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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적인 교회개혁 / 합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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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적인 교회개혁
하박국 2장 3~4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로마서 1장 16~17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0~21절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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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83년 전 1517년 , 10월 31일이었습니다. 13년 전에 제가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만, 독일의 비텐베르크 적은 도시입니다. 그 도시의 북쪽 문에 마틴 루터라는 젊은 사람이 교회에 대한 95개조의 항의문을 붙였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폭발된 종교 개혁은 거대한, 유럽전체 교회를 움직이고, 유럽 전체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큰 개혁인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주의를 생각하면서 마틴 루터라는 정의감이 아주 강하고 힘센 젊은 사람이 부패한 유럽의 교회들, 썩은 교회들을 보고서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이렇게 역사가 바뀌어졌다 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개혁자인 루터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2살 되던 때에 자기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같이 가던 친구가 즉사를 합니다. 그것이 루터에게 가장 큰 충격이 됩니다. 루터는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의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써 놓은 글을 읽어보면, 나는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에 대한 심판을 두려움으로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세웠다. 라고 썼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서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이 죄에서 벗어나려고 별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자기의 죄 의식은 점점 더 깊어 가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온 몸이 타 버려서 재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생활을 10년을 하고 나서 1519년 3월 그는 교수로서 로마서 강의를 하다가 오늘에 이르는 롬 15장 7절을 설교하다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라는 구절을 읽다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에 나타났다는 구절보다는,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렇게 무섭고 떨렸습니다. 결국에 하나님의 의..용서를 못하고 심판을 행하는 하나님! 자기의 외아들을 못 박혀 죽이시는 하나님의 의, 그것으로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으면서 그 글을 계속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결국 그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음을 확인하며 오늘 읽은 구약 하바국 서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라는 구절을 보면서 , 그는 그 때의 상황을 쓴 글을 보면 “가슴이 막 뜨거워지기 시작하다가 지금까지 자기를 짓누르던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심이 갑자기 부러지면서 바로 그 때 태어난 기쁨으로 내 온몸이 떨리면서 기쁨을 가득히 차있었다”라고 루터가 말합니다. 이것은 루터가 2번째 맞은 벼락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심판이 아닌 해방의 벼락이었습니다. “ 그래서 여기에서 그렇게 두려워하던 하나님의 의란 말은 바로 아들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아버지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서 죽음의 모든 곳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그 심판을 받은 그 기쁜 소식, 복음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루터는 아주 딴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 때까지 루터는 학자로서, 신학을 성서를 가르치는 교수였지만, 그 때까지 로마서를 수십번 가르쳐왔지만 그렇게 그것이 자기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이 때부터는 성서가 자기를 아주 딴 사람으로 바꾸어버렸다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 해방을 받은 복음의 믿음을 얻은 루터에게 있어서는 , 사도 바울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워온, 율법 공동체인 그 교회, 신도를 자기처럼 공포로 몰아넣는 그 율법 공동체의 교회를 그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나약하고 겁많은 루터는 이 교회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해서 일어난 것이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 개혁기념주의를 우리 기독교 신도들은 이 썩은 사회를, 이 부패한 정치를 목숨을 걸고 뜯어 고쳐야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서는 안되고 바로 루터와 같이 이 두 번 째 벼락을 경험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즉 종교 개혁기념주일을 맞이하는 이 때에, 바로 이것이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소위 거듭남, 새롭게 태어나는. 바로 이런 경험을 우리가 먼저 가져야한다는 것을 그러한 이야기를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이제는 제 나이가 80이 넘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해도 여러분도 양해를 하고 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 자신도 이와 똑같이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6.25사변이라는 무서운 사건이 저에게 있어서 6.25사건이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종해버린 것이고, 존경하던 목사들, 신도들이 보통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이 다 소멸해버린 그러한 사회 속에서 저는 이것을 경험하면서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갈등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죄에 대한 하나의 공포와 갈등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저는 설교를 할 수 없고, 학생 운동을 하던 때입니다만, 학생 운동도 할 수 없어서 결국에 이 피난지 부산에서 가족을 뒤에 두고서 군인 수송기를 타고 카나다에 갔습니다. 캐나다에 간 이후에도 , 이 고통은 나를 짓누르고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제 키가 175cm 이었는데, 제 몸무게가 53kg 까지 떨어졌습니다. 잠은 잘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다가 폴-틸리히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다가 그가 쓴 책에 “you are accepted"라는 ‘너는 받아들여졌다’라는 그 글을 읽다가 나 자신을 그토록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이 거기에서부터 떨어지고 풀려나서 바로 그 때의 제 기쁨은 제가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고통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던 이 글을 읽고서 저 자신은 이 기쁨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 자신이 경험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교회와 심판이, 이것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깨닫고, 그것은 다만 십자가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서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율법에서 해방을 경험하는 것 ,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 “Good News"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심지어 순복음 교회도 있습니다만, 얼마나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율법에서 해방을 받은 신도의 눈에는 율법으로 굳어진 불쌍한 기독교인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 그리고 이렇게 굳어져버린 사회! 이것이 새롭게 환히 눈에 보이게 되고 이것을 보는 눈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의욕에 불타버리게 되는 것! 그래서 이런 하나의 신앙은 여기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개혁으로, 자기의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교회가 어떠한 율법이 아닌 복음에 의해서 해방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러한 하나의 자유인들이 모이는 곳이 과연 교회가 되고 있는가? 이러한 점이 오늘도 문제가 됩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도,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 , 그런 것이 특징은 어떻게 되어지는가 하면 그 신도들과 교회가 하나의 인습화합니다. 모든 것이 습관화됩니다. 그래서 결국에 모든 것이 모든 행동이나 살아가는 것이 미래를 향해서 달음질치는 선을 행해가는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생활을 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 율법 공동체 교회 모습입니다. 작년도에 행했던 것과 오늘에 행하는 것이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고, 5년 전에 내가 살던 상황방식과 오늘의 생활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 없고 10년전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태도. 오늘도 그것으로 돌고 돌고 살아가면 그것이 결국엔 해방 받지 못한 율법에 매여 사는 인간들! 그러한 하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되는 것..그것은 결국 닫혀지고 굳어진 병든 인간들의 집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크리스천과 교회의 징표는 무엇인가? 부단히 새로워 지는 것, 그것은 부단히 그 교회가 개혁되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째로 , 종교 개혁 기념주의를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되는 것은 1517년 483년 유럽에서 일어났던 개혁파 교회, 그 교회가 정말로 그 이후에 개혁파 교회가 다시 굳어진 경직된 율법적인 교회가 되어버리고, 일종의 저항하는 교회가 아닌 그러한 저항 없는 교회가 되어버린, 그러한 하나의 그 교회가 역시 개혁파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는 300여 교파를 나누어지고 , 이 율법화 되어버린 교회는 결국에 카톨릭 교회처럼 십자군을 조직하지 않았지만, 제국주의 집단의 앞장이가 되어서 , 일종의 선교활동을 제 3세계에서 하는 교회로 전락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에도 우리가 루터가 한 것을 그대로 본 받고 살아가기 위해서 종교개혁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루터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믿음으로만!”이라는 주장으로 교회를 개혁한 것은 100번 옳았지만, 교황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고, 절대 무오의 교황을 물리치고 난 그 빈 자리에 무엇을 가져다 놓았냐 하면 성서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서 무오설, 성서만이 권위를 가지는 것, 결국에 율법을 내쫓은 자리에 하나의 도덕이 없는 무규범 사회를 놓을 수 없으니 그 율법의 자리에 양심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양심 지침서, 결국 이 성서를 절대적 성서로 보게 하는데 이 성서는, 다시 이 성서가 말하자면, 살아서 인간인 교황이 종이 조각으로 기록된 책이 교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에 양심의 지침서는 신도들에게 새로운 율법 주의를 만들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개신교회는 다시 율법 공동체로 전락해버리면서, 그것을 개신교로 부르기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대에 제 2차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새로운 개신교인에 개혁운동이 생기는데 , 저는 그것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보입니다. 즉 그 운동에서 모인 단체가 세계 교회 협의회 운동인 것입니다. 제가 1954년부터 제가 계속 관계를 해오다가 은퇴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 자리에 우리 박목사님이 다시 그 자리에 들어가서 우리 한국교회를 대표한 중앙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이 오늘 두 번째로 일어난 개신교의 개혁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에 한국의 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세워놓은 교회는, 성서 절대 무오설이라는 이 신학을 가지고서 처음부터 굳어진 교회였습니다. 율법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이 이것이 바로 우리 젊은이들이 세운 경동교회가 개혁운동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신학으로서는 김재준 목사님의 신 정통주의 신학이 굳어진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의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50년대 초에 기독교 장로회가 그래서 생겨졌습니다. 그래서 ‘기장’은 한국 개혁파에 새로운 개혁을 한 개혁파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기장도 70년대 이후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율법 공동체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2000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2000년 은 역사의 대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철저한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개혁운동이 루터가 경험한 두 번째 벼락을 맞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지는 때, 이것은 하나의 사회 정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굳어진 또 다른 하나의 율법 공동체가 되어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율법이 아닌 복음이, 해방 받은 사람들이 비젼을 가진 이러한 하나의 개혁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모여서.. 이런 신앙이 밖으로 하나의 외연 작용으로 나가 일어난 개혁운동이 진정한 기독교 개혁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이 시간에 생각하면서, 이 루터가 경험한 진노하는 심판하는 하나님. 아직도 우리의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러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도와 목사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심판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가 그것을 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이 이룬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을 읽는 바로 이 신약성서를 통해서 읽지 않은 구약성서는 우리가 다시 율법주의, 하나의 유대교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 핵심이 하나님이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곧 사랑의 하나님! 곧 야웨라는 이름을 잘못하면 돌로 맞아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던 “아빠‘라고 부르던 하나님, 이 하나님은 신약성서에서 사랑의 하나님입니시다. 그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그 사랑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 사랑을 우리가 환히 알 수 있게된 것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그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를 거듭나게 된 것으로부터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도, 그들의 신도 공동체인 교회.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는 징조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그것은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완전히 해방을 받은 자유인! 이것이 크리스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닫혀진 인간이 아니라 열려진 인간.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인간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인간,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의 교회가 열린 교회요! 부단히 앞을 향해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태양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체질로 바뀐 신도들과 교회! 이러한 사람들의 눈이 무엇을 보게 됩니까? 바로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죽어 가는 생명체들이 우리의 눈에 안 보일 수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동물들과 식물들이 다 죽어가고, 남북극의 빙산이 다 녹아가고 그래서, 전 생태계가 도랑 되고, 불과 50년이 못되어서 이 지구상에 모든 생물이 모두 없어질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여기에 함께 살면서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도 살게 되는 그러한 속에 살게되는 사회! 인간성이라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부패되어버린 이 사회! 굳어져버린 정치, 이러한 상황 속에서 , 남북간에 50년 이상 되어버린 분단.. 그러한 비참한 사회가 우리의 눈앞에 무엇으로 보여야합니까? 라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누가 복음 말은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사는 신도와 교회는 서말 가루 속에 들어가는 누룩처럼 이 썩고 낡은 체제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개혁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5절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하는 모든 것으로 나날히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오질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위에 실현될 그 날까지 우리는 항상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만드는 계속적인 개혁을 하는 신도와 교회가 되기 위해서. 그 동력이 되는 그 믿음,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나의 삶 속에 깊숙히 들어와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그러한 하나의 삶!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 루터가 경험한 두 번째 벼락을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함께 경험함으로써 개혁의 선도에 달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전진하는 교회와 신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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