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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감사, 나의 감사 / 시 14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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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감사, 나의 감사
시 144: 1-3

  오늘은 시편 144편 1절에서 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의 감사, 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들으셔야 합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감사는 나의 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절의 직접적인 유래는 청교도들의 감사 예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들은 1623년에 큰 풍년이 들어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일년 전에 신대륙으로 올 때에는 굶으며 죽으며 왔다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감사하면서 예배드린 것이 유래가 되어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왔기에 믿음의 자유를 얻고 감사한 것입니다. 또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주변에 사는 인디언들을 초청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농사를 지을 줄 모르고 그 땅의 풍토를 잘 몰랐으므로 그들은 인디언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중에는 인디언들을 죽이고 내 쫓아 버리고 땅을 빼앗았습니다. 하여튼 청교도들의 감사가 우리들의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다윗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였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승리 주심을 감사 (1-)

  본문 1절을 보면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에서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 대신에 '감사하리로다'라고 해도 됩니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어느 누구와 싸우도록 싸움을 붙이셨다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다윗으로 하여금 치게 하니까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얻어맞게 하셨다면 패배하는 것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하게 하셨고 다윗은 승리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시를 읊을 때에는 책상에 앉아서 묵상을 하는 중에 시상이 떠올라서 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바탕에 두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이 시를 쓴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에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쪽에서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은 키가 9척 같고 베틀채 같은 창을 들고 나와서 "누구든지 일대 일로 싸워서 이 싸움을 끝내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군사들 중에는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소년으로서 형들 셋이 전쟁에 나가 있었기 까닭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안부를 알려고 싸움터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며 하나님의 모욕하고 능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냥 보고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다윗은 격분하여 물매돌 다섯 개를 들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싸우러 나갈 그 때의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골리앗과 싸움을 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오전에 어떤 텔레비젼 프로에 혼혈아 즉 백인과 흑인 부부가 쌍쌍이 출연을 했는데 그 부인들은 전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 중에 혼혈아들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들을 혼혈아, 아이노꼬, 깜둥이 하면서 조롱하는 것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으나 자기 어머니를 향해서 양공주니 뭐니 하면서 욕을 할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나에게 잘 해주는 고마운 분이요, 훌륭한 분인데 왜 욕을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못 견디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저렇게 욕하는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윗이 분노하는 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물매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가서 처음으로 돌을 던졌더니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맞아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물매돌이 아직 네개가 남아있습니다. 쓰러진 골리앗이 죽지는 않았는지라 자기에게는 칼이 없기에 골리앗이 차고 있는 칼을 빼앗아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자기 칼에 자기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의 말로는 이런 것입니다. 골리앗을 상대로 싸울 때 누가 다윗이 이긴다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손을 가르쳐 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치게 하시므로 골리앗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물매돌에 골리앗이 맞아 쓰러지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골리앗의 목까지 잘라 버렸으니 완전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는 다윗이 잘 싸워 쟁취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감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감히 상대가 안 되는 다윗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싸워 이기게 하시고 승리 주시니 감사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37절을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싸움은 다 이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까닭에 넉넉히 이긴다, 완전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가 얼마나 무서워했었습니까? 또 죽음이라는 무서운 세력과 싸워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즉 죽음 권세 깨고 승리하셨습니다. 제일 무서운 마귀 그리고 죽음을 우리 예수님이 전부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수님을 힘입어 넉넉히 이겨 죽음이 이제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이제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완전히 승리했기 까닭입니다. 결국 우리는 죄에서 자유, 죽음에서 자유 또는 마귀에서 자유를 완전히 얻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우리가 돈 몇 푼을 더 벌어 놓았다는 것과 비교하거나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또는 예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참 어려운 싸움 한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직접 싸워주시지 않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과 싸워서 이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꼭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대성교회 강도사로 부임해 갔더니 장로님 한 분이 그렇게 저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요, 막말로 말해서 그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심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못살게 굴던지 제가 목사 고시를 치를 때 전국에 있는 고시 위원들을 찾아다니면서 김창인이 목사 시키면 안 된다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시키신다고 하는데 왜 자기가 안 된다고 합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보기만 하면 속이 뒤집어지고 심장이 널뛰듯 뛰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장로를 보기만 하면 혈압이 굉장히 올라갔는지 머리가 쪼개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미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찬송이 되겠습니까? 기도가 되겠습니까? 설교가 되겠습니까? 믿음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것을 정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네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는 말씀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박살을 내려면 내시고, 세상의 복이란 복은 모두 다 가져다 주시려면 주시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정리를 하고 털어 버리니까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되었습니다.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나와의 싸움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너를 괴롭히는 문제를 네가 끌어안고 싸우지 말고 나에게 맡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의 그 장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별로 잘 되지를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그렇게 평안이 있고,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믿음 주심을 감사 (2-)

  내가 믿는 믿음은 몇 일을 가지 못합니다. 손해를 보게 되면 안 믿는다고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오면 나는 안 믿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서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고 나는 그 믿음을 받아서 믿는 믿음은 손해와 고난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 즉 예루살렘 교회 감독인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약 2:1)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너희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받았다, 받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재간이 있습니까? 그리고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오늘날 내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맹랑한 소리를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여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인 성령의 감동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로 통해 보내 주시기 까닭에 예수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그 영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아버지처럼 믿어지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 철석같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 놓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믿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 결과는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받아서 믿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 주심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로를 세우고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윗은 우리아 장군을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얼마나 신랄하게 책망을 하는지 "내가 죽일 놈이지"라는 뜻에서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고 난 후에 쓴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그쯤 되었으면 이제는 왕의 자리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부귀영화도 다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치시는 경우 건강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것은 빼앗아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나를 쫓아 내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다른 것은 빼앗긴다고 해도 빼앗기는 것이 아니요, 잃는다고 해서 잃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면 내 믿음이 뭐가 됩니까? 믿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전부요,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성령이 나의 전부입니다"라는 신앙 고백이 시편 51편 1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 성령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는 것을 고백했고, 성령으로 믿음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대해서 일곱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나는 살아 남을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쌀 몇 가마니를 더 추수해서 쌓아 놓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이런 믿음 주신 하나님께 다윗은 감사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후에 부산에 가서 남부민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그 교회 예씨 성을 가진 예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안동 옆에 있는 예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예수 믿게 된 동기를 간증하시는 것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권사님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두 아들을 낳고 아들들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아들이 고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면서 몇 일을 계속해서 앓았습니다. 백약이 무효라 무슨 수를 써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한번은 동네 밖을 나가고 있는데 점잖은 분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보지만 자기 느낌에 도인 같더라는 것입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무조건 붙들고 "내 아들이 이렇게 죽어 가고 있으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집으로 갑시다"하여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서 이 분이 꿇어 엎드려서 아들을 붙잡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하는지 진액을 빼는 것 같았답니다. 그 결과 아이가 열이 내리고 밥을 달라고 하여 밥을 먹고는 일어나 나가서 놀더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 분이 바로 그 동네 사람을 전도하러 오던 전도인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죽을지 살지 모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완고한 시아버지가 아들 죽은 후 며느리가 두 손자를 데리고 사는데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이 그 집의 장손, 즉 그 가문의 장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문중이 들고일어나서 "너희가 제사 지내는 것 때문에 너희 집에 준 거창한 땅을 다 내 놓으라 그리고 예수를 믿을 것이면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즉 문중이 달려들어 빼앗고 내 쫓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부 내 놓고 대구로 나와서 안 해 본 일 없이 열심히 살면서 두 아들을 공부 시켰습니다. 알고 보니 큰아들은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그 당시 큰 회사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큰 회사에 들어가 요즘으로 말하면 팀장이 되어서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자기가 한 일이 너무 잘했다는 것이 예권사님의 간증이었습니다. 논 몇 마지기를 더 가지고 내가 예수를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예수님은 나의 전부요,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예수 잃고 하나님 떠나면 하나도 되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감사였고, 예권사님의 감사였습니다. 이런 믿음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알아주심을 감사 (3-)

  시편 27편 10절을 보면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언제 부모한테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런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버림받은 나를 영접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한데는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꼴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보내어 아들들 중에서 왕을 미리 뽑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죽는 날에 왕으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가서 아들들을 전부 부르라 했을 때 일곱 명이 모였습니다. 큰 아들을 보니 신장이 훤칠하고 멋있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로구나'하여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선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보는데 그 중심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허대가 멀쩡해도 속을 보면 못 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둘째도 아주 기골이 장대한지라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 역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째까지 다 지나갔습니다. 사무엘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들이 더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 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부르지 않았습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축에 안 끼워 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빨리 데려오라 하여 데려온 아들이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자니 기름을 부으라. 다윗을 통해서 내 뜻을 이루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전부 다윗이 알았습니다. 다윗은 "내 부모가 이럴 수 있을까? 왜 나를 형제들 축에 나를 끼워 주지 않았느냐? 왜 나를 왕따 시키고 제외시켰느냐?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알아주고 인정해주셨습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나를 부러워 아니해줘도 좋고 또 인정해 주어도 안 해 줘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면 최고로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을 보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한 노래입니다. 나 라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알아주십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알아주시니 그렇게 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언제 공부를 제일 잘 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다닐 때 공부를 제일 잘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은 스모도 선생님이었는데 항상 채찍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시험 점수가 나쁘거나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책을 읽으라 하여 잘 못 읽으면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 맞기 싫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는 갑 을 병 정으로 점수를 매길 때였는데 시험을 치르고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전부 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A였다는 말입니다.
  한 학년을 진급하여 4학년에 올라갔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나를 때리면서 공부를 시킨 그 선생님이 그 때는 미웠으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맙습니다. 공부를 잘해 갖고 4학년에 올라갔더니 담임 선생님이 아라이라는 이름의 쭉 빠진 처녀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 공부를 시키는데 3학년 때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제가 좀 뭘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는 국어 공부를 해도 일본어 공부였습니다. 아라이 선생님께서 일어나 읽으라 해서 제가 한 구절을 읽으면 학생들이 한 구절씩 따라 읽었습니다. 그러면 이 선생님이 얼마나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쓰다듬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또 음악 시험을 치를 때에는 나와서 부르게 한 후에 선생님이 들어보고 갑 을 병 정으로 점수를 매길 때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잘 했다고 얼마나 칭찬을 해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그 선생님을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좋구요, 음성을 듣기만 해도 좋았습니다. 공부가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선생님한테 더 칭찬을 받으려고 밤이 깊도록 피곤을 모르고 공부했습니다.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전부 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성격에 따라 표현이 다릅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교직원실 앞을 지나가면서 살짝 곁눈질하여 보았으나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반대 표현입니다. 성격이 조금 내성적인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적극적인 사람은 "선생님!"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아가씨들한테 총각들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면 사랑하는 줄 아시면 됩니다. 그 때 가서 붙들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새벽 기도 시간에 여자 교인들이 인사를 안하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곤 하였습니다.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봤더니 화장을 안 해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아라이 선생님이 저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가려면 5리에서 10리 사이가 되는데 친구들과 함께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남으라고 하였습니다. 남아 있으면 자기 일을 좀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도와주면서 얼마나 좋았는지 아십니까? 혼자 집에 가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주고 알아주었기 까닭입니다. 학생이 학생한테는 인정을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다윗은 감사한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첫째 승리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것은 자기가 쟁취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은 몇 일 가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믿는 믿음이기에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알아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부모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니 다윗은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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