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르호봇의 축복 / 창 26:12-22

  • 잡초 잡초
  • 2051
  • 0

첨부 1



제목 : 르호봇의 축복
김주한  [성경본문] 창26:12-2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우리는 지난 몇 달 전에 아브라함의 삶과 그의 행적을 통해 아브라함이 어떻케 믿음의 조상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의 노력과 공적으로 믿음의 자리에 뛰어 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이끄시고 주장하셔서 그를 불신앙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자리로 앉히셨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근거를 분명히하고 계십니다 나는 엽집 아무개가 잠잘 때 꿈속에 나타났다고하는 염라대왕이 아니라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을 이끄시고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게하고 지금도 영적 이스라엘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조상중에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 야곱에관한 말씀은 창세기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많고 이미 익히 들으셔서 많이 아시겠지만 이삭에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습니다 기껏해야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믿음으로 순종한 아들이다라는 정도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자는 이삭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조상에 이름에 오르게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 역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처럼 그가 연약한 믿음에 있을 때에도 그를 이끄시고 주장하셔서 결국 순종하는 자리와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과정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삭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할 사실은 그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 약속의 성취이고 아브라함으로서는 평생 기도해온 기도의 응답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이삭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림자요 예표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보내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약속대로 온 믿음의 아들로서 장차 오실 메세야를 예표했고 이삭이 자기의 죽음을 알고도 말씀에 순종하여 제단에 올라가는 모습은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을 나타내고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가 이러한 삶을 살면서 "아! 지금 나의 삶이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연기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몇 천년 시간이 흐른 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서야 비로서 보여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생각하기를 '그냥 한평생 사는 거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그냥 살아지는 인생은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무의미하게 그냥 산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모두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냥 태어난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목표하고 목적하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여러분을 이 땅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제가 이렇케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제게 물어오십니다 지금 나의 삶 속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삭처럼 그리스도를 예표할 만한 것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도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목구멍에 거미줄 치면 안되기 때문에 자식들 교육시키 위해서 그리고 노후도 대비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생활전선에 매달려사는 시간이 하루중 전부인데 무슨 저의 삶속에서 성인들의 삶속에서나 있는 어떤 비장함이나 희생이나 헌신이있습니까? 그저 주일마다 주일성수하고 헌금생활하는 것이 전부일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순교자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순교자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기혼자 고결한 순교자의 신앙을 지키고 사는 것처럼 위선속에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될 뿐 입니다

우리는 물론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러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렀을때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획일적으로 집합시켜놓고 여러분의 목숨과 전 재산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단들이 허탄한 종말론가지고 사람을 혹세무민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수있는 순교의 반열에 선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누리게되는 축복은 아니라는 것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의 모양대로 각기 맡은 자리에서 충성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목적하시는 바는 여러분들 모두가 가슴에 비수를 가지고 또는 도시락폭탄을 들고 다녔던 이봉창이나 윤봉길의사처럼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불속이라도 뛰어들겠나이다' 라는 비장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렇케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보다는 항상 나의 유익만을 먼저 생각하는 이 정도 밖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라는 진실한 고백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상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죄를 짓게되는 대분의 원인은 할 수 있는 것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도무지 믿는 사람으로서 표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표를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표를 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까요?'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별 볼일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특기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처한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혹은 남이 보기에 실패한 인생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주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면 이제 얼마있으면 하나님은 상황을 역전시키실 것입니다 우리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협력하여 우리 후대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 역시 당시에는 보잘것없는 이주민들 중에 끼인 한 집안의 족장에 불과했습니다 그 역시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하는데에 전력해야하는 생활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인 것은 스스로도 알고있었겠지만 당장 그의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일에 눈코 뜰새 없는 한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생활터전은 일가친척하나없는 타지였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의 아버지때처럼 당장 내일 먹어야할 것을 오늘 마련해야하는 극심한 가뭄에 처하게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도 약속의 아들이고 뭐고 당장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이 급선무 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굉장히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땅인 그랄에서 그는 부전자전이라고 그의 아버지가 했던 실수를 똑같이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실수라기보다는 '저와 여러분도 이와 똑같이 위기 앞에서 연약하기 짝이없는 인간의 모습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같은 사건을 반복하여 격게 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부인 리브가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삭으로서는 왜 이렇케 꼬이는 일만 자꾸 일어나는지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의 단점은 또한 창25장에서도 기록되어있듯이 자식을 편애함으로 자녀 교육에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가는 곳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서 여호와의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이죠 25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토록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삭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복 주셔서 오늘 본문12절에서처럼 그 땅에서 즉 타지에서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큰 부자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해외에서 많은 돈을 벌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사람이 들어와 가지고는 부자가 되자 본토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질투심이 극에 달해 급기야는 15절에서 밝히고있는 것처럼 갑자기 이삭의 우물들을 메우기 시작합니다 고대 근동아시아에서는 우물의 개수에 따라 그의 부를 판별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은 땅문서라는 것은 없고 우물문서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물이 있어야 그 주변에 초지를 형성해서 가축을 키울 수 있고  밭도 경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 없는 땅이라면 사막이나 다름없는데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멀쩡한 남의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우는 일은 당시로서는 전쟁하자는 선전포고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활기반을 다 잃어버리고 할수없이 이삭은 그 땅에서 물러나서 그랄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다시금 장막을 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합니다 왜 언젠가 미국에서 있었던 LA흑인 폭동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질투의 대상이었던 한인들에게 기회를 잡아서 한인들의 상가를 불태우고 약탈했잖습니까? 모든 시름을 떨치고 이번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가게를 냈습니다 거기가 어딘고하면 17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찾아가서 거기서 다시금 생활기반을 얻을려고 했는데 아! 그랄 사람들이 여기 골짜기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이삭의 목자들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다툼이라는 우물이름 '에섹'을 지어주고는 그 우물을 양보하고 또다시 다른 우물을 찾습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고 또다시 다른 우물을 팠는데 아! 여기까지 쫒아와서는 또 시비를 겁니다 참 끈질기기도 합니다 참 못됐습니다 이러한 그랄 사람들의 행위로 보아 이삭에 대한 굉장한 미움이 서려있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복 받고 사는 것 괜히 질투하고 시비하는 사탄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인하여 세상이 너희를 욕할 때 이상히 생각지 말라고 하신 것 입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이하는 주특기가 시기하는 일이니까요 이렇케 3번씩이나 쫒아다니면서 시비를 걸면 보통 사람같으면 벌써 너죽고 나죽자하고 한번 붙었을 것입니다 '그래! 나도 모 아니면 도 다' 하고 웃통 벗어제끼고 한번 붙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싸움은 무슨 이론 논쟁이나 관념의 대립이 아닙니다 당장 생활기반을 놓고 벌이는 싸움입니다 밥줄이 왔다갔다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생활속에서 벌이는 싸움과 매한가지입니다 물론 이삭이 아량이 있고, 양보심이 특출나서 이렇케 가는 곳마다 원수에게서 생활기반을 뺃기게되는 상황속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나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삭 그는 성경 다른 부분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은 약속의 아들이었지만 자신보다 13살 위인 배다른 형인 이스마엘의 눈치를 보면서 어린시절을 자라왔습니다 따라서 그는 매우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믿음도 있었지만 그의 부족한 기질도 어느정도 작용하여서 그는 이 우물마저 대적하는 원수라는 뜻의 '싯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곳이 바로 '르호봇'이라는 곳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경이넓다'. '분쟁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삭의 원수들인 그랄 사람들은 이삭의 온유함에 감동이 됐었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생활권 완전히 밖으로 나가서 그런지 이제 더 이상은 쫒아와서 시비를 걸거나 집적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 넓은 땅 르호봇에서 브엘세바에 이르는 지역에서 오래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게되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삭은 르호봇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갔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르호봇을 안겨 주신 것입니다 르호봇의 축복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 앞에 다툼인 '에섹'과 원수 사탄이 대적해오는 '싯나'를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축복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보다 큰 축복의 자리로 나가게 하십니다 그 축복의 땅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에섹과 같은 가시밭길을 지나야하고 험난한 싯나와 같은 산을 넘어야했다는 것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계획 도시가 들어서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별 볼일 없는 땅인 것을 알게됩니다 재개발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지저분한 길과 들쭉날쭉 집들을 모두 부시고 평탄케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물론 큰 아픔이 따를 수 있습니다 눈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기서 펑하고 터지고 저기서 펑하고 터지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재개발하고자하시는 것입니다 보다 크고 멋진 것을 주고자 하심 입니다 르호봇으로 가게하기 위해 '에섹'을 뭏어버리고 '싯나'를 갈아엎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삭의 믿음뿐만 아니라 또한 이삭의 우유부단한 부족한 점까지도 이용하셔서 그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하나님만을 향한 담대한 믿음이 있어서 '에섹'과 '싯나' 우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면서 전쟁을 일으켰으면 결국은 르호봇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믿음은 물론 겁 많고 소심한점까지 이용하셔서 그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 입니다 우리가 지금 비록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항상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자녀가 잘났기 때문에서만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는 진정한 부모가 아닙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한 거짓 없는 진실함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이 좀 연약하고 부족한점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십니다 이삭에게 내려진 르호봇의 축복이 성도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