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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전 1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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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지난 주간 봄볕이 좋은 대학 캠퍼스에서 담소하는 예닐곱명의 대학생 새내기들에게 이런 물음을 던져봤습니다. "여러분, 대학에 왜 왔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라 여기면서도 학생들은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성공하려고 왔습니다...", "교수되려고 들어왔습니다...",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취직하려고 왔지요. 장가도 가야하고..."
그런데 그 대답들 중에 저의 영혼을 뒤흔드는 인상깊은 대답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불안해서 왔어요..." 불안해서 왔다는 겁니다. 남들 다 가는 대학 나만 안가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자기도 남들 따라 대학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제게는 바로 그 대답이 여러 대답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이고 솔직한 대답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안을 회피하는 방식은 바로 'conform, 영합하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하는대로 하는 겁니다. 안그러면 뭔가 잘못될 것 같아서 그래서 따라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참삶은 그 불안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그 불안에 대결하는 것입니다. 남이 가는 길로 따라가고 남이 사는 방식대로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내 독특한 방식으로 내 나름의 선택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들 다 대학갈 때 혼자 유기농사 지으러 갈 수도 있고, 친구들이 결혼할 때 혼자서 수녀원에 들어갈 수도 있고, 동기가 재벌회사를 골라가며 취업원서를 낼 때 홀연히 등대지기로, 소방수로 가는, 바로 그런 결단이 인간다운 삶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앞뒤 안가리고 남들 가는 길을 따라가기에 급급하지 않습니까? 남들이 쓰는 물건 나도 써야 하고, 남들이 입는 옷 나도 입어야 하고, 남들이 가진 취미 나도 가져야 하고... 그렇게 안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옛날 힛트쳤던 노래 가사처럼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님과 함께라면 반딧불 초가집도 좋다'는 그런 주관을 우리 시대에서는 점점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남들 가는 길로 가야 나중에 잘못되었을 때 자기책임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위험부담도 적고 남에게 또는 시대에, 환경에 책임을 전가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비겁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실은 그것도 그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따라가기로 자기가 결단을 내린 겁니다. 그래놓고 나중에 뭔가 잘못되면 세태가 어떠니, 시대가 어떠니 그렇게 회피합니다. '다 그렇지 않느냐'고 자기합리화합니다. 이건 참으로 무책임하고 비굴한 생활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관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 '좁은 문으로 가지 않고 넓은 문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어그러지고 삐뚤어진 이 세대를 본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세상 물결따라 흘러가는, 이땅에 붙박힌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면서 여러가지 무드를 경험합니다. 그 중에서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무드가 바로 불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잊어버리려고, 그 불안으로부터 탈피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오락을 즐기고, 레져를 즐기고, 잡담을 즐기는 것도 다 이 불안을 잊거나 회피하려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방식으로 이어져가는 삶은 진실치 못한 삶입니다. 진정한 삶은 바로 그 불안과 맞닥뜨려 대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안의 근거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이 불안해하는 겁니까? 결국 인간은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불안은 그 죽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죽음으로부터 옵니다. 불안은 바로 죽음을 알려주는 전조인 것이고 불안의 뿌리는 죽음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안에 대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불안이 죽음을 고지한다고 했고 그로 인하여 불안하다고 했는데 그럼 불안에 대결하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미리 앞서 달려가 그것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죽음을 '선구(先驅)'하는 것입니다. 선구란 앞장서서 맞는 겁니다. 선구자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생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가능성을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죽음을 선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선구(先驅)'라는 좀 익숙지않은 용어를 써서 죄송합니다만은 이건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고 또 꼭 이해해야할 중요한 단어이기에 자꾸 반복합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죽음의 선구'란 이런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에 보면 5공 시절 내란음모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정부가 석방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많은 한국인들이 유학중인 퀸스칼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했는데 거기서 그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현해탄을 지나면서 겪었던 죽음의 체험에 대해 이런 간증 겸 고백을 합니다. "제가 여러번 죽음의 위기를 경험했지만 그때처럼 심각하고 절박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이젠 죽었구나' 싶은 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가장 절절하게 체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저의 삶은 확 바뀌었습니다. 죽음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그 후로는 무서운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농을 섞어 하는 말이 "여러분도 목숨이 두개 있으면 한번쯤은 반드시 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전혀 새로운 삶이 열릴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몸이 떨려왔습니다. 그리고 번뜩 떠오른 게 바로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지금 이 고백을 부활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례와 연관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세례와 부활... 세례에 대해서 그는 롬6:3-5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죽지않고서는 부활도 없고 새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죽어 장사된 자만이 주님처럼 다시 살아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죽는 자만이 날마다 새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씨는 그 경험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고 자타가 말합니다. 그는 거기서 죽음을 미리 맛봄으로서 죽음을 극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보는 세계는 다른 세계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안 속에 살며 보던 세상과 죽음을 선구함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나서 보는 세상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옥중서신 목차를 보면 이런 소제목들이 쭈욱 열거됩니다. '죽음 앞에서의 결단', '사랑 없이는 평화도 화해도 없다', '원망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부활에의 확신', '새로운 삶의 출발', '죽음의 고비 뒤에 오는 고독', '용서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다',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은혜와 감사'... 어쩌면 대통령직은 그런 체험을 한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적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선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이 무엇입니까? 죽고 다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죽었습니까? 죽음을 선구하셨습니까? 죽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무료하게 산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을 선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지만 죽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부활을 체험하고 새생명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수없이 부활절을 맞고 보내면서도 그냥 이렇게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선구한 자에게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관계가 전개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옵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뭍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던 것처럼 그렇게 새로운 세계가 죽음을 선구한 자에게만 열려오는 겁니다.
다시 한번 물어보십시다. 주님과 함께 죽으셨습니까? 죽고 다시 사시는 겁니까?... 죽어본 경험조차 없으시다구요? 여전히 죽음이 두렵고 불안에 떨며 사신다구요? 그래서 그런 불안을 떨쳐버릴 것들이 뭐 없나 하고 세상을 기웃대고 이런 저런 기호와 취미를 찾아 다니신다구요?... 그런 내 실존 어디에 거듭난 삶의 모습이 있고, 부활의 능력이 있고, 헛되지 아니한 주를 향한 수고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죽음으로 비롯되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유희를 만들었습니다. 보십시오. 32절에서 죽음을 선구하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을 사도가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이 노래 표절입니다. 이 노래의 원작자는 이미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 그래서 날마다 죽지 않고 여전히 옛사람으로 사는 자의 삶은 세상 향락을 즐기는 삶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 앞에 로마 병정들이 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들은 주님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대신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 관을 씌우고 갈대를 손에 쥐게하고서는 왕께 하듯 그 앞에 무릎꿇고선 절을 합니다. 그렇게 조롱하고 장난하다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이게 다 뭡니까? 바로 재밋거리를 찾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죽음 앞에서 fun, 재밋거리를 찾아다닙니다.
도대체 부활절과 월드컵 승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월드컵요? 그것도 엄격히 말하면 인간의 불안을 떨쳐버리는 세계적 놀이의 하나입니다. 3S라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여기에 현혹되어 사람들의 의식이 더욱 몽롱해져 가고 있습니다.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세대의 바다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부활절도 전통적 분위기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실 전 올해 부활절 새벽예배를 오태동 교회 부지에서 할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거기 무덤도 있겠다 적격이라 생각했는데 교통편을 비롯하여 제반 준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그냥 교회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나 내년에는 그곳에서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어찌된 게 부활절 예배가 새벽녘에 막달라 마리아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가던 그 설레임, 그 고즈넉함은 다 사라져버리고 허연 대낮에 왁자지껄 법석을 떠는 가운데 웅웅대는 곳에 모여서 이런 저런 순수하지 못한 날파리들이 끼어든 가운데 예배 아닌 놀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로마의 콜롯세움 같은 곳에서 재밋거리를 만들어 내는 일에 기독교가 서성이고 있습니다. 설상가상 '패널티킥을 못찬 멍충이는 한강에 코를 박고 죽어야 한다'는 설교 해프닝이 벌어지고 거기다 대고 '아멘'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습니다. 이젠 기독교도 실패자의 자살을 유도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까?...

바로 이런 자리로부터 떠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해야할 죽음입니다. 왜 그런 자리에서 불안에 떨며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런 삶이 무의미하다 싶으면 거길 떠나야 하는 겁니다. 그 떠남이 바로 죽음을 선구하는 겁니다. 그 죽음을 체험함으로 거기로부터 떠난 후에 다시 새로운 의미로 충만케 되어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생, 거듭남'입니다.
새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 이게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활 이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속뜻입니다. 누가 높으냐, 누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고 다투었던 예루살렘적 실존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갈릴리적 실존을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의미에 지쳐 떠났다가 다시 의미를 가지고 돌아오는 자리가 바로 부활의 자리입니다. 옛사람은 떠나보내고 새사람으로 오는 겁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처럼 이제 새로운 자신으로 되돌아가서 증거합니다. 이게 바로 선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후의 죽음의 선구, 바로 여기서 무서운 용기와 힘이 용솟음침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도망칠 게 아니라 미리 달려가 맞아야 합니다. 54-55절의 바울의 선언을 보십시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앞서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미 주님에 의해 그 힘을 잃고 말았는데 왜 그 죽음을 겁내하며 두려워하며 불안에 떠느냐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의 인생은 바뀝니다. 이 거듭남의 자리에서 인생은 달라지는 겁니다. 이때 비로소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자기잠재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자기 본연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넘어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본연의 모습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에의 선구와 같은 결단이 있을 때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새롭게, 제대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가 33절에서 '속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잘 믿는다는 저들 속에 하나님의 모르는 자들, 이런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걸 모르면 그 신앙은 헛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신앙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 껍데기뿐인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능하고 무익한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으로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는 부활장의 결론부에 주는 사도의 권면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난하면서도 부자인줄 착각하고, 벌거벗었으면서도 잘 입은 줄 착각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보는 줄 착각했던 라오디게아 교인 같은 교인일 것입니다. 그렇게 미적지근한 사람은 주님이 역겨워 토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신자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진정 부활을 체험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날마다, 순간마다 죽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미리 선구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 말고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호통을 치면서 그 죽음을 밀쳐뜨리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새로운 시야가 그 앞에 열려올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의 희열이 있고 영적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 민족의 기상이 서린 3.1 독립선언문의 말미를 묵상하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만물이 다시 부활하는 봄철에 불렀던 이 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불렀던 부활의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함께 이 노래를 불러보십시다. 주보 1면의 사진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되도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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