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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 /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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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
행 11:19-30 

사도행전은 성령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역사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노정을 차례차례 설명하는 것을 우리들은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내게까지 전해진 복음은 또 나를 통하여 전해지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신 것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결과적으로 보면 이 명령에 순종한 것이 되었지만, 과정에서 보면 처음에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교회의 부흥에 만족하고 그 지경을 넘어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스데반 순교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큰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제 다 끝난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복음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핍박으로 인하여 온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모세를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주 힘든 일로 고역을 하게 하지만, 핍박을 받을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번성했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결코 순탄한 환경이나 고난이 없는 가운데 성장하거나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순탄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나태하고 게으르고 교만하기 쉽습니다. 고통과 역경 가운데 오히려 복음이 확산되고 승리하는 역설적인 진리를 성경과 우리 경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끄기 위해서 덮쳤을 때에 그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씨가 바람에 날려서 사방을 태우고 더 나아가서 온 산야를 태울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복음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사마리아로 가게 되는 것은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흩어질 때에 그 사람들이 저 가고 싶은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저들은 도망을 합니다. 정처 없이 도망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 지키기 위하여, 예수 바로 믿고 살기 위하여 저들은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고 재산을 다 버리고 이방으로 정처 없이 나섭니다.

이렇게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의 선교 전략에서도 아닙니다.
누구의 선교 열심히도 아닙니다. 누구의 신학도 누구의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지식과 정열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단체의 선교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략, 그것은 곧 핍박이라고 하는 전략입니다. 환난과 핍박,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부정해버리고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전략,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선교는 이루어졌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미국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영국 국교회를 정화시키고자 했던 개혁자들은, 1563년 전국교회에 청교도 운동을 실시하려 했으나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1567년에 급진적인 청교도의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 투옥 당하였으며, 1593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회의를 통하여 '반청교도령'을 가결시켰습니다. 이로써 영국 청교도들은 국외로 망명 혹은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1620년 순례자들은 메이풀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 21일 미대륙에 상륙한 후 아메리카에 정착하였습니다.
청교도 운동의 주장의 근본적인 기초는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직임명, 교회제도, 설교와 성례전, 교회정치 등 모든 문제에 대하여 청교도들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초대교회의 원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생활은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이기를 추구함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사회제도와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하여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이념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영국 땅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다가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떠돌아다니다가 지금 미 대륙에 정착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신앙의 국가가 되고, 경제나 문화나 군사력이나 모든 면에서 세계 초강대국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세계 선교를 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청교도, 그들에게 찾아왔던 고난이 결코 그들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들이 신앙 자유하고, 강하고 부요한 미국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미국이 당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큰 재앙, 테러 대참사는 어려움은 그들이 부요해지므로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이 항상 잊지 말아야할 것은 저희 선조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과 하나님께서 저들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하신 것인 것과 같이, 미국민들은 저희들 선조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배를 타고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왔을 때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들이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군사력으로 큰 소리 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선교적인 의미를 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어떠합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일정시대와 6.25전쟁과 같은 큰 어려움이 우리들민족에게 큰 고통이요, 엄청난 상처를 준 것 같아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 고난과 시련이 오늘의 이런 안정과 부흥을 가져온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았지만, 장성한 믿음은 아닙니다. 순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정시대의 학정과 신사참배라는 사건을 통해서 진정 어떤 고난과 핍박이 일어나도 그 신앙을 지키는 깨끗한 교회와 성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다시 6,25가 터졌습니다.
교회가 이북에 많이 세워졌고, 평양은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국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습니다.  6.25 사변을 통해서 평양과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이 남한 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 어려운 피난살이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이북사람들은 생활력도 강하고 사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신앙이 뜨거웠습니다. 그 때문에 이북 출신 목회자들이 세운 교회가 아주 빨리 부흥을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하게 된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늘 미국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조들을 기뻐하셔서 주신 복을 가지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복을 선교적인 의미로 주신 것으로 알고 사용해야하는데, 부를 가지고 자랑하고 교만했던 것입니다.

오늘 미국이 당한 이 큰 재앙은 우리들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피난해온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여기 왔느냐-여기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왜 내가 이 고생을 하느냐, 왜 내 재산을 다 잃어버렸느냐, 왜 직업도 떠나야 했더냐-흩어질 때에는 강압적으로 할 수 없이 흩어진 것이지만, 흩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한 것입니다.
역설적입니다. 흩어지는 것은 피동적이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발적이었습니다. 억지로 된 현실 속에서 이제 선교적 자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지금 어떤 현실 속에 있는지 모르나 알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적 의미를 찾으면서 여기서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안디옥 까지 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환난을 당했고, 그래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갔다-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니까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다고 전하는 사도 베드로의 말을 듣습니다. 그들도 고정관념을 깨고, 드디어 선교를 인정하게 됩니다.

바나바는 누구입니까?
바나바는 평신도입니다.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선교를 시작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평신도를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귀중한 깨달음입니다. 또 예루살렘 자기들 교회의 아주 귀한 일군을 이방 선교사로 보낸 것도 오늘 선교사적인 면에서 아주 훌륭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고정관념을 깹시다.
선교는 누가 합니까? 어느 때 해야합니까?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가 출발하면서부터 했습니다. 실은 그들이 선교를 하고 싶어서 한 것보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어쨌든지 선교를 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선교하기 위해서 우리교회가 부흥되어야합니다. 선교하면 또한 교회가 부흥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요,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도 아닙니다. 복음 전도는 누가 합니까? 선교는 누가 합니까? 사도도 해야합니다. 집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라도 성령께서 부르시고 세우고 가라면 가야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교회 만을 생각했다면 누가 선교사를 파송하겠습니까?
우리 교단의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우리 교회가 선교하는 것을 헛일한다고 비난을 했답니다. 돈을 다 갖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좀 흥분을 했습니다만, 자기 교회만을 생각한다면 한 푼도 선교하는데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할 수 있는 경제와 여건을 주셔도 선교하지 않기 때문에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교단도 조각난 것으로 압니다. 지금도 우리 교단의 큰 교회가 진통을 겪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자기 교회만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도 선교에 힘을 써야합니다. 전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합니다. 이를 하는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해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흩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이지순 간사, 선교사로 파송될 것입니다만 이를 우리 교회의 복으로 영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큰 교회도 아니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깨달음과 적은 힘이나마 도울 수 있게 하신 것도 감사해야합니다. 

선교는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두가 다 해야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아무나 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또 하나님깨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재능적으로 하나님은 준비시키시고, 준비된 자를 쓰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파송된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의 인격을 한번 살펴봅시다.
바나바를 성경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24절에 보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했습니다.

23절을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이 이르렀을 때에 대단히 은혜로운 말씀을 합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역시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몇 사람이 믿는가, 어떤 일이 생겼는가, 과거가 어떤 사람들인가 따위는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보고 기뻐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계실 때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에까지 전해진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탕자비유의 큰 아들은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됩시다. 내 마음에 내 생각과는 다르게 보일지라도 어떤 교회나 기관에서나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기뻐해야 합니다. 환영해야합니다. 이런 착한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가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보지 않았어요.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구원하셔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게 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이방사람도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문화적인 얘기, 인간적인 편견 같은 것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사람도 구원하시는구나,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구나, 여기 안디옥 사람 들까지도 구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 나타나고 있구나-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할 뿐 다른 말이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섬기세요. 굳게 붙어서 주님과 함께 하십시다.-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지도자의 인격을 세 가지로 말한다면 첫째가 영적인 리더쉽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인격적인 리더쉽입니다. 세 번째가 기능적인 리더쉽이 있어야합니다.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바나바는 성품이나 인격이 초대교회를 대표할만한 분입니다. 
바울과 비교할 때에도 신앙적인 리더쉽은 바울이 낫다고 하겠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바나바가 더 훌륭하지 않나 평가됩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을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해서 모두가 은혜 충만할 때에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구제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마음에만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사람에게 특별히 나타나는 것은 사도 바울의 옹호자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대로 바울이 아직도 이방인의 큰 사도로 역사하기 이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갔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전도하고자 했지마는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보고 '이 사람이 한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인데 지금은 또 무슨 음모를 꾸미려고 하는 것인가' 싶어 아무도 무서워서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모두가 피하고 있을 때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인격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바나바가 나타났고,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해서 일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먼저 바울의 사람됨과 그리스도됨을 알고,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전도하고 옹호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휼륭 합니까?

바나바는 이렇듯 중요한 사람이요. 덕망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의덕을 다시 분석해 말씀드리지요. 그는 우선 남의 장점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장점을 못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은 남의 장점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할 것 없이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약점도 있고 장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덕 있는 사람은 그중에서 장점을 봅니다.

이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하다가 당시 사람들이 경계하던 바울을 찾으러 다소까지 가서 안디옥 교회의 부목사로 초청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이방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다가 나중에는 바울을 도우면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원목사가 부목사로 와 있던 사람아래서 다시 부목으로 일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겸손하며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까?
이러한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낮게 여기면 그 교회는 결코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팀사역을 했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4절 보면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충성되고 착한 사람 바나바가 좋은 일군 바울 한 사람을 데려 왔더니 이렇게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면, 좋은 일군이 교회 성장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 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교회에 좋은 일군이 많으면 많을 수록 주님께로 돌아오는 무리가 많아지는 것이지만 나쁜 일군이 많으면 많을 수록 주님을 떠나는 무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할지언정 나 한사람 때문에 있던 교인들도 떠나게 하는 일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 유년주일학교가 부흥되어야합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나 지금 조금은 침체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수가 더하더라는 말씀이 자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숫자를 보십니다. 건강하고 바로된 교회는 영적으로 내적으로 성장도 있지만 반드시 숫자적으로 부흥합니다.

주일학교 요즘 수가 내려가는데, 어떻습니까? 이전에 숫자가 많을 때와 지금과 여러분들의 반의 학생과 여러분 자신이 이전보다 질적으로 영적으로 내적으로 낫다고 생각됩니까? 감당못할 만큼 많은 수가 왔을 때에 오히려 여러분들이 깨어있고, 학생들도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영적이고, 내적인 것은 보이지 않으니까 속일 수도 있지만 숫자로 나타나는 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숫자가 다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측정해 주는 바로미터입니다.

믿음 안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주의 일에 충성하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일학교가 부흥하는 것이 바로 교회 부흥임을 믿습니까?
요즘 주일학교가 조금 시들하니까 장년반 등록도 많이 없습니다. 주일학교 부흥이 바로 교회 부흥이요, 교회 부흥이 하나님 나라 부흥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부흥은 바로 자신의 부흥이 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좋은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주일학교에 나서지 않는 우리교회 집사님들, 권찰님들, 왜 성령의 이 역사를 보시면서도 자기라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시고 충성하셔야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다 사역자가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일은 아무리 해도 다 헛된 것입니다. 세상일도 주님의 일로 하셔야합니다만 더욱 더 직접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뛰어들어야합니다. 언제 주님 만날지 모릅니다.
좋은 일군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사역했을 때에 안디옥교회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도 얻습니다.
주님의 일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은 다 주일학교에 봉사하셔야합니다. 또 집사님들, 권찰님들도, 우리 청년들도 주일학교 섬겨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에 주일학교 교사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데도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서 섬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로 나갈 바울도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에 힘을 써야합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나바가 그를 안디옥에 청하기까지는 평범한 전도자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바울이 그렇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바울을 세운 일이 더 귀한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되게 되는 데는 바나바의 추천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역시 바나바는 큰 인물입니다. 자기가 휼륭한 일을 한 것도  휼륭하지만 다른 사람을 휼륭하게 일하게 한 것은 더욱 휼륭한 일입니다.

나 혼자서 하는 것을 더하기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함께 하는 것은 곱하기인 것입니다. 얼마나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인지 알수 없어요. 바나바는 이래서 위대합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를 이렇게 내세워놓았다는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일을 한 것이 됩니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까?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아무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다소에 그냥 묻혀 살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 같이는 못해도 바나바 같이라도 되어서 여러분들을 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우기를 원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울 같이 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목회자가 되엇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같이하자고 했을 때에 따라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안디옥에서 선교사로 파송되는 중대한 결정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사용되시렵니까?
선교사가 되시려고 합니까?
평신도 사역자라도 좋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만일에 훌륭한 선교사, 전임 사역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교회를 정말 잘 섬겨서 자신으로 인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결과를 봐야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전임 사역자로 쓰실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지를 알고, 귀하게 여기고, 교회의 사역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얼마나 잘했으면, 큰 무리가 더 했겠습니까?
여러분 큰 교회 되는 것도 인간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반드시 건강한 교회가 되면 착하고 좋은 일군들이 세워지면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일년을 목회 했는데, 양적으로 성장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게됩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으면 저들이 과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며 세상이 칭송을 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들을 보고 부르는 칭호입니다. 
예수쟁이들, 예수 믿는 것들이라면 벌써 실패한 것인지 모릅니다. 과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별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누가 세웠습니까?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 또 충성을 다한 바울로 인하여 세워졌습니다.
이 안디옥교회가 너무나 귀한 세계 선교에 이바지 했다는 것입니다. 신일교회가 이런 좋은 교회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좋은 일군 되셔서 성도를 섬기고 봉사하여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셔서 나도 복 받고, 우리 가정도 복 받고, 교회도 복 받고, 우리 자자손손, 우리 후대까지 복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나 개인의 부흥이 교회 부흥으로 이어져야하고, 교회 부흥이 곧 나 자신의 부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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