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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 살전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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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하나님을 기쁘시게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1-8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에 95개 반박문을 써서 붙혀 종교 개혁의 날로 지정되었다. 10월 마지막 주일은 우리가 종교개혁 주일로 지킨다. 그런데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잘못된 가르침으로 곪아오던 것이 터진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천주교와 기독교로 구분되는 기회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415년 어느 날 종교개혁자 존 후스가 거리에 나왔다가 두 그림이 나란히 붙여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의 그림이요, 또 하나는 금관을 쓰고 사람들이 어깨에 맨 호화찬란한 가마를 타고 몸종들이 옆에서 양산을 바쳐 들고 로마로 입성하는 로마 교황의 그림이다. 후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종이란 말인가?" 교황이 왕이고 예수님은 교황의 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 후스는 드디어 외치기를 "누가 저 로마 교황의 가면의 벗길 수가 있다는 말이냐?" 결국 1415년 7월6일에 단두대의 이슬로 후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어느 날 마틴 루터가 교황을 만나보려고 교황청에 들어갔다. 그 때 루터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많은 추기경들이 교황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광경을 보고 루터는 너무 심령이 컬컬하고 괴로웠다. 견딜 수가 없어 위로 받고 은혜 받기를 위해서 당시 거룩한 빌라도의 사닥다리라고 일컫는 층계를 무릎으로 걸어가면서 층계하나 하나 오를 때마다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얼마나 비 성경적 이었는지 모른다. 면죄부를 팔았다. 어찌 면죄부, 종이 쪽지 한 장이 인간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 같이 검은 죄를 깨끗케 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 하는 것이다. 마리아를 숭상했다. 마리아는 죄 없는 몸으로 잉태되었고 죽은 후에 부활했고, 그리고 승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이런 기록이 있단 말인가? 교황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황보다 낮추면서 교황의 말을 성경시 했다. 얼마나 비 성경 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독하는 처사인지 모른다.

베드로에서부터 내려오는 교황의 전통을 성경보다 앞서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바울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라."(고후 5:9)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나로 인하여 주님을 향한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말씀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육신의 일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일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예배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영적인 일로 인한 봉사, 영적인 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

어느 삼류 마술사가 복음을 들은 후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 사람은 교회의 이곳 저곳을 살피면서 사람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발견했는데, 어떤 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고, 어떤 이는 밤새도록 기도로 헌신하고, 또 어떤 이는 땀 흘려 봉사하며 헌금을 하고 다른 사람을 열심히 전도하는 등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 늙은 삼류 마술사는 남들만큼 건강하지도, 부하지도, 많이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이 사람이 어느 날 예배당 안에 혼자 들어갔는데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서 문틈으로 예배당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망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줄과 꽃들이 흩어져 있고,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있고…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게다가 이 할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요란을 떤 후에 "하나님 재미있으셨습니까?"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분노하며 문을 부수려고 하자 강단의 십자가에서 천사가 내려와 수건으로 노인의 땀을 닦아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인생은 보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가?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중세는 교황을 기쁘게 하려는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슬로우건을 외쳤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고백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다. 방주를 지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대로 순종하였다.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믿음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그에게 큰 일도 맡기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신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는가?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한다. 어떻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용서함 받는가? 아니다. 잘못된 가르침이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용서함 받는가? 아니다. 어떤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다. 단 한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는다. 우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하셨다. 어떤 임금이 아들 혼인잔치가 있어서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잔치를 열었으니 함께 오셔서 축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바쁘다고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사업하러 나가고 말았다. 주인이 화가 났다. 종들에게 이르기를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다. 네 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종이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온다. 들어올 때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누가 와도 좋다. 못배워도 좋고 못생겨도 좋다. 단 한가지의 조건은 들어올 때에 예복을 입고서 들어오라. 그런데 주인이 보니 한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왜 예복을 입고서 들어오지 않았는고?"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말씀하였다.

주인이 베푼 혼인 잔치에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다. 단 한가지의 조건이 있다면 "예복을 입은 자"로 제한한다. 믿음의 예복을 입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 혼인잔치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다. 단 한가지 믿음의 예복을 입었는가? 이것을 본다.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정받는 것은 믿음의 예복을 입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지 내가 면죄부를 산다고 하여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핵심적인 고백이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이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 믿음은 나의 죄를 용서함 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믿는 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믿는다는 표현은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어느 교회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교인에게 담임목사가 찾아가서 환자를 민망히 여겨 손을 잡고 기도해 주려고 했더니 그냥 해달라는 것이다. 기도 후 숨졌기에 수의를 입히려고 이불을 걷었는데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있기에 펴 봤더니 금고 열쇠였다. 그것을 놓칠까봐 목사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질을 의지하면 우리의 인생은 마지막에 비참해 진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인생도 멋지게 살 수 있다.

권사님의 어머님이 84세의 일생을 사시고 숨을 거두셨다. 임종하기 전에 예배드리러 갔는데 백만원을 준비하여 마지막으로 가기전에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리고 가기 원한다. 평생을 사는 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표현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물질을 의지하며 살다가 목사님이 가서 손잡고 기도할 때에 그 금고 열쇠를 놓지 못하는 분하고, 마지막 순간에 지금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인생하고 너무나도 대조적이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는 세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그 중에서 그는 첫 번째 친구한테 온갖 정열을 다 바쳤다. 그는 때로 첫 번째 친구를 위해 이 세상의 삶을 산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두 번째 친구도 사랑했다. 그러나 첫 번째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비하면 두번째 친구에 대한 공들임은 한참 못 미친 것이었다. 세 번째 친구는 때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잊고 살기도 하였다. 첫 번째나 두 번째에 비하면 아주 희미한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사자가 이 사람한테 와서 왕의 부름을 전했다. 그는 친구 셋에게 함께 가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보라. 그가 온갖 정성을 다 바쳐 온 첫번째 친구가 무정하게도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이라도 같이 가줄 수 없겠는가?" 그가 사정하였으나 첫 번째 친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친구는 그러나 조금 달랐다. "성문 앞까지만 같이 가 주겠네." 그가 사정하였다. "성 안까지는 안 되겠나?" 두 번째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가장 소홀히 한 세 번째 친구가 나섰다. "내가 자네와 끝까지 동행하겠네." 이 세 친구는 누구인가…?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다. 물질이다. 아무리 정성을 다했지만 자신이 죽을 때는 한 발짝도 따라오지 않는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다. 공동묘지까지는 따라오지만 거기서 돌아간다. 세 번째 친구는 믿음이다. 마지못해 행한 것이어도 죽음 길에까지 동행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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