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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십시오 / 시 1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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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의식하며 사십시오
시편139편:1-24

  저의 집 큰 아이가 딸인데 지금 중학교 1학년입니다. 이 애가 6살 때의 일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송탄 시청, 지금은 평택시로 포함되었습니다만, 옛 송탄 시청 앞에 있는 종로문구백화점에 갔습니다. 이곳에는 책도 있고 완구와 문구가 많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볼 책을 한 권 골랐습니다. 그 때 마침 돈이 책 한 권밖에 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인형을 하나 골라서 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돈이 모자라서 인형은 못사고 책만 사줄게?" 그러자 딸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그러면 이 인형을 주인이 모르게 그냥가져가요" 목사 딸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적이 없는데, 모르게 살짝 훔쳐 가져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안돼!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잖아!" "아빠 하나님이 하늘에서 못보셔요?" "왜 못 봐, 하나님은 다 보신단 말이야?" "못 보는데" 그래요. "왜 못봐!"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말 "천장이 있잖아요?" 아이는 천장이 있기에 하나님이 못보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하나님을 인정은 하지만, 못 보신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배운 사람은 얄팍한 지식에 눈이 멀어 전지하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바쁜 사람은 일에 쳐서 하나님을 의식할 겨를도 없습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피곤해서 하나님을 의식할 여유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 의식보다는 사람의식을 더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혹 이런 부류에 속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시편 기자 다윗이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 시편139편은 크게 네 문단으로 나뉘어집니다. 각 문단마다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의식하는지 중요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문단마다 여섯 구절씩 되어 있습니다. 시적인 형식으로 운문에 멜로디를 맞춘 정교하게 구성된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래서 한 문단에 여섯 구절 네 문단 그러니까 4, 6은 24절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의식하면서 살고 있는 지를 살펴봅니다. 우리도 다윗이 의식하는 하나님을 동등하게 의식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의식해야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어야 할까요?
  첫 번째 문단은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그 주제가 뭐냐,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는 나를 아신다. 'God knows me' 하나님은 나를 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감찰이란 내면의 깊은 곳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속속들이 나를 꽤뚤어 보신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내 전체를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에 "주께서 나의 않고 일어서는 것" 즉 일상생활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고의 영역까지 꿰뚤어 보십니다. 3절에 "나의 길과 눞는 것을 아신다. 즉 일체의 행위, 삶의 모든 족적을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4절에는 나의 쏟아내는 일체의 언어까지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5절에는 주께서 나의 전후도 과거 현재 미래도 아시는 하나님이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정말 믿고 있나요?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있나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20년 전 우리 나라가 못 먹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군대가면 참 배가 고팠습니다. 배가 고픈 일병이 근무 시간에 하도 배가 고파서 PX에 가서 빵을 훔쳐먹으려고 담을 넘었습니다. 빵도 훔쳐먹고 초코파이도 훔쳐먹고 나오다가 무지하게 재수가 없었는지 투스타 사단장을 만났습니다. 사단장은 화를 내면서 이놈이 군기가 빠졌군! 도둑질이라니 군인정신이 빠졌구만! 이 때 일병은 머리가 아주 영리했나봅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일병은 투스타 사단장에게 "사단장님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알아이마?" 일병은 다시 묻습니다. "사단장님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사병들이 많은데 내가 다 어떻게 알 수 있나?" 이 말을 듣자 일병은 도망쳐버렸답니다. 아직도 못잡았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치부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나의 전부를 아십니다. 마음의 생각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에 두렵습니까? 아니면 위로가 됩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에 더 가깝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에 두렵다면 우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을 의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문단은 7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그 주제가 뭐냐, 하나님은 편재하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없는 데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무소부제하신 하나님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는 말입니다.
8절에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신다고 했습니다. 9절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 계시는 하나님. 11절에 흑암이 두루 덮혀 있는 곳에서도 계시는 하나님, 내가 거하고 있는 자리가 캄캄한 어둠의 자리여도 거기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어디나 계시다는 생각이 고통의 일입니다.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어디나 계셔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연약했을 때 내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 주님이 여기도 계신다고 의식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지 않습니까? 내가 사막의 적막한 곳을 다니고 있을 때 주님이 이곳에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의식된다면 우리는 소망을 갖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자리가 절망의 수렁이어도, 어둠의 흑암이어도 주님이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 내 삶에 위로와 권능과 힘이 되지 않습니까.

  "하이딩 프레이스"라는 피난처라는 책을 쓴 화란의 코리템블이라는 할머니가 소녀시절에 나치 독일의 라빈슨 브르크 포로수용소에서 언니와 함께 끌려갔을 때 토리테물은 언니에게 "언니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언니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란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면 여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란다. 코리템불은 언니의 그 말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감옥에서 해방되어 나와서 쓴 책이 바로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안 계신 곳이 없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에도 계시고, 내가 홀로 있는 연구실에도 계시고, 내가 일하는 교정 한 구석에도 계시고, 방편 남짓한 사무실 내 테이블에도 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불편합니까? 아니면 새로운 힘과 능력이 됩니까? 나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과 권능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의식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얘야, 밖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널 지켜주실 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예수님은 어디에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10절에 보면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그곳에서 나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문단은 13절부터 18절까지 입니다. 그 주제가 뭐냐,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신 것을 믿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어디에 나타났다고 합니까? 본문에는 나를 인간으로 창조하심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내 장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14절 신묘막측하게 지으신 하나님, 신묘막측이란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경이스럽고 놀랍게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신묘망측으로 잘못 읽으시면 안됩니다

  나를 어떻게 지음을 받았습니까? 15절에 하나님의 놀라운 간섭으로 나를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16절과 18절에 주의 생각과 계획으로 나를 놀라게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의식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그리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고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자를 의식하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화론을 믿습니까? 아니면 창조론을 믿습니까? 진화론의 허구성은 이미 학문적으로 규명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창조론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저는 창조론을 믿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창조론을 믿기 이전에 하나님은 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이 사실을 먼저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론을 믿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인간창조는 당연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이 사실을 먼저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십니까? 나를 만드신 그분을 의식하고 사십니까? 나의 주인이신 그분을 주인으로 의식하고 살고있습니까? 전능하신 그분을 모시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왜 그리 인생 삶에 고민과 한숨을 많이 쉬십니까?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그분을 의식하고, 그분에게 의탁하며 사는 것입니다. 살아계심만 믿고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지만 의탁하지 않는 것은 자기교만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모든 삶을 의탁하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번째 문단은 19절부터 24절 마지막 절까지입니다. 그 주제가 뭐냐, 하나님은 판단하신다. 공의롭게 판단하신다.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십니까? 다윗은 자신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19절서 22절까지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23절에서 24절에서 다윗은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의탁의 기도를 드립니다. 23절에 나를 살피사 내 마음과 뜻을 알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24절에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판단해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기도합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하나님, 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계십니까? 심판자 하나님, 정확히 판단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식하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두렵습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까? 악인은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진실한 자는 판단자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며 자신있게 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다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정확히, 이루의 속에 감추어진 부분까지 정확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십니까?

  시골에 믿음 좋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다 믿습니다. 특히 그집 아들은 매우 총명해서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밭에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참외밭을 지나가는데 목이 말라서 참외를 하나 따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길거리에 지나가면 도둑으로 몰릴까봐 아들은 망을 보고 아버지는 참외서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애야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볼 것 같으면 뻐국 소리를 내고 안오면 가만히 있거라." 아버지는 살금살금 참외밭으로 기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참외를 따려는 순간에 아들의 "뻐국, 뻐꾹" 소리가 납니다. 아버지는 참외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조용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참외를 따려고 합니다. 이 때 또 "뻐꾹, 뻐꾹" 소리가 납니다. 서리를 할려다 멈췄습니다. 조용해서 다시 참외를 따려고 합니다. 그 때 또 "뻐꾹, 뻐꾹" 소리가 납니다. 아버지가 신경질이 났습니다. "누가 오고 있니?" "아니요" "그런데 왜 짜구 뻐꾹 뻐꾸 그래?" 아버지 참외를 따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이 오셔서 보시잖아요? 아들이 아버지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아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의식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간은 못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정확히 보시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 나를 정확히 감찰하시며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마침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하나님께 인생을 의탁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랑하시는 교직원 여러분, 그 하나님 믿고 있었지만, 주여 주여 불렀지만, 그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살고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한 선배 목사님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늘 의식하고 살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엄지손가락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한평생 엄지손가락을 꼭 쥐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의식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시고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나를 정확히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연구실에도 계십니다. 일 하는 교정 현장에도 계십니다. 반평의 내 책상에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면, 이제 그 하나님 의식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정확히 판단하실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비하며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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