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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믿음의 열매(대상 16: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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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 어디입니까?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그녀는 지금 임신중입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마입니까?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두 사람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 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디입니까 ? 하루가 어디입니까 ? 한 달란트가 어디입니까?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영국 트렌취 감독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감사는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감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 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여러 가지 집착으로부터 자유하는 마음"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 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불행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갖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소유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 자체가 곧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집착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감정적인 의존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느 것에 집착에 빠진 영혼은 결단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관현악단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즐기기 위하여서는 어느 악기 하나에 집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수많은 소리 가운데 조금 다르게 들리는 소리 하나만 붙들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그는 일평생 행복한 날 아름다운 세상을 살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작은 것, 별 것 아닌 것으로부터 곧 집착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 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난 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진정한 감사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들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 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 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우리들도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 같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뉴욕재활병원과 한국의 실로암 안과병원의 벽에 붙어있는 어느 환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차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 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 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 있는 보고를 했습니다. "저는 산넘어 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넘어 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깊은 영성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미숙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덜됨과 철없음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0년, 20년...을 끈질긴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한 달을 길다 합니다. 1년 앞에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부, 자녀, 친구, 팀원, 동료, 교우, 이웃...에 대하여 기다림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이 눌려 있고 상해 있습니다. '왜? 저 모양인가...' '왜? 저렇게도 안 변할까...' '왜? 아직도 그 수준밖에 안되나....' 이런 넉두리와 한숨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교만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조급함과 경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다려줍시다. 주님이 나를 기다려주고 계시듯.... 평생이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형제의 모습이 내 모습이며, 내가 그토록 속상해 하는 다른 지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의 마음도 이러하실 터인데...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성화 되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아직도 그대로냐?'고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극심한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했듯이 말이죠. 당장 마실 물을 달라 합니다. 당장 고기와 먹을 것을 달라합니다. 안주면 돌아간다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의 일그러진 실존형상 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장 응답하시라 보챕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 당기라 떼를 씁니다. 왜, 이렇게도 더디냐고 따집니다.

조급함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마귀는 우리의 조급함을 배후에서 충동하고 조종합니다. 우리를 견딜 수 없이 조급하게 하는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렸듯 야곱이 21년을 기다렸듯 모세가 80년을 기다렸듯 요셉이 13년을 기다렸듯이....(나중에는 기다림 마저 포기하게 하심)

가족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기다리되 투덜거리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10년이고 20년이 지나면 달라지리라 기대하십시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당장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몽둥이와 잔소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기다려 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속도 만큼 남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다리게 하실 까?'를 고민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다림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기다림처럼 우리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깨뜨릴 방법은 없습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은 죽음을 방불케 합니다. 그 기다림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은 부셔지고 자아는 죽고 속 사람의 찌꺼기는 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치명타를 아십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빨리 깨어지고 쉽게 항복하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길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른 포기하십시오. 얼른 항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은 곧 행복의 시작입니다.

기다림이 힘든 것도, 포기하기 어려움도, 불평과 원망이 들끓음도 사실은 나의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 까? 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기다림보다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더 속히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야곱의 험악한 인생이 속히 청산되기를 기다림보다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빨리 '평안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응답은 야곱이 지렁이 같이 되고서야 이루어지게 되었고 야곱의 기다림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나를 찌르고 격동케 하고 나의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입혀 억울하게 한 그분(?)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다려 주십시요. 그 때문에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의 고생도 큰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탄 배 때문에 뱃사람들이 함께 고생했듯이 말이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분의 수고와 노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나도 그로 인하여 힘들지만, 그 또한 나를 인하여 힘들지요. 결국, 나를 나되게 하고 철들게 하고 온전케 하고 성숙케 할 사람은 나를 칭찬하여 주고 극진하게 섬겨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쉬지 않고 격동시키는 그분(?) 뿐입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준비케 하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행복인생'은 항복으로 다가오며 '평안인생'은 기다림의 승리로 찾아오며 기다림의 끝은 나의 깨어짐으로 앞당겨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만큼 깨어져야 합니까? '이 정도면 되었지 않느냐?' 라는 생각조차 안들 때까지.... 얼만큼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기다림 마져 포기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이며, 나를 나되게 하시는 기막힌 은혜입니다. 그냥...막연히....기다리시면 안됩니다. 기도하며, 은혜 받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밥 포드가 쓴 '하프타임'이라는 책을 읽고 쓴 -훈련생의 노트에서- 글을 소개합니다.

"나는 지금의 삶에 매우 만족한다. 원하던 집도 장만했고 건강도 좋아지고 먹고사는데 불편이 없고 남편도 아이들도 건강하고 하는 일도 그럭저럭 잘되고… 하루하루 평안함을 느낀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탐심이며 죄악같이 여겨진다. 나와 같은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아 오히려 죄송하리 만큼 자족함을 느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좋다. 그러나 원하던 위치에 왔는데도 그 이면에는 답답함이 있다. 하루를 정리하는 늦은 저녁 나는 생각한다. 거의 매일 똑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일이 나와 내 가정에 집중된 삶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하나님의 일에 대한 투자는 아주 적다. 간혹 공허함이 느껴져서 정말 인생이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염세적인 생각이 들곤 한다. 이것이 다가 아닐텐데… 조금은 잘못 된 것 같다.

밥 포드의 말처럼 나의 인생을 점검해볼 필요를 느낀다. 나의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복음을 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극에서 극으로 옮김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것이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효과적인 후반기의 삶을 위해 배움도 찾아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일속에서도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겠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아직도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삶에 지나지 않는 나의 모습이 덧없어 보인다. 마음을 비우고 참된 나를 성령을 통해 조명 받아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다. 보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고 싶다. 내 아이들은 좀 더 하나님 중심의 점진적인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키우고 싶다. 나의 부족함과 실패를 닮지 않게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매일 생각해 봐야겠다. 그래서 작은 목표를 하나씩 세우면서 큰 일을 감당하는 자로 훈련되고 싶다."

열매는 씨를 뿌리고 오래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의 열매도 역시 오래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인데 그것이 바로 감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열매가 믿음의 열매이며 믿음의 열매가 곧 감사의 열매인데 금년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새 생명을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께 드리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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