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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땅의 기회와 하늘의 섭리 / 에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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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기회와 하늘의 섭리
에스더 7장 1~6절

왕과 하만은 에스더 왕후가 차린 잔치에 함께 갔다. 둘째 날에도 술을 마시면서 왕이 물었다. "에스더 왕후, 당신의 간청이 무엇이오? 내가 다 들어주겠소. 당신의 소청이 무엇이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에스더 왕후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내가 임금님께 은혜를 입었고, 임금님께서 나를 어여삐 여기시면, 나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간청입니다. 나의 겨레를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소청입니다. 나와 내 겨레가 팔려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살육당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종이나 여종으로 팔려 가기만 하여도,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한 일로 임금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 왕후에게 물었다. "그자가 누구요? 감히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자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 밝히시오." 에스더가 대답하였다. "그 대적, 그 원수는 바로 이 흉악한 하만입니다." 에스더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하만은 왕과 왕후 앞에서 사색이 되었다.

야고보서 3장 13~18절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마가복음 9장 42~50절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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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약 성경에 아주 고전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에스더에 관한 이야깁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 보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스더라는 여자는 어릴 적에 부모를 잃었습니다. 요즘말로 고아입니다. 이 에스더라는 여자에게 나이가 많이든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촌인 그는 에스더가 불쌍해서, 즉 친권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에스더를 자기 호적에 입적 시킵니다. 양녀로 만들었습니다. 워낙에 인물로 빼어나고, 마음씨도 좋아서 결국 에스더가 페르샤의 왕의 아하수왕의 왕비가 됩니다. 엄청난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덕택에 모르드개는 성문의 성문 지기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취직해서 성문 지기를 하는 동안, 당시 내시 2사람이 왕의 암살 음모를 꾸미는 것을 적발하고 그 사람을 직고해준 덕택에 요즘 말로 경호 실장 자리로 등극을 합니다. 그 때에 페르샤의 주도 세력중의 하나인 '하만'이라는 사람이 총리대신이 되어서 이제 정치를 합니다. 하는 중에 모르드개나 에스더를 중심으로 한 피난민 출신 유대인들과 요즘말로 권력의 중심인 사람과는 차이가 맣아서 하만은 에스더는 물론 모르드개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을 학살할 계획을 꾸밉니다. 이 계획 속에서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에스더가 마지막 잔치향을 베풀어서 왕에게 호소하려고 합니다. 엄청난 잔치를 베풀고 왕을 초대했고 하만이라는 총리도 같이 초대합니다. 거기서 모든 미적인 냄새를 풍기면서 에스더가 왕에게 호소를 합니다. "왕이시여 제 소원 하나 들어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가? 그대의 소원이라면 이 나라의 절반까지도 떼어줄 용의가 있다!" 왕이 잘못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 한 번 이야기한 왕의 말은 법적으로 지켜져야합니다. 에스더가 말하기를 "하만을 비롯해서, 이 원수와 같은 하만이 중심이 되어서 나와 내 아버지와 유대 민족 전체를 몰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를 구해주십시오. 이 민족을 구해주십시오!" 왕이 화가 나서 "하만을 처형하라!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축복을 주어라!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만을 처단할까요? 하만의 집에 무엇이 있더냐? 하만의 집에 높은 장대를 내어놓고 상징적인 행위로 에스더의 아버지인 모르드개를 장대에 목메달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만든 하만을 그 장대에 메달아 죽게하라 !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이고, 인과응보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을 압살하기 위해서 아주 계략적으로 얻은 기회를 하만은 놓쳤을뿐만 아니라 그 계획 속에 하늘의 뜻이 담기지 않아서 자신이 만든 장대에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계략 중에 사람의 계획중에 우리가 가진 기회 속에 하늘의 뜻과 섭리가 있지 않다면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아주 고전적인 있습니다.

17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인 아주 악랄하기로 유명한 마리 앙뚜안느가 얼마나 폭정을 했던지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 단두대의 이름이 우리가 아는 '기어띤'이라는 단두대입니다. 알려지기로는 이 단두대가 의사 이름 '기어땡'이라는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그 '기어띤'에 의사 '기어땡'이 처음 죽었다는 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전설일뿐 확인된 근거나는 없습니다. 다만 루이 16세는 수많은 사람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공화정을 시행하겠다는 로베스 삐엘도 수많은 사람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루이 16세와 앙뚜안느도 이 '기어띤'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물론 로베스 삐엘도 이 '기어띤'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역설입니까? 아니면 인과응보입니까? 하늘의 뜻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17세기를 넘어서 제가 20세기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라는 도시를 방문하였습니다. 사우레스크라는 독재자가 지었다는 인민 궁전은 방문했는데 너무 화려해서 제가 설명을 못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홀의 길이가 대리석으로 지어진 1km입니다. 온갖 호화는 채려 놓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인민 궁전보다는 더 화려해야합니다. 그래서 13억 달러를 들어서 이 궁전을 지었는데, 마침 다 완성하지 못하고, 사우테스크와 그의 아내가 총살을 당한 사건! 그것이 동구권의 무너질 무렵 발생한 루마니아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우테스크가 이 인민 궁전을 지어놓고 12월달에 완성이 되면, 첫 호화로운 방에서 제 1차 공산당 중앙 위원회를 열기로 하고, 인민 궁전의 공사를 서둘렀습니다. 12월이 되면 이 위원회가 열려야합니다. 11월 달에, 함성을 지르는 민중들의 손에 이끌리어 이 사우테스크가 결국 총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이 계획했던 12월 초, 즉 1990 년 12월 10일중앙 위원회는 열리지 않고 똑같은 방에서 유엔 인권 위원회가 열렸습니다. 결의가 무엇인가 하면 "사우테스크는 총살로 사라졌다. 그 치하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고 죽었던 사람들에 대한 복권회의가 그 자리에서 있었습니다. "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끼오띤에서 죽이려는 사람이 거기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나 , 공산당 중앙 위원회가 대신에 유엔 인권회의가 열리는 것이나,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은 사람의 생각과는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상하지만, 하늘의 뜻이라 생각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사람들의 2주일 동안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TV나 신문 사진을 보면은 , 아프리카 소말리와 같은 곳에서 너무나 먹을 것이 수많은 군중, 빼빼 마른 군중이 그릇UN이 나누어주는 식량을 받기 위해서 , 국한그릇 받아먹기 위해서 줄을 엄청난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배고파합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당시 먹어야합니다.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먹을 것 없이는 인생의 행복이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먹지 못하면 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에티프롬 말대로,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어야 하는 욕망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결핍이라는 상황 속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고 먹고 나서야 비로서 쾌락이라는 만족과 행복이 생깁니다. 길이 굉장이 널려 늘어섰습니다. 큰 대회를 서울에서, 지방에서 하게 되면, 또 다른 줄이 생깁니다. 뷔페 식당이 차려집니다. 그 곳에 들르려고 대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이 쫙 줄을 늘어섭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배고픈 사람이 아닙니다. 뷔페에 가면 자기가 선택해야할 것이 많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되는데, 그것도 국 한 그릇을 주는 대로 먹기위한 선택이 아니라 마음대로 선택을 해야합니다. 취향과 미각에 따라, 음악을 감상하듯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감상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 택합니다. 설령 못 먹었더라도 스트레스와 긴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이라는 이름하는 하나의 사건과 식욕이라는 사건과는 다릅니다. 인사부터 다릅니다. 저는 배워온 인사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을 초청해놓고 ,제가 초청을 받아도 흔히 하는 인사 "많이 드십시오!' 이것은 소말리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뷔페에 통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인사해야하나면, "맛있게 드십시오 !" 배고플때는 많이 들어야하지만, 미식가가 많이 모인 우리 경동교회같은 곳에서는 '맛있게 드십시오!,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맛있게 드십시요!라는 인사가 인간의 상식이 되는 사회를 '많이 먹어야 살겠다고 외치는 소말리아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많이 먹는 시대를 끝나고 맛있게 선택해서 먹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주는 기회가 무엇이고, 이 시대가 주는 축복과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안보 보좌관을 지내었던 브레제 제스킨이 'Out of control'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미국 사회는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자유 분방한 사회라는 뜻입니다. 1993년에 썼습니다. 제가 책을 읽어보았더니 그 책에는 "나는 폴란드에서 이민와서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미국사회는 제한이 없는 무엇이나 허용되는 풍요한 사회! 바로 그것입니다." 쓰여있습니다.

제가 미국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나라는 엄청나게 풍부하다. 먹을 것이 너무도 많다. 땅도, 자원도 너무나 풍부하다. 그런데 이렇게 풍부한 나라에서 거지가 있을까? 왜 이렇게 가난할까?' 이것은 저의 의문입니다만 하여간 미국 사회는 너무나 많고 풍요하다. 너무나 많은 것이 있어서 누구나 욕망을 충족할 수 있기에 모든 것이 똑같이 선하다는 사고 방식이 있습니다. 강제!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정 ! 필요없습니다! 자기 욕구 충족, 그것이 최고의 사회적 ,도덕적 규범입니다. 단 이 사람하는 말이 , 풍요한 사회 속에 빈곤이 있습니다. 그 빈곤이란 자기 생각으로는 우리 미국 사람들은 너무나 풍요하고, 너무나 자족하고, 너무나 기회가 많다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필요가 아니라,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 법에 옳으냐? 안 옳으냐? 하는 것만이 사회적 규범인 것 같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신앙이 종교가 필요할텐데 , 법조문에 옳으냐 안 맞냐? 동기를 묻지 않고, 행위 자체의 객관적 규범을 묻다 보니 종교대신, 신앙대신 법적, 합법적인 법과 질서만 사회에서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풍요 속에 빈곤이라 하면, 물질적 풍요속에 도덕적 공백이 생겼습니다. 지식과, 정보의 풍만한 흐름 속에 도덕적 무감각이 생겼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영적 공허함이 지배합니다. 도덕적 공백, 도덕적 그것이 풍요속의 빈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비판이 얼마나 옳은지는 미국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우리 조국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비판이 반드시 어디 미국만의 비판이겠습니까? 우리 속에 있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하늘의 뜻은, 우리의 가지고 있는 도덕은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 모두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바람'이라 이름하는 특이한 체질이 있습니다. 그 체질이라 하면, 자율성이 최대한 반영되고, 억압이 아니라 감동으로, 감독에서가 아니라 의분에서, 스스로 발동이 걸리면, 감동하고 의분이 나면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최대한 발휘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처럼 창의려과 예술적 잠재 능려과 인내와 끈기가 한꺼번에 발휘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빨리 빨리 말입니다. 정보화 시대에 맞는 빨리 빨리 사고 방식이 여기에 적용되면 우리는 신바람을 굉장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이 신바람 기질이 우리의 특징입니다.

미국의 공백만이 아니라, 신바람 기질 속에 한 가지 모자란 굉장히 못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것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부정과 부패가 너무 큽니다. 너무나 그 고리가 두껍고 깊습니다. 공중 도덕은 없습니다. 개인의 축복은 있으나 공동 도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빨리빨리와 신바람을 개별로 하다보니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도덕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개인주의를 숭상하는 서구 사회보다 집단주의를 숭상하는 동양이 오히려 도덕 질서가 없습니다. 이 질서 속에는 하늘의 공생도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아름다운 해후의 장면도 보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갈수록 풍요는 더해 가는데 그 풍요 속에 정식적, 영적 ,사회적, 집단적 도덕과 상생은 고갈되어 갑니다.

하늘과 땅이 해후를 하면 반드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 있으면 그 속에선 새로운 역사가 창출됩니다. 만나면 반드시 대화가 있으면 삶이 있습니다. 삶이 있으면 공생이라는 축복이 이어집니다. 만남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어느 분이 이럼 말을 했습니다. '교회란 무어라 하면 , 하늘과 땅의 만남을 주선하는 장소입니다. 만남의 장소가 없이 축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을 가장 깊이 넓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과 땅을 합친 실촌적 인물입니다. 하늘의 권세와 땅의 열쇠를 함께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이 몸 된 교회에 오시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기회와 그 기회 속에 담긴 하늘의 섭리를 함께 경험하는 곳이 교회이이고, 오늘의 예배입니다. 오늘의 찬양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 자체가, 바로 크리스마스요, 크리스마스가 오늘날의 교회 모태입니다. 교회에 오시면 신앙의 공동체에 오면 하늘을 만납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몸 속에 하늘의 섭리를 담는 일, 하늘의 섭리가 우리의 몸 속에서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 이것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 안으면, 껍질을 깨고 그 안에서 병아리가 깨어나옵니다. 껍질은 반드시 파괴되어야합니다. 그릇은 파괴되지만 그 속에서는 나오는 것은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물체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썩는다고 배웠습니다. 썩는 것은 씨앗의 껍질이지 그 속에 있는 알맹이는 나무로 자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변한 하늘이 이 땅에 임하면 그 하늘은 썩습니다. 그 하늘이 덮혀진 그릇이 이 세상이라 이름하는 육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계는 썩습니다. 썩는 육의 세계 속에서 하늘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새 생명이 나루로 성장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최고의 기회는 성경 말씀에 보면 인간이 가진 땅이 가진 최고의 상품은 십자가라 이름하는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기회를 잡고자 결심을 하는 순간 십자가는 우리의 그릇이 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기회가 됩니다.

왜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고통과 죽음의 기회를 주셨습니까? 십자가란 그릇 속에, 그 땅의 기회 속에 부활이라 이름하는 하늘의 섭리가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부활은 새 생명을 만드는 부활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그릇 속에서만 담겨집니다. 이 고통의 그릇을 마련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오면 십자가의 그릇 속에 부활의 영광의 섭리가 담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창출됨을 받습니다. 이것이 땅의 기회와 하늘의 섭리가 만나는 역설적 진실입니다. 이 진실 때문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오늘 마침 국군의 날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 역사 전체를 보면 순교자의 피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흘린 순교자의 피 위에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섰습니다. 십자가가 섰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 부활의 영광이 늘 임합니다. 우리의 선배들, 가족들, 수많은 국군에 가서 봉사한 모든 사람들이 흘린 희생의 핏덩이 위에 이 민족이 섰습니다. 이 분들이 흘린 핏덩이 속에 임한 하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이제 오늘, 분단 55주년을 맞는 지금, 국군의 날을 예전처럼 지내지 말고 새로운 결단을 해야합니다. 수많은 군이 흘린 피 위에 내리는 하늘의 섭리는 평화라 이름하는 하늘의 섭리입니다. 그래야, 이 민족이 구원을 받고 이 민족이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고 통일도 됩니다. 군이 흘린 피 속에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이 흘린 피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 속에 정의라 이름하고, 사랑이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를 선물로 여러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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