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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 나라로 떠나간 아들 / 눅 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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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5:11-17   
제목  먼 나라로 떠나간 아들 

소위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이후 실종미아 들과 가출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지금 현재 신고된 가출 청소년의 숫자가 이 땅에 12만명 가량 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1998년 말에 조사된 서울 YMCA 청소년 사업부의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 2,37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가출충동을 느낀일이 있다고 대답한 학생이 76,4%, 느끼지 않았다가 23,6%, 실제로 가출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남학생 15,6% 여학생 9%, 중학생 8,6% 인문 고등학생 12,4% 실업 고등학생은 18,8%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는 이땅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가출충동을 매우 보편적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현상으로 매우 우려할 만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 가출이상으로 우리가 우려하고 걱정해야할 또 하나의 다른 유형의 가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가출이상으로 심각한 인간 실존의 문제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가출사건입니다. 인간의 영혼의 집인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사건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종의 '영적 가출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 가출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먼나라로 떠나간 현대인들의 가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속에 나타난 우리의 이웃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기 위하여 몇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1.가출자의 정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누구의 이야기를 하시고 싶어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이 들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나가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비유에 앞서 이야기하신 두 개의 비유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비유에서 목자는 드디어 잃어버린 양을 찾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립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에서 예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5:7을 보십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둘째 비유에서도 어떤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을 다시 찾습니다. 역시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립니다. 그리고 또한번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역시 강조된 초점은 죄인의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 비유에서 두아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메세지가 무엇일까요? 죄인도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의 마지막 절정에서 확인됩니다. 역시 아들이 돌아온후 잔치석상에서 24절에 보면 아버지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 이 내 아들(죄인이라고 하시지 않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그러므로 이 한주간 전도를 하시면서 불신자들을 접촉할 때 우리는 그들을 본래 하나님의 자녀이었으나 지금은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을 찾고 계신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접근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모든 대상자들 그들은 잃어버린바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어도, 지금은 비록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고 찾으시는 영혼들이라는 사실-이것이 우리들의 태신자 인식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가출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본문 12절을 좀더 진지하게 관찰해 보면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이 가출한 진지한 이유를 탐색할수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의 가출요구 대목에서 강조된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본래 유대나라 법에 의하면 장자에게는 아버지가 죽은 후 재산의 3분의 2를 둘째에게는 재산의 3분의 1을 남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신21:17) 그런데 그것을 지금 당장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지적하시고자 했던 탕자 가출의 근본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신자와 불신자의 삶의 본질적 차별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의 중심성이 자기인가? 하나님인가?라는 질문으로 대답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중에 어떤분들은 과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수없이 많은 소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차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임을 고백할수 있다면 예수를 주인(주님)으로 고백한 그날부터 적어도 주인의 뜻을 살피고 순종하기 위한 거룩한 고뇌와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 거룩한 고민도 싸움도 없이 너무나 쉽게 자기충동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다면 그에게 주어진 직분과 상관없이 그는 아직도 교회안의 탕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혹시 나도 내 마음대로 살고싶은 이기적 욕구 때문에 현재 가출중은 아닌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물어 보십시다. 혹시 가출중 이십니까?)

서두에 언급한 YMCA 가출 청소년 연구 보고서에 보면 가출의 이유가 흥미롭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선 가출충동을 느끼는 상황은 무엇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부모와의 갈등때문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49,9%,공부때문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11,4%,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라고 대답한 학생이 8,6%였습니다. 실제 가출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네 번째로 많은 이유가 친구유혹때문이 11,4%, 세 번째를 차지한 이유가 학교공부가 싫어서가 18,5%,두번째 이유가 재미있는데, 그냥 답답해서가 19%, 첫 번째는 역시 부모와의 갈등으로서 37,4%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가 저는 마음대로 살고싶다든지 혹은 답답해서 등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분석으로는 그것이 가장 정직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의 갈등도 따지고 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고싶은 욕구와의 대립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교공부가 싫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하고싶은 공부가 따로 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면 인생가출의 가장 정직한 이유-그것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였던 것입니다. 사단이 첫 사람 아담을 충동질한 죄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3.그러면 가출의 결과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13-17절까지가 다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묘사들입니다. 우선 그는 먼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합니다. 가출의 이유가 정당하지 못한 삶이 생산적일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YMCA보고서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가출해서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에 대해서 1위가 친구집에서 놀았다가 33,9% 2위는 유흥업소에 출입했다가 28,2%, 3위는 노래방 비디오방 만화방에 있었다가 16,9%, 4위는 길거리에서 배회했다가 12,1%, 여행했다가 8%-대부분 성경의 증언 그대로 허랑방탕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 허비하고 흉년을 만나 결국 돼지치는 노예살이로 전락합니다. 유대인이나 중동 지방 사람들은 대부분 돼지를 불결한 짐승으로 여겨 먹지 않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돼지치기로 전락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관념으로 보면 사단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법에는 돼지치기가 금지되어 있고 법문에도 "돼지를 치는자는 저주가 있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축복을 찾아 떠났으나 이제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떠났으나 부자유한 자가 되었고, 풍요를 찾아 떠났으나 배고픈 자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찾아 떠났으나 죽어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이 그림이 바로 오늘날 영적 탕자들의 실존, 죄인의 실존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유하려 했던 이들이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을 봅니다. 정신의 부요를 찾아 떠난 이웃들이 오히려 정신의 황폐를 경험하는 것을 봅니다. 자유의 먼나라를 찾아 떠나간 이웃들이 부자유의 사슬에 매인바된 침몰을 목격합니다. 신동아잡지 10월호에는 정신의 자유를 성의 자유로 실험하려 했던 우리시대에서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한 작가요 대학교수가 우울증과 자폐증, 거식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인터뷰 특종기사로 다루었습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자는 M교수가 친히 썼던 글에서 예언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수 없다. 다만 얘기할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외로움의 극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나는 언젠가 새로운 구원의 천사가 내앞에 나타나 주리라고 기대할 뿐 내가 나서서 구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것이고--그러다가 결국 대리배설로만 사랑의 역사를 마무리 하게될지 모른다. 그건 정말 겁나는 일이다." 기자는 M교수의 오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외로움을 넘어 공포의 극한에 내몰려 있다"고.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이런 먼나라로 떠나간 아들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먼나라의 지친 삶을 이제는 그만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받아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버지가 안타까운 가슴으로 그들을 찾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잔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신분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꿈꾸던 자유와 풍요는 먼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집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집으로 돌아오도록 그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이 메시지를 이 한 주간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주일 먼나라로 떠나간 우리의 형제 자매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집인 교회로 오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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