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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른 뼈들 / 겔 3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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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른 뼈들 (겔 37:9-10)

1부 통역 : 허종욱 교수
2부 통역 : 차동재 목사


  오늘 본문은 에스겔서의 거의 끝 부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 주시는 환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참한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 어떤 회복이 일어날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2막으로 이루어진 드라마 같습니다. 1막은 상황에 대한 분석입니다. 첫 부분인 37장 1절과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어떤 골짜기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뼈만 남아 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물어 보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수많은 마른 뼈들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 보입니다, 절망이 보입니다, 파괴가 보입니다, 나의 백성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뼈가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에스겔의 대답은 “좋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른 뼈는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제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에스겔처럼 “마른 뼈들만 보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부모가 함께 있는 정상적인 가정이 참 드뭅니다. 모든 대중매체는 도덕적으로 점점 더 타락해 가는 모습을 매일 전해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기업가들과 리더들이 부패로 인해 법정에 서고 있습니다. 마약의 문화를 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육 시스템을 봅니다. 이 세상이라는 계곡에서 저는 이런 해골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문화에 대해 비슷한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의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마른 뼈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곳에서 어떤 희망이 보이느냐? 뼈들이 모여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겠느냐?” 저는 이 때 에스겔의 대답이 명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는 영적인 대답을 하는 척 하면서 낙천적인 대답을 하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에스겔은 이런 얄팍한 대답을 하기에는 악한 것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 비관주의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죽이게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대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에스겔은 “전혀 희망이 안 보이는데요.”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3절에 보면 “주여, 오직 당신만 아십니다.” 오늘 날 세계의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 과연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위기로 치닫고 있는 여러분의 결혼 생활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뼈들이 능히 살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중동에서 또 오늘 아침 폭발 뉴스에 보셨던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직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에스겔의 대답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참 솔직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드라마는 2막으로 넘어 갑니다. 1막에서 분석을 했다면 이제 처방이 내려집니다. 4절에서 10절에 보면 이 메마른 뼈들에 어떻게 하면 생명이 임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공식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복잡하지 않고 단지 2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첫 단계는 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뭔가를 해 주어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 뼈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른 뼈들만 수북이 쌓여 있는 그런 황량한 골짜기에 서서 그 뼈들 앞에서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참 궁금합니다. 어리석은 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 뼈들은 다 죽어 말라버린 뼈들이고 그들은 들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참 이상한 명령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영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만 수북한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아, 좌우지간 말씀을 선포해라” “썩고 메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절망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쉽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명령하십니다. “그곳에서 그 뼈들에게 말씀을 전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에 그 뼈들이 움직이면서 합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뼈만 앙상한 상태로 합쳐지는 것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8절에 보니까 아주 중요한 각주가 있습니다. “그 뼈에 살이 오르고 힘줄이 생기며 피부가 덥혔지만 거기에 생명이 없었더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도, 또는 설교를 사용하시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악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다 전해도 거기에 아직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번째 명령을 내리십니다. 회복의 2단계입니다. “에스겔아, 이제는 그 뼈들에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령에게 말하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너는 이 마른 뼈들이 살도록 하나님의 영에게 기도해라.” 얼마나 중요한 단계입니까?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의 깨어진 가족과 부패한 사회에 우리의 힘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해 주십시오.” 오직 그 분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뼈들에게 말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른 뼈들을 다시 합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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