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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행복 자로다 / 신 3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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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는 행복 자로다
본문 : 신33:26-29

프랑스의 한 신부님이 "단순한 기쁨"이라는 자신의 책에 경험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등 모든 상황이 이러저러하여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 는 설명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구먼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나서 "그런데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도와 드리지요." 합의하에서 그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 때부터 신부님의 일을 돕기 시작합니다. 신부님은 집 없는 사람과 불쌍한 사람들을 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살았을까?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 같은 사람도 남을 도울 수가 있고 무엇보다도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찾았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하고는 자살하지 않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소원은 행복입니다. 예로부터"나는 행복한가?"하는 문제는 인간 실존의 문제입니다. 행복이 곧 내가 살고 죽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행복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며 노래 해보지만 끝내 다다르지 못할 지평선의 끝과 같은 것이 행복입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론" 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볼 줄 알고 밝게 생각할 줄 아는 정서가 먼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어둡게 보고 비참하게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 사람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부(富)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부에는 절대적인 부가 있고 상대적인 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인 부가 문제입니다. 사실 내가 가난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이 나 보다 낫기 때문에 내가 기분이 나빠서 못사는 것입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끼는 부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치관에서 나오는 느낌입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해 하는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F. D. 라 로슈프코라는 사람이 말하기를"사람들은 자기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기에 더 애를 쓴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스스로 만족하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려는 허영심 때문에 자기 앞에 있는 진짜 행복을 놓치는 수가 참으로 많다."고 했습니다. 남을 의식하는 행복은 결코 진정한 행복일 수가 없습니다. 얼마를 가졌던지 나는 나대로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그 지혜, 이 명랑한 정서를 가졌을 때, 비로소 그는 행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도 불행할 권리도 없습니다. 건강하면서도 불행을 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가 건강 할 때는 이것이 행복인 줄로 여기지 않다가 병원에 입원해 보세요. 그 때에 하는 말은 딱 한마디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건강 하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 할 때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참으로 건강은 소중합니다. 오늘 내가 건강하다면 행복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또 그런가 하면 세 번 째로는 정신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만족을 아는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한계를 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데서 찾아오는 정서적 평안입니다. 한끼의 식사를 하면서도 때때로"이만하면 행복하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 될 때 바로 그 마음이 행복인데 바로 "이만하다"는 것, 그 한계를 내가 정할 줄을 몰라요.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안달이고, 높아지면 더 높아지려고 목을 메는 이 사람은 영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없는 탐욕은 인간에게 지워진 영원한 족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스스로 한계를 정할 줄 아는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마음이 평안하고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행복해야 할 사람들에게 왜 행복이 없고 항상 정서가 불안정할까요? 사전적 의미로 행복이란 말은 "흐뭇하도록 만족하여 부족함이나 불만이 없는 상태" 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즉 행복이 없다는 것은 만족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밑 빠진 독에는 악취 나는 물을 부어도 새고, 오래 묵은 값비싼 포도주를 부어도 샙니다. 인간 근본에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육적 쾌락과 정신적인 부를 가져다가 부어도 새는 것입니다. 결국은 뿌리뽑힌 나무같이, 물 떠난 물고기같이 허무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칼 힐티라는 사람은 자기의 <행복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한 벌의 외투면 족하나 만약 이 경계선을 넘어 의복의 색깔이나 모양에 관심을 쏟으면 색다른 열 벌의 외투도 부족하다" 자기만족의 한계가 없는 여기에 행복이란 기대 할 수가 없는 것일 수 밖에요. 그리고 나아가서 네 번째는 인간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외부 자산이 필요하다 고 쇼펜하우어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이 재산이라고 하는 것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당연히 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필요한 재산을 말하죠.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베푸는 거예요. 주고 싶을 때 주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이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 그랬어요.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이 재산 때문에 근심도 많고,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자기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백해무익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재산이란 있을수록 좋은 거지 어떻게 재산이 필요 없는 재산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약 그것 때문에 가정, 건강, 행복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래도 그렇게 생각 할 것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눅12장의 어리석은 부자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뭐냐하면 내일 죽어도 좋으니까 오늘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사고주의자들입니다. 이름하여 하루살이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행복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인격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해요. 자기관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나친 부, 이게 참으로 문제입니다. 재산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건 인격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복입니다. 내 정서가 감당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 가치관이 그것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어야 됩니다. 관리 능력이 없는 재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건 절대로 행복 일 수 없음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붙잡고 일생을 허비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에릭프롬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소유와 존재>라고 하는 자기 책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타락 원인은 바벨탑 비전에서 비롯된다" 그랬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만들 때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시날광야로 가서 바벨탑을 하늘까지 쌓으면서 뭐라고 했나요? "흩어짐을 면하자. 안정과 번영을 누리자" 그랬습니다. 누구 맘대롭니까? 하나님에게까지 기어오르려는 이 교만이 오늘도 세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죠. 소유한 만큼의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그릇된 철학과 오해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소유와 행복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소유와 인격도 별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질수록 배 쑥 내밀고 거만해지는 사람이 많잖아요. 더 재밌는 것은 건강과 소유도 별개라는 사실입니다. 위생 많이 따지며 깨끗하게 청결하게 살아보려고 돈을 쓰고 몸부림을 쳐봐도 위생의"위"자도 모르고 사는 사람보다 일찍 죽어요. 소유와 생명은 무관합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소유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만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물질의 소유, 재산의 소유, 심지어는 지식의 소유, 이 모든 것 때문에 이 세상은 오래 전에 불치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시적이지도 않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어떤 것에도 빼앗기지도 않는 영원한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통계여론 조사법의 창시자인 조지 갤럽이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가?"라는 여론조사를 했을 때 놀랍게도<생생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경험한 자가 가장 행복하다> 라는 답변이 1위였으며, 그 반면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밤낮 술집에서 보내는 사람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나님과 함께 해야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행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순간, 하나님을 떠난 순간, 어떤 다른 것에 풍성함이 있어도 궁극적인 만족과 행복이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순간 불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행복이란 마음의 행복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계신 그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 이것이 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보물처럼 숨겨져 잇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29절 말씀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 자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이 무엇이 그리도 행복하다는 것입니까? 아직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온 것도 아닙니다. 물론 눈앞에 가나안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은 고생을 치루어야 할지 모릅니다. 수많은 전쟁과 이방 민족과의 갈등이 산 넘어 산처럼 놓여 있는데 모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이스라엘을 행복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요 성경을 잘 보면 분명한 행복의 조건이 곧이어 나옵니다. "너는 행복 자로다"라는 선언 뒤에 곧 바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기에 이전에 그와 같은 구원을 얻은 백성이 없었기에 너희는 얼마나 행복한 자들이야?"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완성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홀로 차지하게 된다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보는 이스라엘의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우리를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됩니다. 행복해질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찡그리지 마십시오. 얼굴 좀 펴십시오. 오늘 말씀 28절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행복의 이슬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행복의 이슬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구원과 은혜의 이슬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이슬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립니다. 그것도 우리가 잠들었을 밤중에 비록 우리는 의식하지조차 못할지라도 변함 없이 우리 곁에 머뭅니다. 우리가 알 듯 모를 듯 하지만 항상 구원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우리를 돕는 방패시요, 우리의 영광의 칼이시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대적들을 이기고 다스리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까지도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그 분과 함께 있다면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제발 행복한자답게 삽시다.
앞에서 소개한 철학자 칼 힐티의 말 한마디를 더 생각해 봅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으로 행복해 하십니까? 지금 소유한 재산이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또 무엇으로 행복의 조건을 삼고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명랑한 정서입니까? 건강입니까? 정신적 평온인가요? 남부럽지 않을 자산입니까? 이것들도 다 좋습니다마는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구원의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고 날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행복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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