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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웃사이야기 / 삼하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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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이야기
본문: 삼하6:1-15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과 동떨어진 내용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사랑하시고, 상처받은 심령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 가끔은 무서운 하나님을 볼 수있습니다. 호되게 꾸짖으시고, 징벌을 내리시고, 수천 명의 백성을 죽이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거역하고 당을 지어서 대항하자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켜서 르우벤지파를 매장시키고,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자 염병을 발해서 1만4천명이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또한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때 성도들이 재산을 함께 통용하는 공동체였다고 할지라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얼마를 따로 떼 놓고 베드로 앞에 놓았다고 하여 부부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였다고 죽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심각한 이단이었던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완전히 분리 시켰습니다. 모세의 율법정신과 예수님의 정신을 극단적으로 분리시겼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폭군의 신이며, 저급한 독재자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정의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으로 구분하여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부인한 이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한다거나, 하나님을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국한할 때 우리는 건강한 신앙을 기대할 수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채찍과 징계의 신으로만 생각할 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정의할 때, 인간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게됩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의 의미를 희석시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 받은 징계 그리고 동시에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보게 됩니다. 무서운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의 허황된 실존을 볼 수 있고 그러면서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괘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려 할 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다윗의 원수였던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됩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장로들이 헤브론으로 내려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등극시킵니다.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하는 실질적인 왕이 됩니다. 전국을 통합하는 왕으로서 다윗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 산성을 빼앗아 다윗 성으로 이름을 고칩니다. 그리고는 다윗은 이스라엘 주변에 진치고 있던 블레셋을 모조리 물리칩니다. 다윗은 전 국토를 통일하였고, 다윗 성을 새로 구축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시였던 블레셋을 쳐서 국가 대내외적으로 위상을 떨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괘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려할 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엘리제사장때에 빼앗겼던 법괘는 20년을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이때 웃사가 수레에 법괘를 싫고 이스라엘 지경으로 들어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당시에 사용했던 악기를 다 동원하고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고 여호와 앞에서 기뻐 즐거워하며 나라의 큰 축제의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 수레를 끄는 소가 길이 험했는지 뒤뚱거리자 법괘가 수레에서 떨어지려합니다. 이때 수레를 끌어던 웃사가 법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법괘를 붙잡습니다. 그 순간 법괘를 잡았던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게됩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그 자리에서 치신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다윗이 충격을 받고 웃사가 죽은 자리를 베레스웃사라고 이름 짓습니다. 베레스는 "페레츠"란 말인데 '충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웃사가 충돌했다는 뜻입니다. 갑작스러운 웃사의 죽음으로 다윗과 전 백성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법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법괘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약속입니다. 십계명은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맺는 통로입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백성들은 스스로 양식을 소출할 수 없는 광야 유랑인 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면 먹고 주지 않으시면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생명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표징입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법괘는 생명을 뜻합니다. 법괘는 이 땅에서 주리지 않고 쇠잔하지 않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법괘는 택한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왜 웃사가 죽어야만 했습니까? 이 소중한 법괘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붙잡은 웃사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볼 수있지 않겠습니까? 이유는 이렇습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출25장이나 37장에 보면 하나님은 법괘를 만들 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길이는 1.2m가 되고 너비와 높이는 60cm가 조금 넘는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이 채를 고리에 묵어 사람이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결코 마차에 수레에 싣고 이동해서는 안되고 사람이 어깨만 매어 옮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웃사는 수레에다 법괘를 실었습니다. 오늘 본문3절에 '새 수레'에 싣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법괘를 옮기려고 수레를 새롭게 고치고 깨끗하게 단장했던 것입니다. 웃사는 법괘를 옮기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웃사의 행동을 묵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수레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문화입니다. 광야의 텐트족입니다. 이동 수단은 도보뿐입니다. 광야 유랑민족이었기 때문에 정착민족과 같이 농기구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무기도 없고 가축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식량을 주셔야만 먹고사는 신본주의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법, 생명의 만나, 생명을 지켜주는 지팡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레는 무엇이고, 소는 무엇입니까? 수레와 소는 농경문화의 생존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원수인 블레셋 족속이 물건을 이동하는 수단과 똑같은 방법으로 법괘를 이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깨에 메지 않고 새수레를 만들어 소가 끌게 했다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최신의 발전된 앞선 문화요, 첨단 기술이요, 신 실용주의 문화를 도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 우상숭배의 문화를 용인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최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편리하고, 더 효과적이고, 더 빠르게, 더 용이한 방법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실용주의 사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이성의 선물이자 인식론적 필연성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실용주의나 편리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나 실용적 사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삶의 방법에 일부분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인식론적 사고의 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 시대에 황소가 끄는 수레는 레위인들이 법괘를 어깨에 매고 수십리 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편리한 방법이었습니다. 편리한 도구보다 쉬운 방법보다 하나님이 택하신 고핫자손이 어깨에 매고 땀흘리며 끌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힘이 들어도 땀을 흘리며 인간의 어깨에 매고 법괘를 이동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법괘를 어깨에 매는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손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방법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무릎이 절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영적인 수고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더 빨리 더 유용한 방법을 고안해 내는 창의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희생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깨에 매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내 어깨에 매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내 어깨에 짊어지는 기도의 땀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로, 웃사의 죽음은 다윗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경책이었음을 본문에서 볼 수있습니다. 다윗 역시 웃사 만큼 하나님의 뜻을 쫓지 않았습니다. 웃사가 새수레를 만들어 소에게 끌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웃사가 법괘를 수레에 실고 아바나답의 집에서 나오는 그 모든 일의 과정에서 다윗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 웃사의 방법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이 일을 부추겼습니다. 오늘 본문1절에 보면 다윗은 법괘를 이동할 때 삼만명을 동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3만명이라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핫자손에게 법괘를 메고 이동하라고 할 때 고핫자손이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30명이 되겠습니까? 50명이 되겠습니까? 고작해야 10명 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 일을 위하여 3만명의 대 용사들을 모집하여 대대적인 국가적 행사를 기획한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정치적인 의도가 드러납니다. 다윗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통합하는 왕이 되었고, 다윗 성을 재건축하고, 블레셋도 격침하여 국민들에게 위엄 있고 힘있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역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하늘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는 자리만 만들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법괘를 가져오기 위해 3만이라는 대 군단을 이끌고 국민적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도가 다윗의 마음속에 차 있었기 때문에 법괘를 이동할 때 사람의 어깨로만 이동해야한다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을 칠 때에도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5:19절: 제가 블레셋을 칠까요 말까요, 여호와께서 저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습니까?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좇기면서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에 얼마나 힘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법괘를 이동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의 방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블레셋 이동 수단인 수레에 법괘를 옮기므로 백성들에게 블레셋을 점멸시킨 왕의 모습으로 보이려했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의 이러한 인간적인 욕망과 야심 속에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니카 헤이스케라는 학자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이 있습니다. 일본 교토대학을 나와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교수를 거쳐서 노벨 수학상에 해당하는 필드 상을 받고 하버드대학 수학교수로 있는 사람입니다. 수학을 공부하다보면 90%를 해결하고도 10%를 풀지 못해서 막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이분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고, 문제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유하는 정신을 갖으려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새로운 수학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연구가치가 높은 문제를 6개월에 걸쳐 연구하여 하버드대학 세미나에 발표했다고 합니다. 발표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들이 극찬을 하고 큰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후에 2년동안을 피나는 연구를 했지만 해결할 수가 없어서 이 이론을 일반화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려고 했는데, 선배교수로부터 뜻밖에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전화 내용은 독일출신의 아주 젊은 학자가 자신이 2년 동안 연구한 수학개념을 일반화시키는 이론을 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 실신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내 이론을 일반화했느냐고 하자 100년전에 유행했던 바이어슈트라스의 공식을 써서 풀었다는 것입니다. 바이어슈트라스 공식이란 말을 듣자마자 더욱 망연자실했다고 합니다. 그 공식은 너무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었는데 자신은 2년 동안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정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귀중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바이어스트라스 이론을 전혀 몰라서 문제를 못 푼 것이 아니라 이 이론을 하바드에다 발표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후에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만을 고집하게 되어, 편협된 사고는 다양하고 쉬운 공식을 생각할 수 없는 마음으로 2년간을 돌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약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방법을 자세히 점검했더라며 바이어스트라스의 방법은 쉽게 사용했을 것이라는 해답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분의 좌우명은 단순한 정신을 유지하며, 성취에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욕망과 허왕심은 우리의 현실과 역사의 배후에 있는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하만국의 높은 영광의 유혹을 버리시고 더 낮아지려야 낮아질 수도 없는 십자가의 길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더 높아짐을 추구했습니다. 더 위대한 왕으로 하늘과 땅을 좌지우지하는 왕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하려 했습니다. 3만 명을 동원해서 법괘를 옮기려 했던 의도 자제가 이미 웃사보다 다윗이 먼저 징계 받아야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웃사의 죽음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웃사의 죽음은 또 다른 영적인 회복과 소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서 자기 성으로 법괘를 옮기지 못하고 오벳에돔의 집에 3달 동안 두게 합니다. 3달 동안 하나님은 이 집에 큰복을 주십니다. 3개월 동안 다윗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왜 웃사가 죽어야 했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기도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영적인 성찰이며,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재점검하였던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이제 다윗이 웃사가 죽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게됩니다. 자신이 직접 들어가 법괘를 어깨에 메고 나와 레위지파에게 매어 주는 것입니다. 다시 3만 명을 대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새로운 수레를 만들에 소에 끌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회복입니다. 자신의 욕망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자신의 영예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아 온 것이고, 사람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재자리매김 된 것입니다. 다시금 다윗을 영적으로 회복시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전하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있습니다. 이 웃사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방법과 우리의 의도가 항상 일치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편리한 생각보다 더 앞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나의 용이한 주장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의 영적인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고의 땀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의 행동을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나의 욕망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을 수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민족의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웃사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내 자리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삶의 위치에서 영적으로 바로 서지 못할 때 우리의 민족,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회, 우리의 교회가 흔들릴 수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백성에게는 언제나 영적인 회복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 순위에 놓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징계 뒤에 은혜주시는 하나님, 아픔 뒤에 치료하시는 하나님, 절망 뒤에 소망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늘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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