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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창 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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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본문 : 창35:1-8


어떤 사기범과 절도범과 살인범, 그리고 간통범과 정치범과 한 크리스챤이 같은 감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들은 시간만 있으면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래도 신사적인 전과범이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가 하면 서로 상대방의 인격을 매도했습니다. 사기범은 자신을 처세 예술가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전과범들은 사회의 쓰레기라고 매도합니다.

절도범은 자신의 범행동기를 장발쟝 만큼 미화시키는데 일동은 사회의 쥐새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하면 살인범은 자신의 동기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로 착각하는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살인마라고 했습니다. 간통범은 자신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미화시켰으나 일동은 치사한 놈이라고 매도했습니다. 또 정치범은 혁명투사라는 의식 과잉에 걸려있는데 모두는 망국정치가라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크리스챤은 자신은 의인인 양 그 사람들 앞에 모두들 회개 할 줄 모르는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분노를 하며 설교를 합니다. 그러자 모두들 할 말을 잊은 채 벽에 걸린 십자가를 쳐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 옆에서 말없이 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다는 것과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해야 할 일인지,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깨닫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듯이 자기한테 맞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늘 마음 속에 갈등과 방황이 있습니다. 싫어도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지, 그렇게 다른 일을 시작하면 과연 실패하지 않고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는지, 이런 고민들이 늘 그의 머리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얼마나 빨리 발견하느냐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교육이 바뀌어야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적성교육이니 인성교육이니 하는 말들이 이래서 필요한 것이죠. 내가 누구이며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 졌느냐를 깨닫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자신에 대해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불행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대부분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개관적인 평가에 아주 못마땅하게 반응합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 사는 멸치가 꿈을 꾸고 다른 물고기들 앞에서 자랑을 했습니다. "꿈에 내가 하늘로 올라가서 나무다리를 건너고, 흰눈을 맞고 춥다가 덥다가 하는 꿈을 꾸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마 내가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계절을 바꾸고 할 것 같아."라고 우쭐대자 모든 물고기들이 부러워하면서 멸치의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가자미가 "웃기지 마라 내가 생각해 보니까 그 꿈은 지렁이도 못되는 꿈이야! 내 생각은 달라 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낚시에 다른 고기들은 다 통과했는데, 멸치 너만 까불다가 낚싯대에 걸려 하늘로 높이 올라간 것이고, 나무다리를 건너 간 것은 어부의 집에 간 것이고 어부가 소금을 친 것이 네가 느낀 눈이었어. 그리고 불에서 요리하니까 추웠다가 더워진 것이야."라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멸치를 한 순간에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멸치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가자미의 뺨을 후려갈겼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가자미의 눈이 돌아갔고, 손가락 만한 멸치의 돌출행동에 놀란 문어는 겁이 나서 눈을 발 밑에 숨기고, 상어는 웃다가 입이 찢어지고, 새우는 어찌나 웃었던지 허리가 다 꼬부라지고, 꽁치와 갈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다가 상어처럼 될까봐, 너무 입을 모아서 입이 뾰족하게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자기착각,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인식부족이 내 인생을 아주 어렵게 만들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얻어야 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의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 가장 야곱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일찍이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옛날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을 그의 삶의 중심에서 모시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벧엘이라는 곳이 야곱의 기억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가진 것 하나 없이, 동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도망치다가 빈들에 쓰러져 잠들었었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벧엘은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벧엘은 가장 낮고 비참하며 무력하게 쓰러졌던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이 가지는 의미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서원을 한 후 야곱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야곱의 생애에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잊혀지지 않는 의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 벧엘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야곱에게 내리십니다. 그런데 아마 야곱은 벧엘의 기억으로 돌아가기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그렇게 낮아지고 싶지 않고 비참한 삶을 떠올리기 싫었던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평소에 야곱에게는 "벧엘에 돌아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아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 아픈 기억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직까지 이 세겜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가 진정한 신앙을 가졌더라면 아픈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를 돌보시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억했어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벧엘로 올라가지 못하고 육신이 편안하고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이 곳 세겜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겜이라는 곳에 다다라보니까 물도 많고, 풀도 많아 가축을 기르기에는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없거든요. 그런 곳에서 생각하기를 벧엘에 가봤자 황량한 들판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게 실수입니다. 벧엘에는 물도, 풀도 세겜 만큼 풍족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야곱이 왜 이것을 생각 못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비단 야곱의 문제이겠습니까? 사람은 편안하면 안주하고자하는 마음이 생기기 쉽거든요.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 앞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벧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약속 장소인 벧엘로 돌아가게 하셨고 거기에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깊이 새겨 본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말씀은 야곱의 신앙을 다시 세워 주는 말씀입니다. 잠들어 있는 신앙, 안주하고 있는 신앙, 실패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은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형 에서와 헤어진 후 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세겜 땅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야곱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그 곳 세겜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살길인지 곤경에 처해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당한 것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의 남자는 전부 죽여 버렸고 아이와 여자와 재산은 모조리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본토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보통 큰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곳에서 이 사람들과 결과가 뻔한 싸움을 하다가 죽던가 아니면 무조건 도망치는 일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야곱에게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란으로도, 애굽으로도, 그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사건 앞에 야곱이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인간적인 계산 방법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인 수긍을 합니다. 분명히 전과는 달라진 야곱의 모습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남아있었다면 벧엘이 더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방이 뚫린 빈들로서 가나안 사람이 공격해오면 전혀 방어 할 길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변했습니다. 보세요, 야곱은 벧엘로 가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더 철저히 순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세 가지 결단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첫째결단이, 자기들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때그때 적절히 필요한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자기들이 섬기는 신중에 하나로만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나오는 귀고리는 요즘처럼 단순한 장식품의 하나가 아니라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모두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찬양을 했지만, 집 구석구석마다 우상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호신용 장신구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들 중에 혹여라도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그 하나님을 대신할 그 무엇인가를 부적처럼 의지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미치는 벧엘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야곱의 그 결단의 두 번째는, 그 가족들에게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말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적 변화를 요구하는 말입니다. 지금 까지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했고, 자신들의 편리한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마음가는 대로 생각이 이끄는 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음란을 위하여 치장하고 영적 신앙을 좀먹는 거짓과 술수를 계획적으로 일삼았습니다. 그러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의도대로 되어 질 때 점점 하나님과는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도 전혀 의식조차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쾌락을 위하여 마냥 전심전력했던 그 행위를 청산하고서야 벧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아름다운 자리로 나가시기를 원하는 여러분! 자신을 정결케 해야 벧엘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야곱은 "의복을 바꾸라"는 말로 그 결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옛 옷을 벗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고 삽니다. 여기에서 "옷"은 <제복>을 의미합니다. 경마에서 기수가 입는 승마복이나 축구선수가 입는 유니폼, 경찰들이 입는 경찰복 등을 통칭해서 <제복>이라고 합니다. 이 제복을 보고 그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은 그 제복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왜 교복을 입힙니까? 학생다운 행동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말이 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외적인 변화까지도 이루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옷 입고 있습니까? 진정 주님으로 옷 입고 있습니까? 직장이나 학교 또는 이웃관계에서 남들과는 좀 다르다고 인정을 받고 사십니까? 그 어떤 모양으로든 옷을 입고 있을 텐데 그 옷이 어떤 옷입니까? 바꾸어 입어야 할 옷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잠옷을 입고 외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정장을 하고 수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옷을 입고는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은혜 베푸시는 벧엘에 올라 갈 수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야곱을 보세요. 이 모든 것들을 상수리 나무아래에 묻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으로 그것들을 완전히 매장 시켜 버렸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셔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며 벧엘에까지 인도해 주셨다고 본문5,6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의 참 맛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세상을 한 번 돌아다봅시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겜으로 내려가고 있거나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겜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으면서도 의식도 못하고 결단도 하지 못하는데 그 문제가 우려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추스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은혜를 사모합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먼저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서 행복을 얻으려는 환상을 깨뜨리라는 얘깁니다. 그 곳에는 절대로 참 안식이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분명히 죄인 것을 붙잡고 죄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내적인 어리석음의 끈을 그만 놓으라는 얘깁니다. 죄의 생각과 죄 지을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복을 바꾸어 입어야 합니다. 세상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인간냄새 물씬 풍기는 생활의 누더기를 걸치고도 태연한 척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스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흠씬 배어나는 결단의 삶으로 벧엘로 올라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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