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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교회와 개혁 /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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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개혁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
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
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도에게 좋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승리의 삶을 사는데 필수 요건이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484주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내가 속한 교회는 좋은 교회
인가?" "한국교회는 건강한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하고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이단 교회가 아니라면, 내가 나가
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교인은 행복한 교인입니다. 그런 행복한 교인이 되
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 교회가 완전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상에 온전한 교회
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쉽게 약해지기도 하고 시험에 들고 또 병이 듭니다. 어
떤 사람은 지상의 교회에서 온전함을 구하다가 실망하여 교회 자체를 경시하거나, 교회를
떠나거나, 또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방관자로 비판적 자세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 당신이 이
땅에서 온전한 교회를 찾았다고 해도, 당신이 그 교회에 나가는 순간 그 교회는 온전치 못
한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은사가 많아서 칭찬을 들었던 고린도 교회도 분파가 많고 성도끼리 세상 법정
에 송사를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가 있고 이단들
을 잘 이겨낸 교회 장점이 있는데, 첫 사랑을 잃어버린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지켜 순교한 아디바가 있었지만, 그러나 발람의 교
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던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지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믿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이단을 용납해서 복음 아닌 것을 따라가는 무서운 잘못을 범한 교회였으
며, 라오디게아 교회는 깊이 잠이 들어 버린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에게는 나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은 아니
라 비교적 좋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나쁘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는 말이 아니라 비교적 나쁘다는 말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교적 좋은 교회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진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도 소수의 사람들이 예
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고 일상생활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이처럼 교회는 크고 작은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도 큰 병도 있고 작은 병도 있듯이
교회의 약점은 작고 미비한 것인데 반하여 크고 심각한 병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상의 교회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한국교회에 바른 교회의 모범을 보여야 책임이 크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알기 바랍니다. 먼저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저와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나쁜 눈으로 보고 있을 것이고, 정통교회는 이단을 비판하는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어떤가 하여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 이단연구가들
은 목회를 하지 않았고 해도 이름만 걸고 하는 그런 목회를 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 이단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우리 자신
을 위하여 그리고 한국교회 모범을 위하여 더욱 바른 교회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르게
도 하고 잘도 해야 합니다. 제가 이단연구를 통하여 다른 목회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어려
움을 겪었지만 그러나 이단연구를 통하여 얻은 많은 유익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으로 얻은 유익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지상의 모든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도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합니다.
이 개혁은 혁명과는 다릅니다. 이 개혁은 불평꾼의 불평거리도 아니며, 고질적인 부정론자들
의 먹이 같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보는데 혁명과 개혁을
혼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판단이 옳지도 않지만, 혹 판단이
옳다고 해도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종교개혁을 하려다가 실패한 뮌쪄 같은 사
람입니다. 저는 진정한 개혁자에게는 5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바른 신학, 바른 신앙
과, 교회사랑, 자기 개혁과, 그리고 용기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교회를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까? 개혁자들이 외친 모토
는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오직 성경이요, 둘째는 오직 은혜요, 셋째는 오직 믿음이요, 넷
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다 설교할 수 없어서 오늘은 오직 성경에 대하여만 생
각하려고 합니다.

  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해야 합니다. 16세기에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이 주
창한 첫 번째 원리와 모토(Motto)는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중세기 로마 천
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에 대하여 나온 모토입니다. 1,000년이 넘도록 참된 진리인 성경을 떠
나 온갖 유전과 이방풍속으로 기독교를 변질시켜 놓아 결국 암흑시대를 만들어 버린 로마
카톨릭을 떠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진리의 운동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오직 성
경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인간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대항하여 하는 말
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전통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그 전통이
원리가 되고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전통에 의하여 기득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
서 그들은 그 전통을 지키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전통이 생기게 되는데 그 전통이
후에는 성경 위에 올라가 성경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성경으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두 가지 전승이 있습니다. 먼저는 내적 전승이요 다음은 외적 전승입니다. 내적
전승은 성령과 말씀의 전승으로 좋은 전승인데 반하여, 외적 전승은 인간 교황의 전승으로
나쁜 전승을 말합니다. 천주교회는 교회의 결정과 교황의 칙어가 실제적으로 성경보다 위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오직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66권을 정경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경이란 말에 대하여 가경, 위경, 외경이란 것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에 성경처럼 보이는
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느 것이 참 성경이냐를 결정해야 할 필요를 느
끼게 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된 것
을 정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니까 교회가 결정하여 정경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결정해서 성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컨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고린도 전후서 외에서도 편지를 써서 보
낸 것을 고린도전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썼으니 성경이라면 그것도 성경이 되어
야 합니다. 아닙니다. 바울이 쓴 모든 글은 다 성경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사람
으로 성경을 기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류 많은 인간으로 오류가 없도록 도우신 성
령의 역사를 소위 영감이라고 하는데, 바로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
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쉽게 선입견적으로 교회가 결정했으니 성경이라는 생
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입견적 실수요 또 악이라고 봅니다.

  천주교는 우리의 66권 성경 외에 73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비아서, 유딧서, 마
카비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등 7권의 가경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곳에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천사들의 중보, 연옥설, 공덕축적설 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런 가경
혹은 외경을 성경목록에 집어넣은 것은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30여명의 주교들에 의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날 천주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라틴어는 '제롬'이란 교부가 헬
라성경 70인경(LXX)에서 번역한 것인데 정작 그것을 번역한 제롬은 가경을 정경에 포함시
켜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전승이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가 예를 하
나 들어보겠습니다. 노회나 총회시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서 사회를 보
는데 예배학적으로 볼 때 마땅히 사회 단상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쉽게 바꿀 수 없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것을 권위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니다. 저는 그들을 세 자기로 비판하
고 싶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불신앙자요, 둘째는 교만한 자요, 그리고 셋째는 거짓되고 모순
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사람들을 불신앙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반계시와 자연계시가 타락하고 또한 그 계시를 볼 인간마저 타락하여 하나
님의 계시를 바르게 볼 수 없게 되자, 계시의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로 주신 그 계시마저 오류가 있다면 먼저 그 하나님의 전능하
심에 의심이 갑니다.

  우리가 볼 때 오류로 보이는 것은 얼마든지 우리 인간의 이해력의 부족으로 볼 수 있습니
다. 인간의 이성도 타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역설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때로 진
리는 천년 이천년이 지나 밝혀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도 안되면 사본상의 오류로 보
면 됩니다. 교만한 인간은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이성의 칼을 하나님의 심장에
꽂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문을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믿지 못할
책으로 보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신화가 가득 차 있다는 말이나, 이 성경은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다는 말이나,
성경을 녹음기로 녹음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믿느냐는 말이나, 또는 2000년 전에 그것도 이
스라엘 문화권에서 주어진 말씀을 어떻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느냐는 이런 사탄
의 소리에 귀가 막힌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 위에 두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성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도 타락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성이 모든
진리를 밝히는 기준으로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교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늘 날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면 좀 무식한 목사, 무식한 학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
니다. 고리타분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과 학문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 특히 자유주의 학자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학이 발전하면 믿음도 함께 발
전해야 하는데, 신학이 발전하여 그 인간은 높아지는데 반대로 하나님이 낮아지고 믿음이
낮아지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성경을 무조건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좀
안다는 사람들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것은 이성의 교만입니다. 결국
성경까지 디디고 내가 높아지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셋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되고 모순된 사람입니다.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목회를 하고 신학교 교수를 합니까? 그 못 믿을 성경을
왜 해석하고 설교를 합니까? 자기 확신을 가지고 굿을 하는 무당보다 더 악한 사람이 아닌
가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가관입니다. 도
대체 무엇이 예수님의 전승과 사도의 전승이 다르다면서 그것이 바른 성경인지 아닌지도 모
르면서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해석하고 설교합니까?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한 신학자 중에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던 소위 사신신학자가 축도를 하더랍니다. 그래
서 왜 죽은 하나님 이름으로 축도를 하느냐고 하였더니 하나님은 없어도 내가 축도를 하면
저들이 좋아하니 못해 줄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더라고 합니다. 거짓입니다. 얼마 전에 동정
녀 탄생도 부정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부정하는 감리교 신학교 교수가 출교를 당하자 밥줄
걱정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기도 하고 실망이 컸습니다. 진리
를 걱정하지 않고 밥줄을 걱정하는 모습이 비참하기도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신앙과 삶의 온전한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주교는 성경이 없어도 교회도 신앙생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구전과 전
승과 유전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를 성경 위에 두기 때문에 하는 말
입니다. "성경의 모든 책과 그 사본이 몽땅 없어진다 할지라도 교회(천주교)는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를 그대로 지닐 것이며, 신약성경이 한 글자도 쓰여지기 전처럼 여전히 설교할 것
이다."
  천주교는 1299년 톨로사 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갖는 것, 읽는 것, 해석하는 것을 금하
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1897년 1월 25일 교황 레오 13세는 천주교 이외에서 만든 성경
을 금하고 특히 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성경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출판하고 성경을 읽게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정확무
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준입니다. 모든 것을 달 수 있는 저울이요, 모든 것을 잴 수 있
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마24:35, 막13:31, 눅21:33)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
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
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모든 이단들은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원리강론을 가지고 있
고, 몰몰교는 몰몬경을 가지고 있고, 안식교는 대쟁투을 가지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은 럿셀
이 쓴 7권의 성서연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계속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가져야할 태도는 합리주의적인 비판과 연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과 종교적 문제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우
리의 위대한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추구할 때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길에서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생각할 때 그 말씀이 우
리를 조명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을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때 그의 말씀이 말하는 그 모양 이외의 모양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
니다(기독교 강요 1권 6장 3절, 13장 20절). 사도 바울도 "너희는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신앙과 삶의 표준을 성경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
(성경)을 제쳐놓고 다른 길로 갈 때 아무리 애써 진리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이미 처음 길을
잘못 들었으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말
씀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말도, 철학도, 우리 감정도, 이성도 우리를 속일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법칙입
니다. 또한 우리 삶의 법칙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사무관으로 1888년 한 해를 미국에서 보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월남선생은 기술문명이 발달된 강대국의 모습을 목격하고
는 강대국의 비결을 배워 조선을 힘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때 청국 공사관 관리
가 "서구문명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
었는데, 월남 선생은 그 성경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의 기대는 그 소에서 군대는
어떻게 훈련시키고, 군함을 어떻게 건조하는지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성서에서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이라든가, 사람의 몸이 부활한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얘기들뿐이었습니다. 월남 선생
은 실망하여 성서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미국을 이토록 강한 나라로 만들게 한
근본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될 요점이 정말 이 속에
있단 말인가?' 선생은 그런 생각으로 다시 성경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군사육성법이나 무기 제조법 같은 비결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월남은 다시 책을 던졌습
니다. 이처럼 월남 선생은 성경을 집었다 던졌다 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 옥중에
서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우리 삶의 다양한 진리에 대하여 답
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죠지 워싱톤>은 "성경과
하나님 없이 세계를 바르게 정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했고, <토마스 제퍼슨>은 "성경을
열심히 정독하는 자는 보다 나은 시민, 보다 나은 아버지, 보다 나은 남편이 될 것이다"고
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말할 때 말하고, 성경이 가라 할 때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말은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경이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이래도 저래도 상관이 없는 듯 너그럽고, 내 사상, 내 이익, 내 자손심 문
제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기준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과 삶의 모든 표준이요 기준이 됩니다.

  군대에서는 지도를 보는 독도법을 가르칩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중이라 할지라도 지도만
보면 설사 적중에서라도 살아 나올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6.25 동란 때에 국군 중에 압록
강까지 올라가서 중공군에게 여러 차례 포위를 당했다가 지도를 펴서 보고 그 포위망을 뚫
고 나와 유엔군이 기다리는 곳까지 탈출해 온 적도 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지도는 생명책
이었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살 길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이 전투에서 우리를 지키고 또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이 표시되어 있는 지
도가 필요합니다. 전쟁 중에도 생명과 승리로 인도하는 지도,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 가까이 할 때만 교회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아인스타인>은 "교회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거인과 같았다. 다른 지성들이
독재에 굴복했을 때도 교회만은 끝까지 서 있었다. 나는 처음엔 교회를 우습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한없이 찬양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에
기록되기를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 것을 알게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6절에서도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
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에게 "성경의 함축된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질문을 받고 며칠 동안 묵상하다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고 무릎을 탁 치면 "
이 말씀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다음 주일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이렇게 설
교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는 "위대하신 사랑"이요, "상을" 이는 "무한한 넓이"이요,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최고의 깊이"요, "독생자를" 이는 "최상의 선물"이요, "주셨으니"
이는 "최고로 위대하신 행위"요, "저를" 이는 "크신 주"요, "믿는" 이는 "최고의 단순성"이요,
"자마다" 이는 "최대의 초청"이요, "멸망치 않고" 이는 "최대의 구출"이요, "영생을" 이는 "
가장 귀한 가치"요,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가장 큰 확신"이라고 말입니다.

  <뽀나르 목사님>이 쓴 성경예찬 시를 읽으며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내가 피곤할 때에 성경이 나의 침대가 되고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성경이 나의 빛이 되고
  내가 굶주릴 때에 성경이 나의 떡이 되고
  내가 무서울 때에 나의 갑옷이요.
  내가 병들었을 때에 성경이 나를 고치는 양약이 되며
  내가 적적할 때에는 성경에서 많은 친구를 찾는다.
  만일 내가 일하려면 성경이 나의 기구요
  놀 때에는 성경이 나의 즐거운 풍류로다
  만일 내가 무식하면 성경이 나의 학교요
  만일 내가 빠지게 되면 성경이 나의 굳은 땅이로다.
  만일 내가 추우면 성경이 나에게 열이 되며
  만일 내가 떠오르면 성경은 나의 날개로다
  성경은 나의 지도자, 의복, 피난처, 꽃동산, 태양, 샘물, 신선한 공기로다.
  위대한 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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