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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유 공부 / 마 2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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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공부
마 21: 33-43

  오늘은 마태복음 21장 33에서 4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비유 공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비유'라고 하는 말은 '파라볼레'라는 헬라말을 우리말로 번역한 말입니다. '파라'는 '곁으로' 혹은 '옆으로'라는 뜻이요, '볼레'는 '던지다'라는 뜻으로 합성어입니다. 어떤 깊은 진리나 사상을 알 수가 없을 때 비슷한 것을 그 옆에 던져 놓는다는 것입니다. 던져진 그 자체는 쉽기 까닭에 그것을 보고 본래 이 진리와 사상의 깊은 면을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이렇게 하여 진리를 알기 쉽게 해주는 것이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비유 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4장 34절을 보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비유로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 많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을 불러서 비유의 말씀을 해석해 주시더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곳에 돈 많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포도원을 만들고 온갖 것을 다 갖추고 농부들에게 세를 제때에 바치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세를 놓았으나 종들을 보내면 심히 때리고 죽이곤 하는지라 마지막에는 외아들까지 보냈지만 외아들마저 죽이고 포도원을 가로챘습니다. 주인이 와서 그 포도원을 빼앗아 버리고 농부들을 진멸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이 비유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비유 속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랑의 비유 (33-39)

  본문으로 돌아가서 33절에서 39절을 보면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비유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근본적 사랑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거기에 세들어 사는 여러 농부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을 비롯해서 오늘날의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포도원을 잘 가꾸어 만들어 놓고는 산울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즙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이렇게 온갖 것을 다 갖춘 다음에 농부들이 맨 손 쥐고 들어왔어도 얼마든지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도록 근본적인 것을 전부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농부들은 농사를 지어 제때에 세금만 바치면 잘 살게 되어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그만큼 근본적인 시설을 전부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올 때 맨 손 쥐고 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의 삶에 필요한 온갖 것들을 이미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가면 얼마든지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농부에 대한 주인의 사랑은 근본적인 사랑입니다. 즉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계속적인 사랑입니다. 가을철이 되어 수확할 때가 되면 약속한 세를 바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주인이 종을 보냈습니다. 그 약속한 세를 받아오라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그 많은 수확을 거두어 놓고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돈을 보니 흑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을 심히 때리고 죽지 않을 정도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종이 겨우 도망을 왔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주인이 가서 당장 빼앗고 진멸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주인은 참고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종을 죽이므로 살아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쯤 되면 아무리 참았던 주인도 분명히 가서 빼앗고 진멸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종을 계속 보냈습니다. 그 까닭은 이제라도 농부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이 포도원에서 잘 벌어 잘 먹고 잘 살아 주면 좋겠다는 농부에 대한 주인의 사랑입니다. 나중에는 더 이상 보낼 종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사랑, 계속 적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두 번은 사랑하기 쉬워도 계속 배신을 당할 때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주인은 끝까지 계속적으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괘씸하다 하시고 끝내셨다면 우리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때 마다 우리가 회개하고 잘 되기를 바래서 계속적으로 사랑해주십니다.

  셋째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제는 종들을 다 보내셨기에 더 이상 보낼 사람이 없었고 남았다면 오직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 남은 사람이 바로 외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외아들을 죽여 버리자 그러면 주인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느냐 결국 포도원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느냐'하여 외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농부가 끝까지 회개하고 잘되기를 바라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희생시키는 주인의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곧 나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이상으로 희생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을 보면 분명히 희생적 사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고 구원을 얻고 영생하고 잘 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계십니까?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지 않았습니까? 성문밖에 던져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위해서 온갖 희생을 다하시며 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과거에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 사랑에 감사, 감복하여 믿음 생활도 하고, 충성도 하고 봉사도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충성의 비유 (35-36)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절에서 36절을 보면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 비유 가운데는 종들의 충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주인과 농부 사이에는 세를 바치기로 철석같이 약속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농사를 잘 지었으니 의당 세를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시켜 세를 받아 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죽지 않을 정도로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 때 보냄 받은 종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도 저렇게 맞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인이 가라고 하기에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농부들이 죽여 버리고 결국은 살아서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주인이 그쯤에서 끝내면 좋은데 또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갔던 종이 거의 죽게 되어 돌아오고, 두 번째 종은 죽고 돌아오지 못했는데 자기는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종이 가는 대로 악한 농부들이 때려죽이곤 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일 때 처음으로 죽이는 것이 어렵지 그 다음 두 번째는 좀 쉽고 세 번째는 아주 쉽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종들을 보내는 대로 전부 때려 죽였습니다. 종들은 죽을 줄 알고 간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데는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충성을 바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목숨을 거는 충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나를 위해 희생시켰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희생을 못하겠다라고 한다면 뭔가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종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둘째로 무조건 충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가서 너희 임무를 잘 감당해서 세를 받아 오면 얼마를 뚝 떼어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가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종의 신세에서 해방을 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습니까? 전혀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종들은 무조건 충성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신앙, 무조건 충성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등장하는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요, 얼마나 믿음 생활을 잘하는지 하나님께서 천사들 앞에, 구원 얻은 성도들 앞에서 칭찬을 하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 때 마귀라는 놈이 나타나서 "하나님 그게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뭔데?" "욥이 그렇게 잘 믿는 것은 다 조건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냐?" "제가 욥의 집에 가보니 하나님의 축복이 마냥 땅에 널려 있었습니다. 제가 확 불어 버리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산울로 둘러 지키시기에 그만 얼씬을 못했습니다. 산울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서 한번 불어 버리는 경우 욥도 별 재간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해 죽을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그 조건을 한번 제거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산울을 거두시니 마귀가 들어가서 불어버렸습니다. 벼락이 내려치고 도둑들이 달려들어 뺏어갑니다. 거지가 되었습니다. 10남매가 하루아침에 맏형의 집에서 생일 잔치를 먹다가 집이 무너져서 전부 죽었습니다. 하나 남은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나가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귀의 대변인 노릇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욥은 마지막에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잃을 것은 전부 잃어 버렸습니다. 마귀가 말하던 조건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욥은 더 열심히 찬송을 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더 잘 믿었습니다. 그래서 갑절을 복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욥의 믿음은 까닭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들도 전혀 까닭이 없는 충성을 하였습니다. "축복해 주면 충성하겠습니다. 충성하였으니 복을 내 놓으십시오"라는 조건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것은 나의 할 일이요,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충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직 주인께만 충성했습니다. 주인의 보냄을 받은 종들은 살길이 하나가 있습니다. 농부들과 더불어 타협하는 것입니다. 세를 얼마 깎아 줄테니 나머지 내 놓으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당신들 편이요 하면서 그네들 편에 붙으면 사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종들은 전혀 타협을 하지 않고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일하였습니다. 주인에게 손해 되는 일은 손톱 끝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인만 알고 주인께만 충성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상남도 울산 두동면에 치술렁이라고 하는 고개에 망부석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거진 숲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눌지 왕 때 복호라고 하는 왕의 동생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왕이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밥을 먹어도 눈물이요, 때로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박제상이라고 하는 충신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일본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제상이 알게 가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르게 잠입을 해서 복호가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가서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복호가 있던 자리에서 복호 행세를 하면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복호를 빼돌려 바닷가에 배를 준비시켜 놓았다가 현해탄을 건너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복호는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떤 날밤에 되어진 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가만히 두겠습니까? 박제상을 붙들어다 놓고 보니 너무 인물이 걸출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만 돌이키면 훌륭한 인재가 되겠다'하여 "우리 일본을 위해서 충성하는 신하가 되면 온갖 것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제상이 "나는 신라의 개는 될망정 일본의 녹을 먹는 충신은 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박제상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대꼬챙이를 깎아서 그것을 널빤지에 수없이 박고 그 위를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제라도 마음을 돌이키라는 말에 "나는 신라의 개는 될망정 너희들의 녹을 먹는 신하는 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신하가 신라의 개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나중에는 인두를 시뻘겋게 달구어서 온갖 고문을 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돌이키라고 묻자 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신라의 개는 될망정 너희들의 녹을 먹는 신하는 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박제상은 마지막에 죽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눌지 왕의 동생을 위해서 일본에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박제상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동해 바다 일본이 바라보이는 치술렁 고개에 올라가 울며 기다리다 나중에는 기가 진하여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그곳에 망부석을 세웠습니다. 그 망부석을 얼마 전에 찾아냈습니다. 그 부인의 절개도 훌륭하지만 박제상의 충성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 날에 신하가 왕에게 그런 충성을 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종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일편 단심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셋째, 타락의 비유 (35-43)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절에서 43절을 보면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농부들의 타락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농부들의 타락은 배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처음에 농부들이 얼마나 착했습니까? 주인이 농부들과 약속하기를 너희가 맨 손들고 들어와서 얼마든지 농사지어 먹고 잘 살고 단지 약속한 세만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수확을 많이 거두고 때가 되매 세를 바쳤습니까? 철석같이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은 인격 파탄자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말을 달리하면 배신자라는 말입니다. 농부들은 주인에게 용서 못할 배신을 했습니다. 누구 덕분에 그만큼 잘 됐는데 이제 와서 주인에게 배신을 합니까? 타락한 자의 표본입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배신한 일이 없으십니까? 사람에게도 배신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 배신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배신은 타락의 증거일 뿐입니다.

  둘째로 농부들의 타락은 작당으로 나타났습니다. 타락은 작당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농부가 한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여러 사람의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안 빠지고 어쩌면 그렇게 똘똘 뭉쳐 패거리를 짓습니까? 그리고 좋은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작당을 하여 주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얼마나 때리고 죽이고 행패를 부렸습니까? 이것이 타락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교회에 혼란을 일으키거나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거나 하나님이 보낸 종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그러면 바로 타락한 증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배신으로 타락을 보여 주었고 작당으로 배신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셋째로 농부들의 타락은 돈독(횡령)으로 나타났습니다. 돈의 독이 올라서 '네 것도 내 것이요, 내 것도 내 것이요'라는 식의 횡령으로 타락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기지 않았습니까? 회계를 맡길 때 돈궤를 맡기셨습니다. 돈궤라는 것은 돈 박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돈지갑을 맡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저는 도둑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슬금슬금 빼내어 횡령하더라는 것입니다. 돈독이 올랐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타락할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횡령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돈을 떼어먹은 일이 없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은 일은 없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에게 세는 분명히 주인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떼어먹고 바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보내자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은 내 것이라고 하여 통째로 먹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타락을 해도 이렇게 타락할 수 있습니까? 농부들의 타락한 모습을 우리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농부들이 예루살렘에만 있습니까? 오늘날 어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농부들을 거울로 삼아 타락의 모습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고 잘 살고 잘 믿기를 주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에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농부들을 사랑하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종들의 충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충성입니까? 우리가 배우고 또 배워도 못다 배울 만큼 충성에 충성을 다한 종들의 충성이 우리의 충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농부들의 타락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타락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타락한 농부들의 모습을 거울삼아서 타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잘 믿고 잘 사는 성도가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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