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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 위를 걷는 자 /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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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다 위를 걷는 자
[본문] : 마14:22-3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3)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사람을 아십니까?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다음에 일약 당대의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돈을 벌고 세계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어느 날 아침에 우리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읽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 평화상>이 시작된 이유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간은 묘하게도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인간이란 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인생본질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위기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평소 건강에는 자신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있습니다. 수 십 년을 아무런 질병 없이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덜컥 병이 나더니 그만 그 자리에 누워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생각지 못했던 <건강의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여 꽤나 주목을 받던 사업가였습니다. 가정생활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은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에 큰 어려움이 닥쳐오고 한 순간에 모든 행복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거리에 나 앉게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경제적인 위기>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이런 경우를 만납니다.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었는데 무슨 문제인지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원수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렇게 좋았었는데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가슴 아픈 거예요. 이처럼 때로는 <인간관계의 위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쳐 올 수 있는 위기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기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 그 결국을 <신앙의 위기>까지 몰고 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환경의 위기가, 건강의 위기가, 경제적인 위기가, 인간관계의 위기가 마침내는 신앙의 위기로까지 몰고 간다면 이게 큰 문제거든요. 더군다나 그 위기 속에서 신앙적 승리를 이루지 못하고 신앙의 실패자로 끝나 버린다면 이 사람의 인생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총체적 위기를 이길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위기 속에 놓여 당황해 하는 제자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기적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했고 예수님은 이것을 피하여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디베랴바다를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어부들이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물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디베랴 바다는 그리 넓지도 않은 바다입니다. 마치 손금을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도 충분히 건너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났습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까? 방금 전에 목격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드디어 메시야가 왔다. 이 분이 왕이 되면 우리는 이제 무엇인가 한 자리들을 할 것이다."는 생각이 그들을 흥분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이 세속적인 생각을 뜯어고치는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풍랑의 고난은 필수 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생각해 봅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장관노릇 한 번 하는가 했더니 장관은커녕 여기서 지레 죽는가보다"생각했을 거예요. 잠시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가슴 부풀었는데 죽게 되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처지에 있는 제자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구원문제입니다. 살아야 되겠다는 문제 오직 그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나라의 정치문제며, 명예의 문제가 대수이겠습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의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깨우쳐 줍니다. 오늘 제자들도 이 문제 때문에 허둥대기 시작합니다. 떨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봅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거슬리는 파도를 헤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합니다. 말씀에 보니까 유령인가하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칼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몇 년을 같이 다녔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왜 제자들이 이렇게 깜박 예수님을 몰라봤을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 인생 길에서 두렵고 떨며 눈물로 지새우고, 고통과 위기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그 주님을 알아보겠습니까? "아 주님 오셨군요" 알아보실 자신이 있습니까?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 있을 때, 실망과 좌절 속에 있을 때, 의심의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나 똑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때로 이렇게 초라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셔야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해야 안심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오늘도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이 전개됩니다. 베드로가 의심하는 마음으로 정말 주님인가 확인해보려고 하고 이에 예수님은 그 베드로에게 믿음을 기회를 줍니다. 28절입니다. "정말 주님이라면 나를 한 번 물위에 걷게 해보십시오"."오라"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저벅저벅 몇 걸음 걸어갑니다. 그러다가 물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베드로로 하여금 몇 걸음이라도 걷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의심했던 베드로인데 바로 물에 빠지게 해서 정신 차리게 하지 왜 물위를 몇 발자국이라도 걷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슨 기회입니까?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믿음 없이 의심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는 주님의 책망을 받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다를 걸을 수 있다는데 의심하고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책망 받습니까? 아니면 풍랑이 잔잔해 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지금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의심이요, 불신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정말 당신이 주님이라면 나를 물위로 걷게 해보십시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오라"하셨고 바로 몇 걸음 걸을 수 있었으면 그 때 베드로는 주님을 인정하고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 몇 걸음이라고 하는 순간이 베드로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임을 인정하고 끝까지 갔어야했습니다. 그랬으면 물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거짓말투성이입니다. 미성숙합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이 믿음이 없이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문제는 오라고 할 때 거저 주님만 의지하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과 만족할 만한 환경만 믿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라는 그 때가 바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때임을 알아야합니다. 물론 파도가 치는 바다보다 배 위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배 위에는 자기합리와 의심과 불평과 불안이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배 위를 내려와 바다 위를 걸어오라는 주님의 음성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몇 걸음 걷는 순간에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을 엉뚱한 관심과 생각을 하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 또한 몇 걸음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왜 내가 살아가는지, 누가 나로 하여금 살게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역시 물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환경을 무시하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성을 무시하고 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변화에 대한 기대입니다. 즉 예수님을 바라보면 환경도, 생각도, 사고도 변화 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걷는다 할지라도 물에 빠져들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로 갈 수 있는 우리들만의 비결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오늘 물 속에 빠지는 사건을 계기로 그의 삶은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걷는 자는 누구이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사뭇 궁금한 일입니다.
심리학적 인간이해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피하고 평안하고 안전한 것을 선택하고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언제 풍랑이 일어날지 모르는 바다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괴롭게 노 저어 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큰 물결 앞에 한없이 작아 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고 가슴을 쳐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중에도 잊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아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풍랑 이는 바다가 주님 발아래 있었듯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도 주님의 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주님임을 인정하고 변함 없이 주님만 바라본다면 풍랑 이는 바다를 우리의 발아래 잠재우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고통을 받으며 험난한 바다를 계속 항해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왜 폭풍이 이는 험난한 바다로 우리를 이끄시는지 확실히는 모른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주님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안심해라. 나야 두려워 말아라"

오늘도 물 위를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보십니다. 우리의 인내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믿음과 생활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기억하시며 "오라"하실 때 몇 걸음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믿음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임을 생각하며 언제나 최상의 믿음의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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