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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여자만 남았더라 /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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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만 남았더라
요한복음 8:1~11 

본문 성경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요 또 사건입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무슨 글씨로 땅에 쓰셨나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히브리 말도 있고 헬라 말도 있고 로마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언어문화 속에서 예수님은 땅에다가 어느 나라 글자로 글을 쓰셨을까? 그리고 무엇이라고 썼을까? 왜 말로 하시지 아니하고 땅에다가 글을 썼을까? 그런 궁금한 마음이 있고 또 하나는 간음이라는 것은 혼자 범하는 죄가 아닙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간음죄를 짓게 될 것인데 여자는 끌려왔고 남자는 지금 어디있나, 나는 지금 그게 궁금합니다. 레위기 20장 10절이나 신명기22장 20절에 보면 남녀를 함께 죽이라 그랬어요. 근데 그 남자는 어디 있고 여자만 끌려와서 이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됐을까?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마라" 라고 하고 용서하셨는데 이 여자가 나가서 다시 범죄하고 두 번째 붙들려 왔다면 예수님은 그때는 뭐라고 하셨을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이 알고 싶어요.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된 사건입니다. 모름지기 성전마당에서 된 사건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오늘 성경에 그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책잡아서 올무로 옭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이같은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뭐 간음한 여자가 이 사람뿐이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참 난처하게 만들었어요. "돌로 쳐라" 하면은 당시에는 로마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때입니다. 사형집행권은 반드시 로마 사람에게 있습니다. 로마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어떤 죄로도 정죄할 수 없고 또한 사형집행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쳐라" 해서 돌로 치는 날이면은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치지 말라" 하면은 이제 어떻게 되느냐?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것은 모세가 쳐죽여라 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는 메시아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이제 "치지 말라" 그러면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이요, 모세의 법을 거역하라고 가르친 사람이다' 이렇게 이제 모든 사람에게 선전을 할 참이에요. 이래서 예수님과 많은 백성들을 이렇게 이간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기회를 포착하시고 더 소중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이때는 사람들이 양심이 있어서 이 말을 듣고 다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다고 했지만은 요새 이런 일이 있다면 저마다 들어서 칠 겁니다. 나는 죄없는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돌로 칠 겁니다. 그러나 이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다들 피해갔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땅에 글을 썼습니다. 왜 썼을까? 그 이유가 있다면 모름지기 심리학적인 것 같습니다. 쿨 다운(cool down) 시키겠다는 것이지요.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십시오." 세 가지를 구합니다. 용기, 냉정, 그리고 지혜. Courage, Sincerity, 그리고 Wisdom. 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 이 냉정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격분했습니다. 뭐 정신이 없습니다. 분노했습니다. 묻기를 마지 아니했다. 재촉하고 있습니다. 군중심리가 발동을 했습니다. 때로 모여서 돌을 들고 막 치려는 순간입니다. 고함을 지르구요. 예수님은 저들을 일단 그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시고 싶었습니다. 흥분된 감정을 냉정하게 되돌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밝은 이성과 밝은 양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아시는 대로 흔히 야만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야만인이 뭡니까? 그 특징이 많이 있겠습니다만은 그 중에 하나가 감정 주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정신을 못 차려요. 자기 집 재산도 다 때려 부셔. 가문 망신하고 자손 만대에 망신할 짓도 막 하는 것이에요. 이게 야만인이죠. 그 왜 그런 야만인들을 가만히 보면은 그 족속들끼리 싸울 때, 한 번 화가 나면은 모조리 다 죽여버리잖아요. 여러분 이런 말이 있지요. 너 죽고 나 죽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최소한도 너죽고 나 살아야지. 너 죽고 나 죽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전혀 생각이 없는 이 감정, 폭발하는 감정에 사로잡혀서 행동하는 것, 이게 야만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Cool down 시키려 합니다. 냉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과 대학 교수들께서 외과 의사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물었습니다. "이제 의사로서 환자에게 대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냐?"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친절이요, 인간관계요, 또 주사를 잘 놔야되겠고 처방을 잘해야되겠고 뭐, 뭐, 뭐, 뭐 따로 얘기했어요. 다 들은 후에 교수님은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단이다." Diagnosis, 진단이 먼저요. 사실이 뭐냐 이거예요. 어디까지가 사실이냐. 진실을 찾는 것이 먼저요. 이걸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깐 멈추도록 땅에 글씨를 썼어요. 그리하여 자책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글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옛날에는 우리 나라에도 좌우간 편지가 왔는데 편지를 못 봐서 이걸 누구에게 가서 읽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그렇듯이 지금은 우리가 다 글을 봅니다만은 글을 못 보는 일이 많거든요. 그 2000년 전 그 때에는 글 보는 사람 몇 안돼요. 글만 읽으면 그게 지성인이요. 그런고로 땅에 글을 썼어요. 지성인 먼저. 글을 볼 줄 아는 사람 먼저, 와서 보라 이거예요.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이래서 감정을 바꾸고 지성인 먼저 생각해 보라,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뭐라고 썼을까? 그건 성경에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많은 학자들이 생각을 해봅니다만은 대체로 두 가지의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먼저 쳐라" 썼을 것이다. 그리고 글 읽는 사람은 먼저 읽고 글 못 읽는 사람들은 자꾸만 재촉을 하게 됐지요. 근데 글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읽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가 버리고 글 못 읽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이렇게 생각도 하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죄목을 썼을 것이다. 살인, 간음, 도적, 거짓, 위선, 교만, 이렇게 죄목을 쭉 썼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해야 될 것은 이렇게 지금 집단화되어 가지고 있거든요. 감정과 격동이 지금 집단화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때인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개별화했어요. 흩어 놓았어요. 한 사람 한사람 와서 보게 만들었어요. 개별적으로 문제를 처리해야 되요. 집단적인 행동이란 언제든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 먼저 죄인임을 생각하라' 이거지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건 앞에서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6장 1절에 보면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앞차가 고장이 났으면 내 차가 어떤가 생각해야 되고, 앞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았으면 나도 넘어질 것을 생각해야지요. 넘어지는 사람과 나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되죠.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죠.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나 먼저 생각해야됩니다. Self-examination Chance 예요. 자기 자신을 시험할 때가 됐어요. 남의 실수를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게 그런 실수가 있나 없나', '아니, 나도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으니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레마르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 아마 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영화도 나왔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전범국인 독일이었습니다. 독일 소년, 아주 어린 소년 일곱명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서 자원해서 일곱사람이 전쟁에 나갑니다. 3년 동안 이 어린 소년들이 무자비하게 군인으로서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을 하다가 여섯사람이 죽고 한사람이 남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한때에 적과 마주서서 총을 쏩니다. 총공격을 합니다.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합니다. 한참 쏘다 보니까 조용해졌어요.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다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가서 시체들을 돌아보니까 지금 죽어가는 사람, 비참한 사람, 그 모든 모습을 보면서 거기서 그가 절규를 합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당신들이 나와 꼭 같은 인간임을 깨달았노라." 너희들이 죽은 것처럼 나도 죽을 수 있고, 당신들에게도 어머니가 있어서 당신들을 보내면서 괴로워했고 지금도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고, 당신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나도 있고, 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소. 당신들도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당신들도 용서를 바라는 사람이요 나도 용서받을 사람이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게 클라이맥스입니다.
여러분, 내가 총을 쏘아서 저 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과 나와 다릅니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비난합니까? 누가 누구를 비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가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어요. 아무 생각도 없어요. 뻔뻔해요. 바로 그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사람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에요.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여집사님이 제게 찾아와서 뭐 용케 어떻게 알기도 잘알았대요. 어느 집사 어느 집사 어느 집사가 이혼을 했고 어느 집사는 별거생활 하고, 뭐 그러고 비방을 하더라구요. 한참 듣고 나서 저는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결혼생활 하면서 '에이, 이혼해 버리고 말자'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했더니 "몇 번 해 보았지요." "그러면 혼자 살 자신이 없었구만요. 용기가 없었구만요."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라구요. 여러분, 누가 누구를 정죄할 거요. 말조심하세요.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이걸 알아야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그 유명한 말, Know thyself, 키노시아우터스, 네 자신을 알라. 뭘 알라는 겁니까? 나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 나의 무능을 알라. 내가 지혜가 없음을 알라,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알라. 이걸 알아야합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묘비에 뭐라고 썼느냐구요?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저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주여 나에게 베푸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나는 저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한 마지막 유언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여기에 귀중한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아무도 없고 예수님과 이 여자, 여자만 남아있더라구요. 예수님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고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신학적으로는 이것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 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니까 돌로 쳐야지. 그러나 "나도" 이 시간은 예수님이 자기자신을 죄인으로 스스로를 간주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이 죄인이 되는 시간입니다.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영적으로 십자가를 진 시간,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여자, 이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감격합니다. 그 예수님, 글쎄요. 원래 창녀니까,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자이기에 감히 그렇게는 못했겠지만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고 예수님을 포옹하고 싶었겠죠. 이 감격과 이 고마움, 한 사람을 구원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렇게 예루살렘 마당처럼 시끄럽습니다. 모두가 비판하고 모두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비판 소리입니까?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예요. 언제까지 이 고함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누가 누구를 비판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이 여자가 예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이 여러분, 고함을 지르는 그 사람 생각하지 마시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하세요.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세요. 여기에 창조적인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그 여인만 홀로 남았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 예루살렘 성전 마당과 같이 시끄러운 세상에 삽니다. 어느 사이에 군중 속에 서서 우리 또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불쌍히 여겨 주시며 이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정죄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 여인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난 그 감격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어서 속히 이 모든 비방을 멈추고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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