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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할 줄 모르는데…` (예수님의 승천과 중보기도) / 롬 8:26-27; 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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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줄 모르는데…"  - 예수님의 승천과 중보기도 -
로마서 8:26-27; 누가 22:31-32

[본문]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27, 한글 개역)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한글 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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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에 있어서, 교회력(敎會曆) 안에 잊혀진 날이 있습니다. 승천일(昇天日, Ascension Day)이라 불리는 절기입니다. 승천일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사건을 축하하며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축하한단 말입니까? 왜 우리는 이날을 축하하기 위하여 교회에 간단 말입니까? 도대체 승천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절기란 말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Heidelberg Catechism)는 승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면전에서 간구(懇求)하십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주의 날' 18, 질문과 응답 49번). 무슨 의미입니까? 한가지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들을 하늘 아버지께 드리시기 전에 먼저 우리들의 그 기도들을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장(天障)에 매달려 있는 풍선들!

여러분과 나는 종종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식사를 하면서, 아니면 이러 일 저런 일 때문에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드리는 이 수많은 기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하고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나는 교회당에 들어가면서 놀라 소스라친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풍선들이 교회당 천장(天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드렸던 수많은 기도들, 그리고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드렸던 수많은 기도들이 마치 천장에 걸려 있는 풍선들처럼 교회당 천장 너머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풍선들은 바람이 빠져서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들도 '보였습니다.' 나는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기도들이 저 천장 너머로 올라간다고 믿고 기도를 드리는가? 이 모든 기도들이 하나님의 귀에 들릴 것인가? 하나님께서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들으시는가? 그분은 우리의 모든 기도들을 기억하시고 생각하시는가? 너무도 바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기도들을 일일이 다 접수하시고 들으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기도빨'(!)이 센 사람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가? 물론 그런 편협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은 아니시리라! 좌우간 우리가 드리는 수많은, 온갖 종류의 기도들이 하나님께 전달 될 것인가?

한가지 우리는 확신합니다. 믿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전달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기도들을 일일이 들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기도들을 모두 거두어 추스르고, 초점 맞추어진 기도가 되도록 다듬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면전에 기도가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울이 어디선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도를 올바로 드릴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잘못되고, 초점이 안 맞고 삐뚤어진 기도들을 교정하고 다듬고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기도하는 줄 모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깊이 한숨지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찾아 대신 중보자(中保者)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하나님)이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6-27).


기도할 줄 모르는데 기도를 해야한다니!

성경은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면(勸勉) 한단 말입니까?

때때로 성경은 양쪽을 모두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는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데살로니가 전서 5:17), 또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로마서 8:26). 도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중간에 끼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하신 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기꺼이 감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청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누가복음 22:31-32).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너를 체 속에 넣어 흔들기를 원한다. 체질을 심하게 하여 곡식알을 바깥으로 떨어뜨려 겨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못하게 하기를 원한다. 베드로야, 내게 네게 경고하건대, 너는 결코 사단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사단이 마음만 먹고 너를 잡으려 한다면 너는 그를 당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겨처럼 날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믿음은 영웅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나와 함께 고난을 받겠다는 의지나 결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믿음은 그것 이상이다. 너의 믿음은 스스로 충족하지 못하다. 너의 믿음은 나의 중보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래서 너의 믿음이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해온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도록 지탱해준 원동력은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성심이나 지조(志操)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따른 것은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성실과 애정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충분히 아신다!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지탱목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였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의 뒷면(後面)에는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속적인 중보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견고하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의 앞면(前面)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변덕스럽고, 겁쟁이였고 변절자였는가를 우리는 압니다. 자기의 주인인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런 종류의 비열한 인간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전체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실패와 연약성(軟弱性), 약점과 오점(汚點)들은 심지어 베드로의 전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중요한 부분은 뒷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면(裏面)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굳건히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라 부르는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이면(裏面)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뒷면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우 피상적으로 보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안정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이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고, 카드보드(cardboard)로 지은 집처럼 우리의 믿음이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구심점은 우리의 신앙이 넘어지거나 스러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충성하거나 변절치 않고 그를 붙잡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직도 살아 있는 절대적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변함없이 신실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유지되고 지탱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이 넘어지는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실성(loyalty)때문이 아니라,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충실성(loyalty)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지금도 믿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마치 여러분이 어린 아기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는 경우와 흡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아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여러분은 먼저 아기의 손을 꼭 붙잡을 것입니다. 아기가 걸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여러분의 손을 가냘프게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의 손을 굳세게 잡고 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우리사이의 관계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약하고 힘없는 믿음을 붙잡으시고 그분의 중보기도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굳세게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위에서 인용했던 로마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에 밝은 빛을 던져줍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약해지거나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 역시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 위중한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치 베드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곡식을 까부르듯이 사단이 베드로를 까부르고 체질을 하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음을 잃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우리가 처한 상황, 우리의 궁핍의 깊이와 크기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잘못된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할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기도하고 있을 경우가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응답은 종종 우리가 알 수 없는 형태로나, 인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영혼의 깊이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영혼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영혼에 대한 몇몇 일들이야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우리 영혼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이 겨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보이는 현상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머지 수면 밑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 혹은 우리의 의식저변에 깔려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의 잠재의식 부분이 거칠고 걷잡을 수 없는 세계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영혼의 깊은 세계는 마치 용암들이 들끓고 있는 태고의 세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초적 열망(熱望)들과 격정적인 본능(本能)들과 욕망(慾望)들이 끓어오르고 분출하는 세계입니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우리의 의식세계나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사는 방식이나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일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 영혼의 무의식 부분이나 잠재의식 부분은 너무나도 거칠고 깊고 예측불허의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성령만이 그 전체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어 보이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 도우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의 의식세계나 무의식 세계 혹은 잠재의식 세계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환한 불빛으로 껴져있는 거실이나 우리의 어두운 지하실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전부의 모습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영혼의 가장 어두운 부분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마저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우리를 대신하여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종종 우리는 영적인 고갈과 메마름을 경험합니다. 피부가 마를 때, 소위 피부의 건성(乾性) 정도가 심해 질 때 우리는 통증을 느낍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영적 피부가 너무도 메마르고 건조해 있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도 한 방울의 비(雨)도 내 입술을 적시기 않는다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물어 메마른 심령에 단비를 갈구(渴求)하여도 공허한 메아리(反響)만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너무 메말라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천장너머로 올라가고 있을까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종종 우리는 혼란스럽고 산만하여 기도를 올바로 드릴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작한 기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지경으로 우리의 영혼이 혼돈(混沌)과 혼란(混亂) 속에서 헤맬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입에서 기도가 나오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지,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연약함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돕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너무 연약하여 삶의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인생의 등반(登攀) 길에서 추락하였을 때, 더 이상 영적 침체의 계곡 밑으로 내려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우리가 너무 무지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님은 우리의 갈망(渴望)과 영혼의 고민스런 바람(願)을 ― 이것들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일 것입니다 ― 가져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해석하고 번역해서 들려 드리시는 분입니다.

승천일에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계신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승천일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천상에서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결코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들 속에서 우리와 함께 대신 기도하시며, 그 기도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쓰러지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신실(信實, faithfulness)하시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멘.


우리가 잘 아는 찬송(412장)이 오늘의 말씀을 잘 대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나니 내 형제여 주님을 곧 따르라

(2절)  주께서 풍성한 은사를 내려 내 영혼이 나날이 복 받으니
      주 예수를 그대도 구주로 섬겨 따르면 풍성한 복 받겠네

(3절)  무거운 짐지고 애타는 인생 주 예수께 돌아와 곧 믿어라
      내 주 예수 그대를 돌보실때에 참 복락과 안위가 늘 있겠네

(후렴)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주 널 위해 비네 늘 빌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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