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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마지막 때의 가르침 / 딤후 3:12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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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가르침(디모데후서 3 : 12 - 17)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디모데후서는 바울 서신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쓴 서신이며,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사랑하는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써 보낸 두 통의 편지 중 두 번째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당시의 상황은 로마시의 대화재로 인해 시작된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이같은 핍박으로 인하여 고난을 참지 못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배교자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합세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해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일은 생전에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예고하신 대로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역경 중에 처해 있던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인 디모데를 격려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가운데서 굳건히 서 있어야 함을 본 서신을 통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격려와 권면의 글이 아닙니다. 4장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얼마 있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될 바울의 비장함이 들어있는 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본문 3장 14절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말세란 좁게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심판을 단행하시는 역사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 보면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때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자들이 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기록될 그 당시나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이나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사단이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그 심판의 때를 지연시키고자 사람들을 범죄케 하고, 각종 이단으로 하여금 복음 전파를 막음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가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점점 식어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2절부터 기록되어 있는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들에서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이 모든 일들은 사단이 배후에서 조종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1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올바른 생활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을 세속에 물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2장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박해가 있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단은 박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를 방해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박해를 하면 할수록 교회는 더 왕성해지고 복음이 더 멀리 전파되어 가는 것을 보았기에 방법을 바꾼 것입니다.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훼방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적 여유는 기독교인들을 교회보다는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5일제 근무제에 대한 논란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문화를 통하여 경건한 신앙을 방해합니다. 영화나 음악을 통한 뉴에이지 문화는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박해 아닌 박해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을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로 본문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거짓말하는 자' 또는 '속이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에서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즈음에도 우리 주위에 많은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우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너무나 교묘하게 속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에 현혹되어 빠지게 되는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거의 기존의 교인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빠지게 됩니까? 5절의 말씀에 나오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자들입니다. 이들은 명목상 그리스도인 또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교회 생활을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6절에서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가는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3:6-7을 보면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교묘하게 속이고 유혹하여 하나님과의 사이를 깨뜨린 사단은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속이고 유혹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찾고 있습니까? 마지막 때에 자신이 멸망할 것을 알고 있는 마귀는 혼자 멸망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든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단이 자주 사용하는 유혹 무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 그러는데'(일반화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한 번만'(이번만) 셋째는 '이 정도야 큰 죄인가?' 속이고 기만하는 사단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사단의 방해와 유혹 가운데에서도 경건한 삶을 사는 비결은 오직 성경에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은 '쉐마'교육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명기 6:6-9에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받은 신앙교육으로 인하여 성경을 알았고, 스승인 바울에게서 진리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디모데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고 머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일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배웠다고 마침표를 찍을 수도 없습니다. 항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이 담겨져 있는 책인데 우리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어찌 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T.V 프로그램 가운데 전파견문록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아이의 시각으로 본 것을 설명하면 출연진들이 그 사물을 맞추는 프로인데, 언젠가 한 아이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작지만 그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정답은 '씨앗'이었습니다. 씨앗은 작지만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하는 설명은 참 기막힌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왜 그 속에 다 들어 있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종이 위에 글자가 쓰여진 것은 같겠지만, 성경책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즉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2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에스겔 37장에서도 골짜기의 마른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큰 군대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게 하는 책입니다. 본문 15절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언젠가 공원에서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에 먹이를 물고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개미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미에게 말했습니다. "야,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 집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개미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개미에게 방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방법은 개미의 언어로 말해야만 알아 들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나님의 언어가 아닌 우리 인간의 언어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20:3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지 않고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책입니다. 태초에 창조될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회복으로 인해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성경을 통해서 철저하게 연습된 사람만이 모든 선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적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5:7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신 말씀을 토대로 하여 여러분에게 한가지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하루에 15분씩만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15분씩만 성경을 연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3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완전히 통독하게 됩니다. 둘째는 경건한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셋째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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