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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상을 채우라 / 사 55: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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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상을 채우라 (이사야 55: 1 ~ 3)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먹지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서신서의 말씀 : 골로새서 2: 9 ~ 13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의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또 여러분은 범죄와 육신의 무할례로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 14: 15 ~ 24

상 앞에 함께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였다. 그런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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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결혼풍속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약혼을 한 뒤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은 약혼 후 1년 뒤에 합니다. 결혼할 사람들은 약혼한 직후에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한테 초대장을 냅니다. 초대장을 1년 전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예식 전에 다시 초대장을 보냅니다. 초대장을 두 번 보내는 겁니다. 결혼할 때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서 식을 치릅니다. 신랑집에서 결혼 예식을 치르고 축제를 벌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은 약혼을 한 뒤 1년 만에 결혼 예식을 하는 그 예식장에 손님을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다 핑계를 댔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 밭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소를 다섯 쌍이나 샀는데 소가 제대로 농사지을 수 있는지 시험해 봐야 하기 때문에 못 간다, 또 다른 사람은 나도 장가들어서 아내를 맞았기 때문에 못 가겠다면서 양해하라고 합니다. 종들이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주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1년 전에 초대했고 그리고 1년 후 결혼 직전에 다시 초청장을 보내서 초대했는데 거절을 당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합니다. 이런 거절은 유대인의 풍속에서 보면 실례 중에 실례입니다. 아주 크게 결례를 한 것입니다. 주인은 잔치자리를 채우기로 마음먹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 유대인 사회에서는 결코 초대받을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 지체장애자, 눈먼 사람, 저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잔칫상을 채우라고 합니다. 종들이 다시 보고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큰길로 가고 울타리를 넘어가서 누구든지 사람을 만나면 억지로 데려다가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잔치는 진행되어야 하고 잔치자리는 채워져야 합니다.

기독교가 313년에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시민과 로마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종교만을 믿게 했습니다. “그 종교는 바로 여지껏 로마가 핍박해왔던 기독교”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국교, 곧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성서의 말씀 중 한 가지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국교가 되었고,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니, 이제 문제는 교회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교회라 이름하는 잔칫집, 이 집에 있는 모든 좌석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자리는 반드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읽은 누가복음 14장 23절에 있는 말씀을 선교 강령으로 채택합니다.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이것이 313년 이후 지금까지 내려오는 기독교 선교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선교 강령은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많은 부작용도 초래했습니다. 억지로 끌고 오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끌고 오기 위해서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가장 크고 부끄러운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지역이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했던지, 종교개혁을 하면서 마르틴 루터는 이 23절에 있는 말씀, 나가서 억지로라도 데려다 내 집을 채우라는 이 말씀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한 사람들로 교회의 자리를 채우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카톨릭교회에는 이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나가서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라는 것이 오래된 선교강령으로 지켜집니다. 억지로 데려다가 채워야 할 이유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잔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잔치는 충만하게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억지로 데려다 채우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했든 집은 채워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억지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결단하고 온 사람들로 채워야 합니다. 왜 채워야 합니까? 제가 최근의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1월 1일부터 시작해서 6월 말까지 우리 교회에서 치른 장례식을 헤아려 봤더니 열 일곱 회나 되었습니다. 아주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가셨습니다. 장례식에 참여하고, 어떤 경우는 입관할 때에도 가족과 함께 보고, 또 하관식 때도 가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 가시는 분! 유한한 시간을 마치고 가시는구나. 이분의 삶에 주어진 영원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과 분리되는구나. 우리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유한한 시간 안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전부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마는구나. 돈을 주고 할 수 있는 일, 인간이 의술로서 할 수 있는 일,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유한한 시간대의 삶은 이걸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깁니다. 그러면서 시신 앞에서 혹은 장례식을 집전하기 전에 “그럼 우리한테 약속하신 영원한 시간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서 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은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유한 가운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유한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당신의 영원을 심어놓으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영과 육의 이원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시간과 영혼의 분리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유한과 무한의 분리, 시간과 영혼의 단절, 그리고 그 단절 속에 있는 슬픔, 아픔, 이것을 주님 가져가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에서 유한한 시간의 역사가 끝이 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 권한 밖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곧 영원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둘을 연결해 주십시오.”
시간과 영혼의 만남은 반드시 시간과 영혼의 단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역설이지만 진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마감된 시간의 끝과 부활에서 시작된 영원의 시작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로 이어집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연결입니다. 장례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이 새로운 연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은 가족들과 이별의 아픔을 나누고, 동시에 나도 언젠가 이렇게 떠나겠구나 생각하면서 시간과 영혼의 분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가신 것입니다. 돌아가신 그분처럼 내가 그 관 속에 누울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으로 장례식에 임했습니다.

사실 장례식에서 제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오신 여러분의 눈과 표정을 보면서, 장례식에 한번 가주자, 참석해주자, 눈도장 찍자, 그렇게 오신 분들이 한 분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유가족들이 당하는 슬픔을 서로 분점하자. 서로 나누어 가지자. 나도 바로 이런 죽은 자가 될 수 있다. 이 분의 죽음과 나의 삶이 언젠가는 같은 운명 속에 만날 수 있다. 이것은 나와 무관한 객관적 사건이 아니고 내가 관여되어 있는 주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슬픔을 나눈다. 서로를 위로한다. 함께 우리 자신을 영원 속에 맡긴다.” 저는 장례식에 참여한 분들의 눈에서 이런 결단을 엿보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둘러선 장례식은 그야말로 자리가 채워진 장례식입니다.
자리를 다 채워졌다는 것은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오늘 읽은 서신서,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 신성이 들어왔는데, 골로새서 기자의 고백입니다, 그걸 이름하여 충만이라 합니다. 충만은 많은 물건을 사 놓아야 충만이 아니고, 인간의 예지를 많이 찾아서 쌓아 놓아야 충만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업적 속에, 인간의 가슴속에, 성실 속에 하나님의 심성이 임하시면 그때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하라는 말은 이 충만에 동참하라는 요청입니다. 충만에 동참하면 우리는 주객구조를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단지 초대받은 손님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여러분, 우리는 오늘 경동교회에 손님으로 온 게 아닙니다. 이 자리는 손님들이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는 하나님의 심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충만을 여러분이 가져가십시오.
성서에서는 “친교”라는 말을 “코이노니아”라고 표현합니다. 코이노니아는,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일과,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친교를 나누는 일 두 가지를 가리킵니다. 코이노니아의 의미를 무슨 말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친교, 아주 부족한 말입니다. 화해, 그것도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원래 뜻에 가장 가깝게 말하면 제가 보기에 분점(分占)입니다.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충만한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 가져가시라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이 이 코이노니아란 말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제가 보기에 여러 번역 중에 가장 근접한 번역은 take part 입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part를, 분량을 take 한다,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동참하고 성만찬에 동참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참가해주고 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고 그것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그 신성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약함을 먹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성을 먹습니다. 서로 먹습니다. 그렇게 take part 하거나 part take 하는 것, 그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여기에는 주와 객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더러 와서 내 잔치에 동참해달라, 자리 채워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잔치는 내 것이 아니고 여러분과 함께 하는 잔치니 여러분이 직접 각각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부한다면, 그분은 본래 초청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 잔치자리를 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불러들이실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하늘나라 잔치는 예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입니다. 거기에 참석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참석해주느라고 예배에 나오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손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 잔치는 여러분 각자의 잔치입니다. 혼자서만 즐길 수는 없지만 여러분 각자가 한몫을 차지하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의 몫을 남겨놓지 말고 가져가십시오. 여러분이 잔치자리를 채우십시오. 하나님의 충만을, 신성을 가져가시고, 인성도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무데서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신성을 주셔서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셨으니, 그것을 충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잔칫상이 차려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잔치를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하늘나라 잔칫상을 여러분이 차지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이 잔치에 공동 주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고통을 지고, 우리 인간의 모든 고난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고난을 위로하는 잔치에 여러분이 참석하셔서 고난을 함께 나눠 가지십시오. 이미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심으로써 여러분의 짐이 가벼워졌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의 유한한 시간을 극복하시고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여러분에게 주셨으니, 여러분은 이렇게 주신 복의 잔을 기쁨으로 마십시오.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우리와 나누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자신을 나눕니다. 서로 나눌 수 있는 주체적 참여를 통한 잔치, 이 잔치가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진 잔치입니다.
7월 첫 주일 우리는 성만찬으로 이 달을 시작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분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배도, 일상생활도, 우리의 가정도, 사회도 잔칫상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성만찬 잔치상에서 함께 나눕니다. 그 잔치에서 우리는 손님이 아닙니다. 공동의 주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참하는 주인입니다. 충만을 채우고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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