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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바라고 믿는가? / 골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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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라고 믿는가? (골1:9-23)


오늘은 우리가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500년 전 유럽에서 개신교라 불리우게 된 기독교의 새로운 전통을 탄생시킨 종교개혁운동은 오랜 세월 성경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림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고 부패하게 했던 교회에 순수하고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신자들 특히 성직자들의 윤리적 타락뿐 아니라 심각한 신학적 왜곡에 대한 선전포고였으며, 교리와 생활 전반에 걸친 갱신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개혁운동의 가장 중요한 논쟁점은 구원론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짓누르며 괴롭히고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신학적 부패가 가장 심각했던 것 또한 구원에 관한 교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그 시대의 번뇌에 대해 로마천주교가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 고작 면죄부사상뿐이었던 데에 반해,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한 복음적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구호들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도리에 관한 이 성경적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변함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무엇이 구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엇이 구원인지 분명하지 않은 채로 바른 구원의 방법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구원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바로 찾는 일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문제상황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문제상황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닥쳐왔고 우리가 처한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상황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문제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육체의 어떤 잘못된 습관이나 어떤 어리석은 교육을 악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간의 불행을 해결하는 길은 교육과 극기에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주된 장애를 부적절한 욕망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용기와 지혜와 절제와 정의 같은 덕목들을 의식적이고 규율있게 실행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악의 근원을 격정(passions)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희망은 격정을 합리적 사고에 예속시키는 합리적 훈련에 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불행의 근원이 궁극적으로 무지에 뿌리를 둔, 내면 깊은 곳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욕망의 고통을 넘어서는 길은 환상과 공허의 세계로부터의 체계적인 격리에 의해 도달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유교에서의 악은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나쁜 환경과 교육의 결핍 때문입니다. 행복의 초석은 덕이고 그래서 선을 행함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슬람교에서의 죄는 정도를 벗어나는 실수 또는 과오입니다. 구원은 지도와 고행을 통한 보상에 있습니다.

유대교에 있어서 죄는 기본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계명을 잘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죄의 보상은 회개와 제사에 의해 행해집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의 문제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해결의 길은 다양했습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죄를 "하급의 충동에 대한 이성의 불완전한 통제"나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유일독특한 위치에 대한 무지"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계몽주의는 인간의 필연적인 진보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의 충분성을 믿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사물들의 규모를 혼동하고 보다 하급의 일을 추구하며 윤리적 가치들을 실현하는데 실패하는 것을 죄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이상이고 사랑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육적으로 준비되어있는 존재입니다.

이기성, 특히 집단적 이기주의를 죄의 가장 악한 형태로 보고, 그것은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 신학자도 있었습니다.

정신분석학과 목회상담학에서는 죄의식이 문제라고 봅니다. 죄의식은 지식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느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문제는 병이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치료(therapy)이지 속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신분석학이 제거할 수는 없는 깊은 존재적 불안이 문제라고 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는 병리적 불안은 의학적 치료에 의해 해결할 수 있으나, 실존적 불안은 사제적 도움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죄의 본질을 나태에 두면서, 교직자들에게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손잡고 사회정의를 위해 동참할 것을 외친 신학자도 있습니다.

소위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문제상황은 힘있는 계층이 힘없는 계층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해방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도록 억압하는 현존질서들을 폭력으로 전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자들의 문제이해에 더욱 주목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모든 인류를 죄의 노예상태에 두었다고 믿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구원을 위한 첫 걸음도 내디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원죄의 고통스러운 결과입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죄의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주입이라고 보았습니다.

루터도 의지의 노예상태와 죄인의 자기구원을 위한 무력함을 강조했습니다. 자유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중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죄의 뿌리가 불신앙이듯이 의의 뿌리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말씀과 성례라는 약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깔뱅은 루터를 따라 죄 속에서의 인간의 부패와 무력함, 그리고 은혜의 나라로 옮겨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합니다. 죄에 대한 해결책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역사로 성화의 실제적인 진전을 이루어간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이야기하면서 그저 인간적인 실수, 태만, 결점 정도의 의미로만 생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인 죄이해를 가져야합니다. 성경에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이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입니다.

죄의 원인과 우리의 문제를 사회적 구조악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구조악을 제거하는 것이 구원이며, 이것은 선을 행함으로 가능하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조악의 밑바닥에는 개인적 타락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회적 구조악이 사람을 타락시키지만, 그 사회의 구조를 악하게 만드는 것이 또한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이 도대체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물어야합니다. 선에로의 경향보다 악에로의 경향이 더 강한 것이 아담의 범죄 이후의 자연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단지 교육과 계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닥친 죄의 결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성경의 증거들을 통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 즉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상황을 다음의 것들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의 손상, 인간의 올바른 삼중적 관계의 파괴, 하나님나라의 상실, 비인간화, 하나님지식의 상실과 마음의 부패,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실, 죄적 본성을 타고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죄의 노예상태, 곤고함, 육신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문제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라면, 우리는 앞에 열거한 죄의 결과들에 대칭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나라의 회복, 인간의 올바른 삼중적 관계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인간화, 하나님지식의 회복,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마음의 회복,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 행복, 부활과 영생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진정 바래야 할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구원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래야 할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3-14절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함으로써 흑암의 권세 즉 사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아들의 나라로의 옮김 즉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죄 사함이 곧 구원이며 우리가 바래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20-22절에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했습니다. 이것은 전에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수이었던 관계가 해소되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며 우리가 바래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시는 칭의와 성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며 우리가 바래야 할 바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조금 앞서는 9-10절에서는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함으로써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회복되는 것과 그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의 제목이며 오늘 우리가 믿음 안에서 바래야 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갈4:19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으며, 롬6:22-23에서는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며 믿고있습니까? 진정 바래야 할 것을 바라지 않고 믿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한국교회에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리가 높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시급히 일어나야 할만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삶이 변질되고 부패했다면, 그것은 대부분 믿음 안에서 바래야 할 것을 바라지 않고 엉뚱한 것, 거짓된 것, 헛된 것, 세속적인 것을 동경하고 추구해온 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라 봅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나라의 회복, 인간의 올바른 삼중적 관계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인간화, 하나님지식의 회복,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마음의 회복,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 등을 바라기보다는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쾌락을 좇아 살며 여전히 더러운 세상적 수단과 방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로서 마땅히 바래야 할 것을 바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교회를 새롭고 건강하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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