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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가진 자 / 고후 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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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6:4-10) 

고후 6:4-10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갑부가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만족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입증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돈 일백만 달러를 현찰로 드리겠습니다."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는 정말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 너무 좋아서 행복하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족들이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만족한 삶을 누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부자의 돈 일백만불을 받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자가 묻는 단 한 가지 질문에 아무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정말로 당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을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 돈 일백만불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만족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찰 만(滿)자 입니다. 꽉 찼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예컨대 컵에 물이 꽉 차면 만족입니다. 그러나 물을 조금 마시면 빈 공간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아니 불(不)자를 써서 불만(不滿)입니다. 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돈 일백만불이 필요하다면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진정으로 만족한 삶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십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명언을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에게든지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은 아닙니다. 비록 적게 가졌다 하더라도 가진 것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어떤 세무서원이 목사님 가정에 방문을 했습니다. 세금을 매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무서원은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가정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목사님이 선뜻 대답하셨습니다.
"예, 우리는 엄청 부유합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되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예, 저는 우선 하늘 나라에 영원토록 살아갈 좋은 스카이 맨션 한 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자상한 아내가 있고, 의좋게 살아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밤에 아무 걱정 없이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세무세원은 더 안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목사님의 말씀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엄청난 부자네요. 그러나 세금은 매길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면서 되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는지 적게 가졌는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내가 적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는 사람은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시련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6∼7절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큰 감격이 있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제일 마지막 절에 보면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에 대해서 100% 만족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늘 주님이 주시는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8∼10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많은 시련 속에서 살았습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런저런 많은 시련과 환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딤후3:12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핍박합니까? 사람의 부패한 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잘못되면 다른 사람도 같은 잘못을 범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선을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 시간에 조금 늦게 나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그 분들의 심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다른 분들은 다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늦게 들어왔습니다. 마음 속에 죄송한 생각이 들것입니다. "내가 다음부터는 조금 일찍 와야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옆에 자기보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안심이 됩니다. 그러다가 잘 아는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늦게 들어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죄송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래도 내 지각은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내가 게으르면 다른 사람도 게으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하면 다른 사람도 악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적게 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헌금을 적게 내기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부패한 심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언제나 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질투하고 핍박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너무 낙심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잠14:4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여러분,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그 외양간이 더럽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깨끗합니다. 그러나 소가 있으면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무슨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르게 살려고 하고 열심히 충성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비난도 생기고 또 오해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이 칭찬 받으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몇 해 전에 작고한 미국의 유명한 흑인 여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세기에 한 사람 날까 말까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안 앤더슨이 처음으로 독창회를 열었을 때입니다. 그의 독창회가 끝났을 때 온갖 신문들이 앞뒤를 다투어서 혹독한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이냐? 도대체 소프라노냐? 앨토냐? 베이스냐?"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그 혹독한 평가를 읽고서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찌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을 받으려고 하느냐? 도대체 너를 나쁘게 평가한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면서 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느냐? 모든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란다!"
마리안 앤더슨은 어머니의 말에 다시금 용기를 얻어서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리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일하다보면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100% 완전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를 모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믿음으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6∼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그는 시련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꿋꿋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늘 변함없이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히11:38에 말씀한 그대로 바울이야말로 세상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핍박과 환난도 바울을 넘어뜨리지 못했으니까요. 우리도 그런 사람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후 4세기 중엽 안디옥에 크리소스톰이라는 유명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무척이나 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몰려왔습니다. 크리소스톰도 핍박자들의 손에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핍박자들은 크리소스톰을 붙들어 놓고 어떻게 처리해야 될 줄을 몰라서 매우 고심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 입을 열어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매우 때려서 내보냅시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자기가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것이라고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매로 때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깊은 감옥 속에 종신토록 가두어 놓읍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생겼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멀리 유배를 보내어 버리십시다."
그랬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고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또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그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말고 굶겨 죽이든지 불태워 죽이든지 빨리 처단해 버리십시다."
그 의견마저도 사람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예수 때문에 순교했다고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소스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엄청 고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핍박과 시련도 하나님의 일군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환난이 있습니까? 시련이 있습니까? 겁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련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인내하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제시대때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에게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가족들을 홀로 남겨놓고서 자기 혼자 죽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난의 명상"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 앞에서 주님이 가시 못자욱과 가시관을 보이시면
나는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할까?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주는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주를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주는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하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할까?"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특별히 80세가 넘은 노모님을 주님의 손에 의탁했습니다.

"하나님, 불효한 이 자식은 어머님을 봉양치 못하옵니다.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불효한 자식의 봉양보다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나을 줄 믿고,
내 어머님을 주님께 부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의 자취따라 가겠나이다."

그 뒤 그는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의 이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핍박이 있습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맡겨주신 거룩한 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큰 감격 속에 살았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그의 마음 속에는 샘솟듯 넘쳐 오르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8∼10절의 말씀입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이렇게 저렇게 많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속이는 자 같았습니다. 무명한 자 같았습니다. 죽는 자 같았습니다. 또 근심하는 자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인간적인 평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 즐거움, 남이 알지 못하는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감격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시 바로 밑에 나남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 여자 거지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였습니다. 몸도 건강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을 입고서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빌어먹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아니, 젊은것이 무엇이 할 일이 없다고 빌어먹고 다니나?"
그래도 그 여자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늘 모든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는 실성했어! 미친 여자야!"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상대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우리 나라가 8ㆍ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소련군이 나남시에 진출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뜻밖에도 미친 여자라고 생각했던 그 거지여인이 소련군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중위 계급장을 하고 장교로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실상은 미친 여자가 아니라 소련군 첩자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람들 앞에서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소련군 장교로서 내게 귀한 사명이 있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너희가 아무리 나를 멸시해도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남모르는 즐거움, 기쁨, 사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천시 여기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대사들입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군이다!"라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격 속에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신의 눈은 밝았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환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그러다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아주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때부터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바울에게 안수 기도를 해주어서 비로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시력은 육신의 시력이 아니고 마음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잘 보이고, 또 그가 자랑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분토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마음의 눈으로 현실 저편에 있는 영원의 세계를 밝히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마음의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에게 이와 같은 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삭개오는 자기의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감격 때문에 베다니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 감격이 우리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누릴 수 있고, 주님 안에서만이 맛볼 수 있는 놀라운 감격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충만하게 누려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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