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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을 마치려 하는 자 / 행 20:17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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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일을 마치려 하는 자 
본 문 :  사도행전 20 : 17 ∼ 25 


여러분, '참새 시리즈' 라고 하는 유머를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전기줄에 참새 한 쌍이 앉아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냥꾼이 총을 쏘았습니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마누라 참새가 전기줄에서 떨어지면서 남편참새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게 시대마다 다르답니다. 그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죽으면서 뭐라고 말했는가 하니 "부디 몸조심하시오" 그랬답니다. 60년대에는 "먼저 가서 미안하오", 70년대에는 "내 몫까지 살아주", 80년대에는 "날 두고 가지마오", 90년대에는 "아무리 급해도 내 장사는 치뤄주고 장가드시오" 그랬답니다. IMF 이후에는 "혼자서 욕 좀 봐요. 나 먼저가요."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살아남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살아남은 사람, 욕보게 생겼어요. 이미 가는 사람 "나 먼저 가오" 그런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도 않고 요행히 살아있다는 것이 그 복도 아니고, 이제 남은 생을 산다는 것이 난감하거든요. 그래서 먼저 가면서 하는 말이 욕 좀 보라고 '나 먼저 갑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차피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끝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몰라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일을 마치려 함에는." 일을 1단계로 마치는 것이요. 소아시아 근방에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릅니다. 그 마음속에 로마로 가고저 하는 소원은 간절합니다만은 하나님이 허락하실는지 모르겠고요 또 언제 어떤 모양으로 가게 될는지, 그것이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큰 핍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나는 내 사명을 위한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 한 단계 여기서 매듭을 짓고 다음 단계로 시작하노라"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프렌시스 자비에르 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스페인 사람입니다만은 포르투칼의 요한 3세 왕의 요청으로 그는 왕의 파송을 받아서 인도, 중국, 일본까지 그 당시에 선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선교의 선구자라고 불리워집니다. 그가 선교지 현장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 자기를 보내준 왕에게 유언 겸 중요한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내용 중간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느 날엔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시간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끝 날의 결산을 위하여 겸손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하며 오늘을 살기 바랍니다." 이런 심각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왕, 권세자라고 자기가 만능이 아니에요. 자기 위에 권세가 있고요. 내가 나의 생을 내가 사는 것 같아도 나를 지켜보시는 자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되요. 언젠가 그 앞에 반드시 서야 되요. '그 시간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십시오' 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현시점에서 지난날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고 또 현재를 생각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마치 운동경기자인 것처럼 '달려갈 길을 마친다' 그랬습니다. 지금 출발점에서 이 골인장소를 향해서 결승점을 향해서 열심히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제 결승점이 눈앞에 보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합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할 일이 뭐냐고요. 그는 여기서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섬김과 그리고 거리낌없이 복음을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열심히 열심히 전했노라. 그리고 오늘 내가 이 일을 마감하려고 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심각하게 현 시점에서 그는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이면서 유명한 '파커 팔머' 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That Your Life Speak' 라고 하는 책에서 아주 중요한 인간의 소명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또 한 구절이 너무도 충격적인 중요한 말씀이기에 소개해 봅니다. "소명이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명이란 내 욕망을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그가 이미 내게 주신 바가 있어요. 주신 바 생애가 있고 주신 바 지혜가 있고 주신 바 물질이 있고 주신 바 건강이 있어요. 그 속에 이미 소명이 있다는 말씀이죠. 그 소명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하고 말씀합니다. 좀더 나아가서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인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에 대한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본연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문제는 '나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하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내 스스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이죠. 여러분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까? 내 마음대로 태어났습니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보이지 않는 그의 손길이 있고 그의 능력이 있고 그가 내게 향하신 경륜과 시나리오가 따로 있었어요. 내 주인 되신 분께서 나를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인도해서 오늘에 이르게 하심을 여러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깨달아야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누구의 것이냐? 누구의 손에 붙들리어 내가 여기에 왔느냐?' 깨달아야 합니다.
러셀의 "행복론" 이라고 하는 책이 있지요. 그 속에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줍니다. 자신의 힘을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쉽게 말해서 겸손이 행복의 비결이다 그 말이요. 여러분 혹 불만이 있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이죠. 고민이 있습니까?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이요.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그것도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겸손하게 생각해 보세요. 아무 걱정거리도 없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성공에 대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못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는 이럴 수가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이건 기적이에요.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만은 교역자는 교인들의 고백을 통해서 많은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처음 어린애를 낳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아들도 아니고 딸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애를 낳아놓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좋아하는 거예요. 얼마나 감격하는지 아십니까? "요것이 얼마나 예쁜지 손가락 다섯 개가 분명하고요, 눈망울이 똑똑 하고요, 이런 기적이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왜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그것은 "목사님, 저는 결혼 전 처녀 때 방종하게 살았거든요. 방탕하게 살면서 두 번이나 Abortion, 중절 수술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결혼도 못할 것이고, 물론 어린애를 못 낳을 것이고, 만일에 낳는다면 병신을 낳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암울한, 암담한 생을 저주스럽게 살아갔어요." 그가 이렇게 겸손해서 그랬는지, 그를 사랑한 남자가 있어요. 그 과거를 다 알고 결혼을 했어요. 놀랍게도 이런 아이가 태어났다는 거예요. "이건 기적입니다. 내 모든 죄를 사했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게 없어요." 너무 너무 행복해 하는 그 천사같은 얼굴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축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만큼 살 수 있는 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어디 복받을 것이 있습니까? 무엇으로 불평을 할 것이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인데.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은혜요 은혜만이 아니고 기적이요. 기적이에요. 여러분, 모르시죠. 저는 두 번 유학을 하면서 소위 유학을 해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60년대 초에 유학을 떠날 때 저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저는 북한에서 나와서 영어를 공부한 일이 없거든요. 흔히 말하는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여기서 검정고시를 보고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토플 시험 600점을 맞고 프린스턴을 간단 말입니까? 저 대학에 들어서는,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에 제 감격은 이루 말도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여기 왔단 말인가? 어떻게 내게 이런 기적이 있단 말인가?' 여러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성공이라도 이 자체가 기적이요. 그대로가 기적이라 이거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감사와 찬송뿐이죠.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말이에요 '실패에 놀란다' 그랬어요. 뭐 잘못되면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어찌 내가 이렇게 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까? 그건 교만이에요. 주인의식을 버리세요. 애당초 내가 주인이 아니거든요. '운명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나는 그리스도께 잡혔다,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었다, 그것이 자기 정체의식이에요. 그리고 한평생을 살았어요. 이제 그 일을 마치려 합니다. 내게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이제는 그만 하라는 거예요. 그러시다면 그러시죠. 여기에 아무 원망이 없어요. 바울은 생각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노라. 그 누군가는 거두겠지." 나는 심는 것으로 족해요. 그는 파이오니아 식으로 족해요. 그는 심는 것으로 족해요. 그는 시작하는 것으로 족해요. 다음은 다음대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신 것처럼 다음 단계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다음 단계를 이루겠지요. 그것을 믿기에 그는 심는 자로서 심고 돌아서면서 유감이 없어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죠?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에요. 뭘 다 이루었어요? 많지도 않은 열두제자 가운데 하나는 가룟 유다예요. 수제자라는 사람은 예수 모른다 그러고 도망갔고. 도대체 이 시원치 않은 업적을 놓고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뭘 했다고 다 이루었다는 겁니까? 그러나 그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은 그 깊은 속에 엄청난 신비로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만백성을 위하여 오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으로 하여야 할 일, 예수님에게 맡겨진 일, 다 이루었어요.
오늘 여러분,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까지 보면 되겠습니까? 내게 맡겨진 일만 내가 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명에 충실하고 또 미련이 없습니다. 그는 배우는 단계가 있었고 전도하는 단계가 있었고 그리고 오늘은 마감하는 단계에 옵니다. 이 last stage,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또 한번 겸손합니다. '주께서 나를 이제는 마지막으로 순교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보다.' 전에도 몇 번 죽을 뻔했지만은 이제는 가는가 보다. '예, 그러시면 그러시지요' 하는 그런 자세올시다. '그런고로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마치 경기장에 서있는 사람처럼 경주자처럼 일생을 달려왔지만은 이제 저 앞에 결승점이 보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노라. 이대로 마지막 단계를 마치려 한다' 하는 고백입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님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해서 유명한 얘기로 전해집니다. "오늘밤 열두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준비하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심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먼저,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에 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지 않고 30분 먼저 잠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지막 단계를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한해가 갑니다. 그만큼 우리는 죽음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한 해가 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 만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일생에 살아오던 길을 마치려 함에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아무 미련 없이 새로운 결단을 가지고 생을 마감해야 되겠습니다. 마감을 해야되요. 근사하게 마쳐야 되겠어요. 마지막 작품을 그려야 되겠어요.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르겠다. 환난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에 있어서 나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사간에 모든 문제를 모든 욕망을 모든 인간의 생각을 다 포기하고 오늘까지 나를 쓰신 주인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부르시옵소서. 마지막까지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한 귀한 고백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은혜이건만 우리는 원망도 많았고, 모든 것이 기적이지만은 우리는 또 다른 소원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주여, 철저하게 겸손하게 하시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한 해를 결산하게 하옵소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직 은혜와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길도 주께 맡기오니 주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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