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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족한 한 가지 / 눅 18: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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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족한 한 가지
본문 : 누가복음 18: 18-23
김철현 목사 (예중교회)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고민 중 첫째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그리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얘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 즉 돈을 벌려고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고 고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면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고민들의 해결책은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의 고민은 누구나 노력하면 풀 수 있는 고민이라고 합니다. 둘째의 고민을 푸는 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고민은 아무도 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 번째의 고민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리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고민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 고민의 절반이나 우리가 해결하겠습니까? 해결 할 수도 없는 고민을 안고 밤을 지새기도 합니다. 음식을 먹지도 못합니다. 내가 서서히 망해갑니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를 망하게 하는 그 고민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볼라치면 그 실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슨 말이 됩니까? 우리가 안고 있는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고민거리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걱정해 해결할 수 있는 고민과 해결할 수 없는 고민입니다. 고로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고민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산을 준비하면 됩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고민의 해결입니다. 그러나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라 이겁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민이 있다고 칩시다. 무작정 머리를 싸매고 며칠 누워 있으면서 걱정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흔히들 잘하는 조용한 바닷가로 가서 며칠을 쉬면 방법이 생각나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민에서 잠시 떠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없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은 10분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만약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것을 종이에 한 번 적어 보십시오. 틀림없이 서너 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걱정거리라 할 지라도 적어보면 서너 줄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 몇 줄 안 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마치 목숨을 건 듯이 합니다마는 10분 안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나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10분을 우리는 질질 고무줄처럼 늘려가면서 하루를 허비하고 한 달을 죽이며 1년을 망쳐 버리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고민 속에 헤매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고민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민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한 관원이라고 했습니다만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지도자급 인사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지성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깊은 대화를 나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 사람은 영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보통 고민과는 달랐습니다. 흔히 있는 일반적인 고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배고픈 고통도 아니요 집 없는 한탄도 아닙니다. 직업이 없다거나 몸이 아픈 것도 아닙니다. 늘그막에 이르러 허전하고 고독한 것도 아닙니다. 이 관원은 젊고 건강합니다. 게다가 유능하기까지 합니다. 돈도 아쉽지 않을 만큼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고민이겠습니까? 지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가 안고 있는 문제는 큰 고민 거리였던 모양입니다.
성경으로 미루어보면 이 관원은 꽤나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첫째, 이 관원은 선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은 부자하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봅니다.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재산을 모았다든지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배를 불리었다고 생각들 합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부자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어떤 성도님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어서 잠시 시간을 같이 했습니다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목사님! 이 세상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천국에 못 갈 것입니다."그래요.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하고 되물었더니 "세금 탈세하고 직원들 몫까지 다 독식하고 갑자기 자기 눈앞에 돈이 생기니까 약속도 안 지키고 그렇게 돈 벌어 가지고 자기 배불리는데 그런 부자를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참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그렇게 하지 않고도 부자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라고 말은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세상의 부자들 중에는 몰염치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나쁜 짓 한 일이 없이 성실히 돈을 모았다 할 지라도 단지 부자라는 사실 하나로 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도덕적으로 문제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관원은 드물게도 비난받는 부자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둘째, 이 관원은 영적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부한 사람은 대체로 물질의 노예가 되기 쉽니다. 흔히들 가진 사람들이 더 인색하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인심이 더 고약하다고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전부로 생각하고 그 물질만 가지면 세상 것 다 가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질 가진 것으로 인격도 가진 줄로 알고, 도덕적으로도 완전한 자인 양 행세하려고 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또 다른 열망, 특히 영적인 열망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족한 게 없다고 하는 자기교만 속에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관원은 부자이면서도 영적 진리에 대해 심히 고민하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마침내 이 갈증을 풀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네가 계명을 다 아는 바와 같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을 기억하지?" " 예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이 관원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대답을 자신 있게 했습니다.
사람을 망하게 하는 요소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돈, 권력, 섹스 이 세 가지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걸려서 다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사업이 잘 안될 땐 고생하는 부인이 안쓰러워 딴 생각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아지면 그 돈과 함께 이성적 유혹, 즉 여자가 찾아옵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했던 것이 축복이 되는 것이요, 물질적 풍요가 저주입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이란 권좌에 오르면 자기의 모든 수준을 그 곳까지 끌어올리려는 심리가 발동합니다. 그래서 허세를 부립니다. 그런데 오늘 이 관원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간음, 살인, 거짓말 아무 것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자신의 결백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부자 관원의 말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돈도 있고, 출세도 했고,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착실하게 해 온 이 젊은이가 귀하다고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뭔가 좀 다른 특별한 젊은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판단하십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다고 할 지라도 영생에 관한 한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 열망하는 그 관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우리 성경에 "오히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단어는 "아직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라는 말도 영어로이 아니라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아직도 유일한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처음 대화가 시작 될 때 이 관원은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의 조건이 계명 이야기로 시작되니까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것쯤은 소시 적에 다 했던 것들입니다. 다소 흥분되고 격앙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고민하던 영생에 대한 문제가 이렇게 쉽게 풀리는구나 "생각 하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한 가지씩 계명이 떨어 질 때마다 마치 쉬운 시험 문제 대하듯이 기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자기의 모든 것을 지탱해주던 그것을 버리라는 겁니다. 다른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망하라는 이 말씀에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뼈빠지게 모은 재산인데 그게 어떤 돈인데 남을 주라니요. 그것도 제 능력이 없고, 수단도 없고, 머리를 쓸 줄도 몰라서 찢어지게 가난 속에 허덕이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그 인간들에게 피 같은 내 돈을 나눠주라니요.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 맞습니까?"오히려 이런 마음에 동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겨 봅시다.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영적 관계인 영생에 대한 문제의 해결은 영생으로라야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가장 목마르고 갈증 날 때는 시원한 생수 외에는 그 갈증을 해갈시킬 수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쥬스로도 또 다른 물로도 대신 할 수 없듯이 다른 그 무엇으로도 이 관원이 안고 나온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일삼는 그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높은 도덕정신으로 이 관원의 갈망은 해결 될 수 없는 것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고결한 준법정신으로도 영생의 문제를 가름 할 수 없는 것이요, 더군다나 오늘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진단하시는 이 관원의 삶의 중심에 자리한 그로 하여금 가장 영생에 방해가 되게 하는 물질로는 더 더욱이 해결 될 수 없는 것임을 단호하게 짤라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중심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영생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언제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오직 부족한 한 가지를 다 버리고 주님을 좇는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버리는 것, 스스로 망하는 것, 이것이 이 관원에게는 "오직 한 가지 부족 한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과연 주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을 결단해야만 너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우리 속에 어떤 결단이 서겠습니까? 보세요, 오늘 이 관원은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그 한마디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와츠(Watts)라고 하는 화가는 자기의 그림에 이 부자 관원의 등 그림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모습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그리지 안았습니다. 심지어는 옆얼굴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등은 예수님께로부터 돌려져 있고 축 늘어진 어깨와 생기를 잃고 나약한 손을 그려 넣었습니다. 힘없이 돌아서 가는 부자 관원의 모습을 기가 막히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네 생애 전부를 기울여서 나를 좇으라! 신앙을 입증하라!"는 말씀 앞에 등 돌리고 돌아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그것을 주님 나에게는 명하지 마십시오. 무리인 듯합니다. 나는 이 성질을 죽일 수 없습니다. 남의 흉보는 것 내가 가장 즐기는 취미이니까 끝까지 그냥 가져 갈렵니다. 주님이 그 모든 것이 나의 영생문제에 있어서 부족한 한 가지라고 하셔도 내가 포기되지 않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주님이 자꾸 뭐라고 하시면 할 수 없습니다. 등 돌리고 돌아서는 수 밖 에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경험하는 우리들의 등돌리는 모습 아닙니까?
나의 고집, 나의 이기심, 나의 욕망, 이 모든 것이 영생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부족한 한 가지>가 아닙니까? 끌어안고 가시겠습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주님께 등돌리고 돌아서기를 밥먹듯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법이 빗나간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이런 길을 계속가면 더한 허망에 빠질 뿐입니다. 멈추고 길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영생 위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한 가지를 다 팔아서 주는 심정으로써만 영생을 이해할 수 있고 영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거울 앞에 결단해야 할 부족한 한 가지를 찾고 주님 앞에 나오라고 하실 때에 등돌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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