 버리고 당신은 나가 죽어 버리시지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까?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하나님은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가 자살해 죽어 버리라는 말은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까? 나가버리겠다는 것입니까? 아내는 떠났습니다. 저 같으면 달려가서 발길질 한번 했을지도 모르는데 욥은 "여보, 당신은 어쩌면 어리석은 여자 중에 하나같구만"이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욥의 그 말이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맨 손들고 왔다가 엄청난 복을 다 누렸는데 거두어 가신들 왜 내가 원망을 하겠습니까? 죽을 때도 맨손을 들고 죽을텐데요"라고 하면서 돌아서서 찬송을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귀가 두 손을 들고 떠나 가 버립니다. 욥은 승리하고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 10남매를 또 낳았습니다. 욥은 이런 승리와 축복을 누렸지만 그 아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지붕 밑에서 살았고 한 이불 덥고 한 솥의 밥을 먹으며 살아온 부부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욥의 믿음은 뿌리가 깊었고, 아내의 믿음은 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연조만 자랑하지 마십시오.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뿌리깊은 믿음이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에서 24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너희 가운데는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된 여선지자가 나타나서 너희를 자꾸 미혹하고 유혹을 할 때 많은 사람이 넘어 갔다'라고 책망을 합니다. 이세벨은 옛날 아합 왕의 아내로 시돈왕 엣바알의 딸이었습니다. 이스라엘로 결혼해 올 때 바알신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 신앙을 내 몰아 버리고 바알 종교를 심어 놓고 전파한 여자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악한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할 짓만 하게 했던 사람이 곧 이세벨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이세벨은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같습니다. 그리고 하는 짓의 결과는 같아도 옛날의 그 이세벨이 살아 온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하는 짓이 옛 이세벨과 똑 같은 여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에 나타난 이세벨은 흔히 말하는 영지주의 즉 그노시스입니다. 옛 이세벨은 바알 종교를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우상을 섬길 때 그 사람들은 음식을 차려 놓고 우상에게 절을 합니다. 절이 끝나면 그 제물을 우상 앞에서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으로 제사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의 성찬식과 같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알 신은 아들 딸을 낳게 해 주고, 농사를 지을 때 열매를 많이 맺게하는 생산의 신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그 신전에는 거룩한 창녀들이 있어서 음식을 먹은 후에는 바로 창녀들과 함께 동침하므로 제사가 끝이 납니다. 우매하게 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그 당시 현대판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서 결과적으로 그런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를 이세벨이라고 했는데 영지주의 자들은 영혼은 선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신은 악하다고 합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구원을 얻는 방법은 신령한 지혜로 구원을 얻는데 육신은 악하기 까닭에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솔깃한 이야기입니까? 구원얻는 방법은 영적지에 있으니 육신으로 죄는 아무리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참 좋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유혹에 대부분의 다수가 넘어갑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회개하라 회개치 않는 날 침상에 던져 버리리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중한 병에 들어서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큰 환란, 즉 온 가정을 뒤엎어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네 집의 자녀들을 다 죽어 벼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할 짓을 하면 그 행위대로 다 갚아 주겠다고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24절을 보면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의 교훈이 옳지 않다 하여 두아디라 교회에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믿음을 그대로 붙잡고 마귀의 깊은 것 즉 이세벨의 교훈은 내가 알바가 아니라 하며 이세벨의 교훈에 물들지 아니한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지울 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남은 자들은 주님을 위한 사업 곧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잘 하고 있는데 내가 더 이상 너희들에게 더 짐을 지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너무 잘 하고 있으니 이래라 저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 다수의 사람이 이세벨의 교훈에 미혹이 되었지만 남아 있는 소수는 뿌리깊은 믿음이 있습니다. 온갖 유혹과 압력과 좋지 못한 분위기, 심지어 정권에서부터 오는 핍박을 다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어야만 어떤 환란과 불행에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굳게 잡은 성도(교회) (25-29)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29절을 보면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올 때 즉 주님이 재림할 때 까지 너희가 잡은 것을 더 굳게 잡으라고 하였는데 굳게 잡은 사람은 꼭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 우리나라의 절반인 조그만한 나라의 권세 잡은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야단입니까? 또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야단입니까? 하찮은 조그만한 나라의 권세일 뿐입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새벽 별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지,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은 예수님 다음입니다.
  저는 외국에 나가더라도 절대 자녀들에게 줄 선물을 사 오지 않기 때문에 제가 외국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자녀들이 가방을 열어 보지 않습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귀한 선물입니까? 제가 돌아오지 않고 가방에 선물만 사서 보냈다면 그것이 선물입니까? 가장 귀한 선물은 아내에게는 남편, 자녀에게는 아버지인 제 자신인 것입니다.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굳게 잡는 성도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굳게 잡는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하고 있는 주의 일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굳게 잡고 끝까지 버티어 그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이기고 이런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끝이 좋은 성도가 승리합니다. 처음도 좋지만 끝이 좋은 성도가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뿌리 깊은 성도가 승리합니다. 뿌리 깊은 성도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어떤 환란이 닥쳐와도 버티어 서고 크게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고 진액이 풍성하여 잎이 푸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굳게 잡는 성도가 승리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잡고 있는 믿음, 하고 있는 주님의 일, 근본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굳게 잡아야 승리합니다. 승리하고 축복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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