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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남편을 데려오라 / 요 4: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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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편을 데려오라  (본문 : 요 4장 16~25절) 


본문을 두 번으로 나누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사는 천한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희망, 용기, 새로운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찮은 자도 돌보시는 주님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이 목마릅니다. 또 인생이 허무합니다. 그리고 삶이 고통입니다. 수가성의 여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목말랐고 허무했으며 삶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자를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지성인만 환영한 게 아니라,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사랑과 존경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환영하고 축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 싶다”고 하십니다. 여인은 ‘정말 나 같은 여자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간혹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이 여인에게 남편 문제는 숨기고 싶은 부분이었을 겁니다. 순간 여인은 절망했지만 곧 벗어나 솔직해지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이미 여인에 대해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었다는 것과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사건에서 몇 가지 깨닫고 배울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진정한 행복,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가 정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고서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은 있을 수 없습니다.

■ 과거를 정리하라
누구든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묻어두고 삽니다. 그러면서 자꾸 미래를 향해 가려고만 하니 행복이 보일 듯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 몇 가지 태도로 반응합니다. 하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 치유하지 않고 오히려 묶어놓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길수록 자신의 과거를 더 감추려 듭니다. 둘,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항상 미루고 유예시킵니다. 셋, 정면 돌파입니다. 자신이 문제 해결의 능력이 없음을 알고 속이거나 보류하기보다 솔직히 털어놓고 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셋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삽니다. 솔직히 털어놓는 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과거에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데 그 남자가 네 남편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18절 끝에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단정해 주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 숨기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고백이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들어줄 때 고백이 됩니다. 신앙 고백은 주님께서 “네 고백이 옳도다”라고 하실 때 참다운 것입니다.

■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지라
둘째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소상하게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수가성의 여인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을 데려 오라”라고 하시지 않고 “남자를 데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자가 당황한 것입니다. 남자를 데려오라고 하면 아무나 가능하지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 대해 들은 얘기도 없지만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만나서 얘기 듣고 아시는 게 아니라 만나지 않고 얘기 듣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누군가 나의 과거와 마음속 생각까지도 다 아신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자신의 전부를 알고 있다는 데 부끄럽고 겁이 날 겁니다. 한편 정반대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안심과 위로가 올 겁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숨길 게 없어 편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감추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 감춘다는 것은 속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모르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다 아시고 사랑하신다면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다 아시고 만나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시면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아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굉장히 충격을 받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수님의 태도에 여인이 눈을 뜨게 됩니다. ‘내가 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눈이 떠져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처음 봤을 때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하는 유대인 한 남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알았더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이 여인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큰 사람입니까?”라고 합니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자, 여자의 말이 또 바뀝니다. “당신이 선지자입니다”라며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 믿음만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한꺼번에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우선 ‘갈릴리 바닷가에 살던 30대 유대 청년’으로 접근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볼 능력이 없어 자기 믿음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눈을 뜨고 알게 되고 보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의 수준은 ‘예수님이 선자자보다 좀 나은 것 같다’까지 올라왔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인의 화제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화두는 먹는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눈을 뜨고 나서는 화제가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화제와 관심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직장 얘기, 자식 얘기 등 우리의 관심대상에서 이제는 좀 더 고상해져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이름도 없고, 한번도 사랑과 존경을 받아보지 못했던 여인이 물 길러 와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눈이 떠지면서 예배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을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청했을 때 여인이 무시하고 그냥 가버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그냥 가버리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한꺼번에 모든 것을 깨닫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순예배도 드리십시오. 제일 불쌍한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만 보고 가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나마 예배시간에 졸고 나면 더 얻을 게 없습니다. 그 분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은 계속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육체적인 대화에서 영적인 대화로 올라갔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의 문제에 대해 솔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과거, 상처를 건드리면 싫어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을 보면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그 분은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죄를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죄, 과거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여인의 축복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 죄의 고백은 하나님께
수가성의 여인은 과거를 다 드러내고 오직 예수님께 죄를 고백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종교는 신부에게 죄를 고백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안됩니다. 직접 예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잘못하면 그 사람에게 사죄해야 하고, 나라에 잘못했으면 나라에 잘못을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과거를 다 쏟아놓았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은 은총의 시작입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인류 가운데 의인은 예수님 말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자백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성령과 생명의 법으로 인쳐주시며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축복이 시작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이 주어집니다.

■ 자신을 드러내라
주님은 “여자여, 가서 남편을 데려 오라”라는 말씀이 여인에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것인지 아셨을 겁니다. 그러나 가서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치부를 찌르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숨기지 마십시오. 유예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와서 고백하십시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축복하시고 기름 부어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 당장 예수님 앞에 자기를 드러내십시오. 만일 죄의 문제를 예수님 앞에 털어놓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부어주십니다. 삶이 해방되고 자유하고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편을 데려 오라 하신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것,
피하고 있는 것, 감추고 있는 것
다 드러내게 하시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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