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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본질 /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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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 (고전 13장 4~7절) 

◆ 고린도교회의 문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중요한 것이지만 영적 성장의 발판은 되지 못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으로서 우리가 자랄 수 있도록 힘을 주지만, 조화있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발판은 아닙니다.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은 바로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입니다. 지리적 조건이 좋아 오래 전부터 국제 무역 교류가 발달하여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BC 146년 로마군의 침공으로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BC 46년 율리어스 시이저가 고린도의 재건을 명령함에 따라 로마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급속히 성장한 반면, 도덕적으로 심히 타락하고 맙니다. 당시 ‘고린도인과 같다’라는 말은 ‘가장 타락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국제 항구 도시로 여러 민족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잡다한 종교가 많이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풍요를 비는 제사를 한 후 사제와 성적 관계를 맺는 창녀 즉 ‘성창(聖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의미로 고린도교회의 여자들에게 머리에 흰 수건을 쓸 것을 권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방언, 예언, 능력 행함, 병 고침, 영 분별 등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회는 마치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번성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두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능력은 있었지만 인격이 없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의 복은 누리면서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찬양하고 예배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16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냅니다. 첫 장과 마지막 장의 인사말을 제외하고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낱낱이 열거하며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의 분열이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음행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첩과 관계를 갖는 뻔뻔스러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재판, 분방, 이혼의 문제 등이 발생했습니다.

◆ 사랑의 정의
사도 바울은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우고 음행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믿음의 발판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말씀에서 모든 성도가 방언하고 천사의 말로 예배를 드리며, 영적으로 교통하고 기쁨이 넘쳐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신당에서는 귀신을 쫓거나 부를 때 구리와 꽹과리를 쳤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드려도 사랑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2, 3절에서 더욱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사랑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공허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헌신할수록 허탈하고 망령된 신화에 빠지고 만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된 영적 성숙을 위해 사랑을 소유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바울은 4~7절 말씀에서 신앙을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은혜를 동원해 거짓 사랑과 구별되는 참 사랑에 대해 정의합니다. 사랑은 크게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녀 간의 ‘에로스’ 사랑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친구 사이의 우정 ‘필레오’입니다. 우정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진정한 친구 세 명을 얻는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정이 영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셋째, ‘스톨게’ 즉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숭고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아가페’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아가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4~7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아가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사랑’이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로 바뀌서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 참고 믿는 사랑
바울은 사랑을 열다섯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7절에서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다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 참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이나 허물을 덮어줄 때 ‘참다’라는 말을 씁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을 덮어주기보다 드러내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좀 나은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아담의 변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하고 물었을 때, 아담은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은 ‘나는 죄가 없다’라는 변명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녀를 잘 교육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부인 수잔 웨슬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자녀를 교육했습니다. 한 번은 웨슬리가 부인의 행동에 감동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똑 같은 일을 20번씩 반복해 가르칠 수 있소? 어떻게 그렇게 잘 참을 수 있소?” 부인은 “내가 19번까지 참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0번 참았으니 저 아이가 이렇게 변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참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합니다. 기대가 있고 변화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다’라는 말은 ‘적의 공격에 대항한다’는 군사 용어입니다. 사랑은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확보하기 위해 견뎌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받지 못하게 하는 모든 공격에 맞서 싸우는 것이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참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일본의 성자라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만난 후 빈민굴에 들어가 도박꾼과 창녀들에게 전도하는 데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는 도박꾼들이 찾아와 노름 자금을 달라고 떼를 쓰면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너는 위선자다. 저 사람에게 돈을 주면 가서 다시 도박을 할 것이다.” 그때 가가와는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 의사가 환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 다 알고 있지만 끝까지 믿어주고 참는 것이 사랑 아니냐?” 가가와의 대답은 간단 명료합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 믿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세상은 알고 나면 이용하려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기 때문에 용서하십니다. 세상은 알면 만만하게 여겨 짓밟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집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드립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다.” 용서의 이유를 찾으시는 분이 주님이시요, 그 주님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믿음이 깨어지는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는 것이 사람이 아니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것을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하나님이 주는 은사
고전 13:4~7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제 사랑이란 말에 예수님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십시오. 자신의 이름으로 읽을 때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것을 믿으십시오.

바울은 7절에서 ‘모든 것’이란 말을 반복합니다.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아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이름을 넣어 말씀을 읽으면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하지 못해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저는 외아들입니다.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누이들이 결혼할 때 매형들이 찾아와서 “아버님, 제게 따님을 주십시오. 제가 사랑으로 돌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 후 누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항상 다정하게 사는 게 아니라 다투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리라’. 그런데 온누리교회에 와서 저희는 크게 다툰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을 죽이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파르르 떨면서 “용서 못해요”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 지난 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는데, 용서하면 다음에도 그럴 것 아니에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에 뒷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원하지만 배신하고, 참기를 원하지만 분을 내고, 사랑하기 원하지만 미워하고, 후회하면서도 또 다시 그런 행동을 하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꽂혔습니다. 다음 날 교회에서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하나님 믿어?” 아내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0년 후에도 나를 이런 모습으로 놔두실까? 여보, 하나님을 믿으면 나를 용서해 주구려.” 그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사랑은 성품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갖춰지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능력이 아닙니다. 무엇을 갖추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그래서 12장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 ‘’사랑’은사를 구하십시오
사랑은 은사입니다. 은사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은사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누가 말려도 하는 것입니다. 못하게 한다면 숨어서도 몰래 하게 됩니다. 은사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선물로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구할 때 사랑을 은사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두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저는 항상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 동기는 예수님을 사랑한 후, 어느 순간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내입니다. 저와 아내는 여섯 살 나이차가 있습니다. 제가 전임 전도사로 나가야 할 때 아내는 학생이었습니다. 자꾸 나이차로 문제가 발생하니까 아내가 미워졌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사랑하다 미워지면 그냥 미운 것보다 더 밉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예뻐보이게 해달라고 6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계속 기도하다가는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구하면 그 영혼을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의 모습을 볼 때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항상 마음의 문 밖에 서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에 거절하고 싶지만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
다시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날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삶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녹아지도록
사로잡아 주시고,
죽음을 이기는 능력으로
간절히 간구하는 우리에게
사랑의 은사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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