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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과 술법 / 출 7:20-25, 행 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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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술법 ( 출 7:20-25, 행 8:9-13 )

 
우리 교회의 창립 108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개화기에 우리 교회를 설립케 하시고 민족을 깨우며 복음을 심는 교회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장래에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비추는 빛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비쳐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110주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10주년에는 기념 행사도 기념 사업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큰 행사는 없지만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마 불교에서는 108주년이 되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거창한 행사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동안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귀로 듣고, 손을 만졌습니다. 역사에 개입한 하나님을 느끼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느끼는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사제는 "인간은 온전하게 눈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보고 분별력을 가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아동발달 분야의 권위자인 아놀드 게젤 박사는 "어린이는 한 쌍의 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시각 세계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 세계는 직접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만의 창조이다"라고 합니다. 눈은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분별력을 주는 기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퍼센트는 눈을 통하여 인지됩니다. 지금도 대부분이 활자화된 언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귀도 중요한 분별력을 주는 기관입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분별력이 있고 판단력 있게 귀를 기울이고 누구의 말을 들을 것인지 주의 깊게 선택하는 것이 지혜의 본질입니다.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를 분별하여 듣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에덴 동산의 어리석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거짓말을 참으로 믿은 것입니다. 진리 대신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분별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최초로 지은 죄입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 곧 죄입니다.

손도 분별력을 주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병아리 감별사의 손은 분별력이 발달해야 합니다. 병아리 감별은 손이 발달한 한국인이 최고라고 합니다. 수박이 잘 익었는지 두드려 보는 솜씨도 세계 최고입니다. 새끼손가락은 한국 어머니의 온도계라고 불립니다. 탕약은 새끼손가락으로 온도를 측정합니다. 그 외에 체감으로 분별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온 몸은 분별력을 주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영 분별의 신앙적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기적과 속임수를 분별해야 합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속임수는 마귀의 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는 기적이 아닌 것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지팡이로 나일강을 쳤을 때에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였습니다. 왜 피로 변하게 하였을까요? 첫째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로가 아침에 나일강에 제사하러 갔을 때에 나일강에 대한 제사를 막으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애굽인들이 무고한 히브리인들의 아이들의 피로 나일강을 물들였기 때문에 이를 갚으신 것입니다. 이전에 모세가 태어날 때 수많은 아이들이 나일강에서 죽었습니다. 이 피 값을 하나님은 바로에게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로버트 몰간은 '홍해의 법칙'이란 책에서 "적은 인식하라, 그러나 두 눈은 주님을 주시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확실하게 생깁니다. 모세는 지금 바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분별력의 뿌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힘의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하수를 치자 피로 변하였습니다.

지팡이는 그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졌던 지팡이입니다. 던질 때 뱀이 되었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갈 때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새로운 능력으로 힘입어 가지고 갔습니다. 그 지팡이만 있어도 얼마든지 기적을 행합니다. 그 지팡이만 있어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만능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손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손에 없는 그 이상의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이나 칼이 아니라 물 맷돌 5개만 가지고도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한 소년이 가지고 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만 가지고도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2:3에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지나친 생각이나 과욕을 가지지 말고 자신의 분량대로만 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2:3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특히 교회는 허영으로 해서 될 일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하는 일에 기적은 나타납니다. "물과 은혜는 낮은 곳에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낮출 때에 은혜는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4:17에서 말씀하신대로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적을 지팡이에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을 베풀 때에 그의 종 게하시가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아이의 얼굴에 놓고 엘리사가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지팡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기적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을 지팡이를 통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일 강이 더 이상 축복의 강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자의 최후는 이같이 비참합니다. 바로 때문에 물이 피로 변하였습니다. 꼭 같은 강이지만 이전의 강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죽은 강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사람 때문에 강이 저주를 받습니다. 꼭 같은 피지만 보혈의 피 곧 생명일 수도 있고 사망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두노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이는 복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저주를 선택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사망을 선택합니다. 꼭 같은 지팡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적의 지팡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저주의 지팡이입니다. 꼭 같은 물이지만 포도주가 되고 피가 됩니다. 꼭 같은 피지만 생명일 수도 있고 사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있는 지팡이가 이적의 지팡이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들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손에 있는 지팡이에 생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술객들도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술객들도 모세가 한 것처럼 물이 피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미 물이 다 피가 되었는데 피가 되게 할 물이 더 남아 있었을까요? 이미 자기 나라 물이 다 피가 되었는데 또 피를 만들면 업친데 덥친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피를 물로 만들어야지 옳지 않겠습니까? 술객들은 그냥 술법으로 모세를 대적하여 물이 피가 되게 하는데 급급했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술법을 행했던 술객들은 다시 모세의 이적처럼 물이 피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흉내내고, 유사하게 하는 것은 술객들도 얼마든지 합니다. 예로부터 기적을 흉내내고, 능력을 눈가림으로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유사하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그래도 인기 있으려면 모창이나 성대묘사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합디다. 자기의 것 가지고 살기도 바쁜데 웬 남의 것을 흉내내고 살아야 인기가 있습니까? 참 이상한 세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시몬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다 책망을 받습니다. 은사를 돈으로 사고 흉내내려고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잠언 21:30은 경고합니다.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술객들의 술법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는 마술사들은 누구입니까? 세상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 세상 명예로 치부하는 사람들, 진리에 무관심한 자들이 이런 마술사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속이는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현대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미래 공학이라고 일컫는 생명공학이 우리 영혼을 속이고 있습니다. 최첨단의 가상공간이 정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 때문에 우리 영혼이 방해받고 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혼돈되고 있습니다. 진리를 오도하는 것들이 세상에 즐비합니다. 왜 사람들에게 분별력이 없습니까? 마음에 의심하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인간의 끝없는 마음의 욕심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의심은 마음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마음의 교만입니다. 로마서 16:20에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종래 사단을 우리 발아래 굴복하게 하시고 승리하십니다. 특히 미래 사회는 사특한 영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 그릇된 영의 타겟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성으로 훈련하고 우리 스스로가 분별력을 가지고 유혹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성훈련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합니다. 영이 어디 속하였나 시험하여 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영을 따르기 쉬운 시대입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는 또 속았습니다. 자신의 술객들이 모세와 아론과 동등한 술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는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술객들이 술법이 하나님의 기적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이 점점 더 강퍅케 되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진 까닭은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점점 강퍅해집니다. 말씀을 거부하면 점점 더 완고해집니다. 말씀은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면 열매맺는 부드러운 땅이 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약간 아는 것보다 사람을 더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별력 없이 어설프게 아는 것이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설픔 때문에 사람은 오히려 더 고집스러워집니다. 영성신학자 토마스 머턴은 "분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하였습니다. 분별력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분별력은 하나님의 은사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3:9에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혜란 분별의 은사입니다. 로마서 12:2에서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분별의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열거하면서 능력, 예언, 방언, 방언통역 등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 2:13). 신령한 은사를 가져야 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성경 사무엘상 25장에는 나발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었는데 성경은 그녀를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나발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라고 다윗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을 영접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루는 아비가일은 나발을 위하여 왕에게 하듯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발이 잔치에서 술을 마시고 많이 취한 다음 날 아침에 아비가일은 나발이 포도주가 깬 다음 소상히 다윗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후에 나발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나발의 몸이 굳어져 돌과 같이 되어 열흘만에 죽었습니다. 나발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놀라 열흘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굳어지면 죽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고해지면 자기 풀에 자기가 죽습니다. 몸도 마음도 부드러워야 오래 삽니다. 나발은 분별력이 없이 완고한 마음으로 다윗을 몰라주고, 도와주지 않고, 자신의 재산만 축내지 않으려고 탐하다가 결국 몸이 돌같이 되어 죽었습니다. 마음이 돌 같으니 몸이 돌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가일은 다릅니다. 다윗 어떻게 될 것인가, 시대가 어떻게 되는가, 민심이 어디로 기울고 있는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상황을 간파하고 남편 몰래 다윗을 영접하여 피흘림을 면하였습니다. 이런 분별력이 유연한 마음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있는 마음이 가족을 살렸고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완고하고 강퍅하고 돌 같은 마음은 결국 몸이 돌같이 됩니다.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는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 부드럽고, 자신에게 돌 같고, 남에게 물 같은 유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한 주간의 삶이 말씀을 묵상하고, 강퍅하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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