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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초적 교회의 속성 / 행 2:43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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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원초적 교회의 속성
본 문 :  사도행전 2장 43절 ∼ 47절 


미국에 노스케롤라이나에 샬롯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갈보리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있고, 거기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이 글랜 와그너(E. Glan Wagner)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유명한 분인데요 그 목사님이 아주 특별한 제목의 책을 쓰셨습니다. Escape from Church Inc. '교회 주식회사로부터의 탈출' 여러분,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몇 일전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들었어요. 믿지 않는 분이 저희 교회 교인을 한 분 만나서 이러더랍니다. "제가 돈을 몇백 억을 낼텐데 그 곽목사님 저한테 줄 수 없습니까? 교회를 하나 세워 가지고 그 분을 모셔 오면은 그 기업이 잘될 거 같은데"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저 은퇴한 다음에 가면 어떨까 생각을 좀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주식회사' 어떻게 들려집니까? 이 교회의 속성과 모습이 변해가는 그런 답답함과 괴로움을 이렇게 호소하고 또 일깨워주고 있는 겁니다. 이분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첫번으로 부임한 교회에 갔을 때 교회의 대표 분이 나와서 이렇게 처음 부임한 목사님께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이제 당신은 향후 6년 동안에 진행될 전략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최고 경영자가 진행하는 20가지 사업의 목표를 여기에 아주 명확하게 써 놓았습니다. 참고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는데 이 목사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대요. '내가 지금 어디 왔나?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 왔는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그 교회에 대표가 이 목사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멘토링이 아닌 경영, 양육이 아닌 숫자, 사역이 아닌 관리, 사람이 아닌 프로그램, 그리고 목자가 아닌 사장으로서의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주식회사, 교회 주식회사로부터의 탈출, Escape from Church Inc. 이런 책을 그가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면서 말씀하십니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원문 상으로는 확실합니다.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그 깊은 뜻을 잠시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예수님 자신이 세우고, 또 그가 지켜가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주님이 그 교회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주의 이름을 불러 찬양을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기도합니다.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로 여기에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있으리라' 주님이 계셔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에는 단순한 사건처럼 보이지마는 이 사건 속에는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있을뿐더러 역사를 바꾸어 놓는 이 의식 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고 또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다메섹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딱 막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랬습니다. 이 한마디가 사도 바울을, 사울을 바울로 만든 겁니다.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교회를 핍박했지요 예수님을 상대로 핍박한 건 아니죠.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핍박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핍박받는 교회와 자기 자신을 아이덴티파이(Identify) 한 것입니다. 동일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여러분, 교회를 환영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것, 아주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기서 깜짝 놀라고 생각을 확 바꿉니다. 그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평생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 아주 원초적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끔 저는 목사님들 모이는 세미나에 강사로 초대받아 갈 때가 많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상하게도 평범하고도 또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습니까? 저는 거기에 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라. 그러면 교회가 부흥될 것이다.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숫자적으로 늘리려고 애쓸 필요 없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순수한 교회, 보다 더 원초적 교회로 갈 것이냐, 원초적 교회로, 보다 더 순수한 교회가 되게 하는 거기에 중점을 둬라. 그래서 교회에 그 순도가 순수성이 초대교회로 가까이 가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흥되는 것이다. 그 누가 부흥시키는 게 아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저는 주장합니다.
교회가 어디입니까?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 어려운 신학적 용어를 하나 쓰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 성육신 된 교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셨고 문화 속에 오셨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예수가 그 말씀이 오늘은 교회라고 하는 옷을 입고 교회로 성육신 되어서 현존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중요한 문제가 이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면 그게 교회입니다. 건물이 있던 없던 그게 교회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제게 물어 봐요. "북한에 교회 있나요?" 하고 물어봐요. "있지요." "교회가 몇 개나 있나요? 교인이 몇 명이나 있나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교회는 주일날 11시에 모여서 예배보는 그 교회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그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물론 교회 있지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 있고.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어떤 사람이 모여서 어떤 행사를 한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주관적 신비주의의 공동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은 있는데 성령이 없으면 그건 지극한 이성주의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흔히 말하기를 인스티튜셔널 쳐치 (Institutional Church) 라고 합니다. 자, 이제 아주 말라버린 지식만이 있습니다.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고 객관적 계시가 있고 주관적 계시가 함께 있어서 주님께서 친히 교회를 통하여 많을 사람을 부르시고 많은 사람을 만나주시고 많은 사람을 중생케 하시고 구원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친히 역사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익졸티드 크라이스트(Exalted Christ), 십자가를 지시고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영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계셔서 교회는 교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적 교회, 그 케뤼그마적 교회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많은 말씀을 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고 많은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의 말씀하시는 바에 감동되고 그의 이적을 보면서 깜짝 놀라고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누가 병이 났느냐 누가 죽었다 살았느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래 처음에는 병 고치는 의사로 그 다음에는 능력을 나타내는 분으로 그 다음에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로 이렇게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점점 나가다가 마침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거죠. 그 말씀과 그 사역 그 이적을 보면서 그 표적을 보면서 그 표적의 본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What이 아니고 Who올시다.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만왕의 왕이시다, 만주의 주가 된다' 하는 고백을 하게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그것이 연장선에서 말해줍니다. 뭐냐하면, 이제는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는데 영으로 하사 역사하게 될 때 사도들을 통해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 권세가 있고 사도들이 환자에게 손을 얹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벌떡 일으킵니다. 이런 사건들이 이루어집니다. 이 표적, 이 표적을 통하여 그들은 또 생각합니다. 뭐 그 이적이 희한하다던가 놀랍다던가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게 누구냐 이거예요. 저 사람이 베드로가 아니냐, 갈릴리어부가 아니냐 이거예요.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런 역사를 이룬단 말이냐. 옳거니, 베드로 저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그리스도가 선택한 분이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분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입에 함께 하고 있다'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런 고로 베드로 그 인간적인 존재 그 누구냐 그 과거가 어떠냐 상관없습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혹 교회에 나와서 교역자를 볼 때 교역자의 인물이 어떠냐 키가 어떠냐 학벌이 어떠냐……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그 순간 교회가 아닙니다 벌써. 어떤 사람은 참 짓궂게도 목사님한테 책을 하나 사다 드렸대요. 그리고 다음 주일날 가만히 보았더니 그 책 안 보더래요.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출입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서 말씀이 나타나고 성령이 나타납니다. 그리하게 될 때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이올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고 사도들과 함께 하시고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기 위하여 교회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성경에 보니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랬어요. 이거는 심판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고 벌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고 저주를 두려워한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이게 뭡니까? 교회는 우리가 찾아들 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돼요. 이 경건이 있어야 되요. 경건이 떠나면 교회가 아니에요. 요새 어떤 교회 보면 난장판이 되가지고 있어요. 댄스홀인지 교회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거는 잘못된 거예요. 교회는 경건해야돼요. 신령한 두려움이 있어야돼요. 여기는 주님이 계신 곳이에요. 주님의 말씀이 계신 곳이에요. 주님을 만나는 곳이에요. 내 기도가 응답되는 곳이에요. 그런 고로 경건한 신령한 두려움이 있는 곳이에요.
동시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서 배우는 곳이에요. 알고 보면 사도라는 사람들이 갈릴리 어부입니다. 그로부터 무얼 배운다는 얘기입니까? 학벌이 있습니까 지식이 있습니까 과거경험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사동역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오늘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증을 얻고 사도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계속적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고는 바로 섬기게 됩니다. 봉사하게 됩니다.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들은 섬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꾸어졌습니다. 오랫동안 예언해 오던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성취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약속해주신 재림의 날을 기다리면서 그들은 아무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도들을 두려워했고 교회를 두려워했습니다. 신령한 역사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도 문제가 아니고 핍박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담력, 그 충만함, 이게 교회의 본체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했습니다. 너무 감사 찬양할 동안에 생각이 확 바뀌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이기심에 대한 극복입니다. 이기심에 대한 극복.
신학자 데이비드 그린핀(David R. Griffin) 이라고 하는 분이 '갓 앤 릴리젼 인 포스트모더니즘(God and Religion in Post-modernism)'이라고 하는 책을 씁니다. 그런데 현대인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주의에 노예가 된 사람들' 그랬어요. 절대규범이 없어요. 또 하나는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 최종적 의미가 없어요. 물질주의에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 대신 물질을 따라가고 있더라. 또 하나는 '군국주의'요. 힘을 믿고 있어요. 권력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신부족주의'라고 말합니다. 평등을 외치면서 당을 짓고 자유를 외치면서 속박하는 사람들이에요. 이것이 현대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로부터 탈출해야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필요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불란서에 유명한 카톨릭신학자인 데이야르 드 샤르땡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3대 덕목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것에 의해 평가된다. 퓨리티(Purity), 채리티(Charity), 셀프 디나이얼(Self-denial)' 이렇게 말합니다. Purity, 순결입니다. 죄악 세상에 살면서 죄악에 물들지 않고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해지지 않는 거예요.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아도 자기는 사랑하고 있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정절을 순결을 지켜 가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Charity입니다. 사랑이올시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리스도인의 표식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세상 복잡한 거 같아도요 딱 정리해보면 두 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빼앗는 세상, 하나는 주는 세상. 사람도 두 사람밖에 없어요. 하나는 소유 지향적인 사람, 그저 가지고 또 가지고 또 가지고 그저 가지고 가지다가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가는 사람, 이게 바로 또 하나의 부류의 사람이에요. 또 하나는 주는 사람 베푸는 사람, 또 한사람은 언제나 얻는 것을 기뻐하고 살아요. 소유를 기뻐하고 살지만 한 사람은 베푸는 것을 생각하며 베푸는 기쁨으로 삽니다. 거기에 큰 차이가 있어요. 공산당 빼앗는 사회예요. 기독교인의 사회라는 건 베푸는 사회요. 간단해요. 공산당이 뭐냐고요, 빼앗는 거죠. 빼앗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는 거죠. 못 빼앗기 때문에 죽이는 거죠. 그런 사회가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베푸는 거죠. 생명도 주고 물질도 주고 뭐든지 주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냐고요, 다시 한번 물으세요. 받는 것이 얼마고 주는 것이 얼마입니까?
여러분, 교회도 그렇답니다. 주는 교회가 교회입니다. 저희 교회는 전 예산의 75%를 밖으로 줍니다. 25%만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 베풉니다. 다 주어버립니다. 교회는 재고가 없는 거예요. 다 주어버립니다. 우리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요 교회는 큰 거 같으나 85%를 자기 교회에서 사용합니다. 그거는 교회의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얼마나 주느냐, 얼마나 베푸느냐에 따라서 인간도 사회도 교회도 평가되는 것이에요. 교회를 구약으로 돌아가 보면 방주라 합니다. 무조건 방주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적 위치는 절대로 절대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소망교회는 확실히 하나님의 경륜과 큰 은혜 속에서 세워집니다. 누구도 이 교회를 계획한 사람도 없고 생각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세우셨고 주께서 부흥케하셨고 주께서 지켜가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섬겨야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를 어머니로 섬길 때 그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주시사 이곳에 교회를 세우시고 주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역사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이제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더하사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사랑하고 섬기며 그리고 베푸는 사람으로 살아서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한 지체로서의 생을 살아가게 하옵시고, 주는 이 교회를 통하여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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