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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의 교회 / 사 62:6 ~ 7, 10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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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의 교회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62:6 ~ 7, 10 ~ 12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아가거라, 성 바깥으로 나아가거라. 백성이 돌아올 길을 만들어라. 큰길을 닦고 돌들을 없애어라. 뭇 민족이 보도록 깃발을 올려라.  보아라, 주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신다. 딸 시온에게 일러주어라. 보아라, 너의 구원자가 오신다. 그가 구원한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그가 찾은 백성을 앞장 세우고 오신다.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라 부르며 '주께서 속량하신 백성'이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너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도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3:21 ~ 26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5:2 ~ 10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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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도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내용입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여러분들 독감 들지 않게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어제께 우리 교회 지천회가 주최하고 중우회가 후원한 행사 하나가 과천 대공원에서 있었습니다. 부청하 집사님과 박영애 집사님이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하고 계신, 상록원의 아이들과 같이 지냈는데, 저는 마지막 기도회 때에 갔습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지금에야 말씀드립니다만, 굉장히 떨었습니다. 아이들이 기도회를 하는데, 이 아이들이 얼마나 추울까, 마음도 추울 텐데, 하나님의 위로와 우리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하게 전해졌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 앉은 유치부 학생쯤 되는 아이가 추워서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고 빨리 세상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대공원을 그날 처음 가봤습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 것을 듣기만 했지,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단풍에, 호수에, 주변 경치에, 우리나라에도 참 아름다운 공원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이 선물을 정말로 만끽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했습니다.
제가 어저께 행사를 생각하면서, 처절한 고백 하나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입양된 아이와 그 아이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50년대 후반에 입양이 되어서 미국에 간 아이 이야기인데, 입양해서 어릴 때는 잘 지내더니, 고등학생이 되고 머리가 커지고 자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반항아가 되었다고 합니다.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불량배들하고 어울리기도 하고, 패싸움도 하고,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하는 대듭니다. “아버지 왜 내 머리색깔은 검습니까? 왜 내 피부색은 하얗지 않고 브라운 색입니까? 그리고 왜 나는 불량스런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왜 나를 입양했습니까?” 너무 반항이 심해지자, 하루는 아버지가 아이를 불러다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너는 속칭 버려진 아이가 아니다. 아주 훌륭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다.” 그러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1․4 후퇴 때, 종군기자로 한국에 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후퇴하는 대열을 따라 서울에서 차를 타고 대전 쪽으로 내려가다가, 밤길에 조치원쯤을 지나게 되었는데,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이상한 물체 하나가 비쳐서 차를 멈추었습니다. 차에서 바라볼 때는 마치 큰 새우가 길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려서 보니, 어떤 젊은 여자가 벌거벗은 채 새우처럼 웅크리고서 무언가를 꽉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끌어안고 있는 것을 펴봤더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피붙이였습니다. 1월이니까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그 추위에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살리려고 겉옷, 속옷 다 벗어 아기를 감싸고,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고 있다가 얼어 죽었습니다. 이것을 본 이 종군기자는 애절한 모성애에 너무나 감동해서, 기도를 드린 다음에 이 어머니를 조치원 근방에 묻고, 그 아기는 인근에 있는 고아원에 전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일단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 한국에 다시 돌아와, 이 아이를 찾아서 입양을 했던 겁니다.
반항하던 그 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달라졌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의과대학에 진학을 해서 결국 흉곽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의관으로 자원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추운 겨울 1월 어느 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 가서, 옷을 벗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말했답니다. “어머니, 그 옛날 그날 밤은 오늘보다 더 추웠겠지요! 이제 평안히 계십시오.” 이 이야기가 군의관이 된 아들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전쟁의 소문, 폭력의 소문을 듣습니다. 결과는 언제나 한 가지입니다. 누가 시작하고 또 그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벌거벗고서 새우처럼 웅크린 수많은 여인들을 양산하는 것입니다. 피붙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희생양이 되어서 죽어갑니다. 우리나라 전쟁 때 그랬고,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이 그렇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나 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자들이 생겨납니다. 누구를 위한 전쟁입니까? 누구를 위한 체제입니까? 누구를 위한 희생입니까? 대다수가 피해자가 되는 오늘의 현실!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
이 종군기자는 1․4 후퇴 때, 아기를 살리려고 목숨을 버린 그 어머니를 보고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 도대체 뭐하십니까? 왜 이 여인은 이렇게 죽어가야 합니까? 이 피붙이는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당신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이런 답변을 주셨답니다. “나는 이 젊은 어미의 희생적 사랑에 감동하여 아이를 살리려고 한다.” “어떻게 살려 주신다는 말입니까?” “그 일을 위하여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이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사야가 다급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드시 매일같이 상기시켜야 될 것이 있습니다. 약속한 구원을 지금 베풀어주십시오. 약속한 위로를 지금 주십시오. 약속한 생명을 지금 죽기 전에 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새 나라를 만들 때까지 하나님께 계속 상기시켜 드리고,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져야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다 모여서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십시다. 이렇게 해놓고서 그 하나님이 오실 길을 광야에 예비하십시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출발했던 이스라엘 역사에 단절이 생겼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에게 복 주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시라고 자꾸 상기시켜드리며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야웨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집을 짓고, 성전을 짓고, 제단을 만들고, 체제화하고, 그러고 나서 그 안에 안주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성안과 성 바깥 사이에 단절이 생겼습니다. 마치 갇힌 동굴 같습니다. 이것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옥에 가두고 놓았으니, 그 말씀이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율법이 뭡니까?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둬 놓는 것, 그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틀 속에 묶어 놓는 일, 자기 판단 속에 가두어 놓는 일, 그것이 다름 아닌 율법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말씀과 하늘의 음성이 우리 속에서 들릴 수 없으면, 나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내 마음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문장이 아닙니다.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가두어서,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이 율법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타파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타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묶여 있는 그 말씀을 해방하여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하나님이 생명의 주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과 비교되는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법을 단단히 묶어서, 인간의 의,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만든 의 속에 가두어 두었으나, 하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육을 입고 오셔서 새로운 법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구원받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율법 조문에 묶임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믿고 의지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 그걸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 종교가 뭡니까?”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 당신은?” “난 불교”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종교인입니까? 사회규범상 그렇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에서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하면, 종교라는 틀 속에 빠져 있는 한 구성원에 그친다면, 그것은 율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가 많고 억압과 폭력이 지배한다고들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이 눈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지금 전쟁 일보 전에 있다고 걱정합니다. 사람들 말이 이제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종교전쟁 비슷한 게 벌어진다고 합니다. 종교전쟁은 오늘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우리 자문자답해보십시다. 종교는 전쟁을 수많이 일으켰습니다. 앞으로도 일으킬 겁니다. 그러나 신앙이 전쟁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전쟁을 초래한 일이 없습니다. 전쟁은 신앙을 화석화한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졌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종교는 신앙을 담을 그릇이 못 됩니다. 화석화한 종교, 타락한 종교는 신앙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날, 우연히 「헤럴드․트리뷴」지를 사서 보았는데, 우리 일간지에도 조금 인용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뉴욕 타임즈」가 이라크의 부수상인 타릭 아지스와 인터뷰한 부분을 잠깐 읽어보았습니다. 타릭 아지스가 하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북한은 핵을 개발했다고 시인했는데도 불구하고 군사 공격이나 전쟁을 고려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한다고 하는데, 이라크는 핵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핵 개발했다고 시인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감행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판단으로는, 그 이유는 이라크는 북한에 없는 두 가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라크는 석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라크 주변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미국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는 석유가 없고, 이스라엘이 없어서 평화적인 해결이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남쪽이든, 북쪽이든, 우리가 만일 석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혹시 남쪽이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북한은 핵 개발까지 하니까 아마 유엔안보리 결의 없이 그냥 즉각 한방 먹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반도에 핵이 없어야 하고, 설령 핵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도, 그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똑같은 방식으로 중동과 이라크에도 평화적 해결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전쟁과 폭력이 있는 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백 만, 수천 만의 희생과 죽음이라는 비극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혹시 우리에게 지금 석유는 없으나, 석유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평화의 말씀이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살리게 될 수는 없을까요? 우리한테 낡아빠진 이스라엘은 없으나, 그러나 우리 남한이 그리스도 복음으로 새롭게 된 새 이스라엘이 될 수는 없습니까?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예수 믿고 이렇게 거듭나고 성장하는 교회,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된, 21세기의 새 이스라엘이 되어서, 종교전쟁을 잠재우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평화의 복음을 심는 그런 나라가 될 수는 없습니까? 석유 대신에 평화의 복음을, 낡은 이스라엘 대신에 평화 지향의 새 이스라엘을!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런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하나님의 생동하는 복음을 담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루터는 기독교라 이름하는 종교가 지닌 문제점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제도를 좀 바꾸려고 했습니다. 교리도 몇 개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행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동력 있게 울려 퍼지는 새로운 교회로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했는데, 결과는 완전한 종교개혁이, 종교라는 틀이 무너지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것을 종교개혁이라고 얘기합니다만, 사실은 다른 개혁이 아니고 율법화되고 화석화되고 제도화되고 이념화되고 종교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둔 감옥을 부수고,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를, 평화의 복음의 생명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가, 우리 자신이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는 속박의 감옥은 아닙니까? 그러면 다시금 종교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 정치, 경제, 이념만이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율법화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까 종군기자가 하나님께 물었듯이 루터도 기도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교회가 이렇게 타락할 수 있습니까?” 루터가 들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내가 너를 통해서 교회를 새롭게 하려고 하지 않느냐? 내가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나는 지금 작은 너를 통해서 큰 일을 이루려고 한다.” 루터는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루터는 마지막에 보름스 의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형언도를 받으면 곧바로 처형됩니다. 그 앞에 가서 서서 다시금 그 말씀을 새깁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이 세운 의가 지금 당신의 의를 꽁꽁 묶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래서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때 루터가 한 말 기억하십니까? 유명한 그 말! “내가 여기 서있습니다. Here I stand.”
오늘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가진 분들, 하나님께 이 현실이 왜 이렇게 되느냐고 항의하고 싶은 분들은 하나님께 정말 매달려 보십시오.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정말 매달려서 여쭈어 보십시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의인이 핍박받아야 합니까? 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악인들은 활개 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답변하실 겁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네가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내 의로 세상을 다시 바꿔야 되겠다고. 내 의가로 너희들의 마음속을 다시 바꿔야 되겠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종교라는 이름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한 믿음, 신앙임을 다시 선포해라.”
저는 우리 교회가 율법의 교회가 아니라, 신앙을 담는 아름다운 그릇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그릇 속에 담기는 하나님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자유의 복음이고, 해방의 복음입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건물 안에 있습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파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그것은 교회입니다. 바울 말대로 여러분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마음을 열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굳은 껍질을 부수고 살아 있는 신앙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위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참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온유하게 가진 사람에게는 생명의 터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나님의 의로 배부르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겠다고 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종교개혁, 인간개혁, 신앙개혁의 주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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