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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은혜의 강 / 겔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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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은혜의 강  (겔47:1-5)

존 번연이 쓴「천로역정」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도가 한번은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한 30센티미터 정도나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빗자루를 들고 들어와서 쓸으니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온 방안에 자욱하더니 도로 바닥에 갈아 앉습니다. 안내자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율법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음 방에 들어갔더니 똑같이 먼지가 쌓였는데 이번에는 한 소녀가 들어와서 물로 깨끗이 씻어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은혜라'고 안내자는 대답해 줍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리 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먼지 속에 매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모든 죄가 씻음 받고 정결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인생을 살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려는 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수가 없습니다. 어제 초특급 '루사'가 우리나라를 관통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강릉같은 지역은 하루 800미리의 폭우가 쏟아지고 전국 70여명 사망 등, 인명과 물질에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버리시면 한시도 무력한 존재인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공기, 햇빛, 비, 양식을 주셔야 삽니다. 또한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셔야 살며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죄악을 이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수가 있는 것이며 죽은 후에도 영원한 천국에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희망의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유다 여호야긴왕을 사롭잡아 갈 때, 에스겔도 많은 귀인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발강가 데루빕이라는 포로수용서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얼마나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는지, 어느 날 하나님이 저에게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에스겔이 본 환상은 대단히 희망적이었습니다. 그 환상을 중심해서 기록한 내용이 에스겔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마치 샘처럼 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물이 점점 그 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발목에 겨우 찼고, 다음엔 무릎에 올라 왔으며, 세 번째는 허리까지, 마지막에는 헤엄칠 정도로 가득 차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그 물이 흘러서 동서남북의 온 지면을 적시고, 그곳에서 생명이 소생하며 실과가 맺히며 약 재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환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살리려고 대가 없이 주시는 은혜의 강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강물의 시작은 성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보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만민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성전이요,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혜의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이 충성하라고 맡기신 자기 교회입니다.

자기 교회에는 등한히 하고 여기 저기 은혜를 구하러 다니는 자는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집안 문제가 너무나 엉키어 답답할 때는 어느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가서 예언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된 곳으로 가면 큰 위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지난 8월 14일자 「교회와 신앙」이라는 주간지에 정윤석이라는 기자가 쓴 기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기자는 몇몇 기독교언론지나 전단지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3분을 찾아가서 예언을 받았더니 전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받기 전에 봉투에 헌금 넣고 예언 받기 원하는 내용을 적어서 내기를 '여동생 결혼문제 대해 예언 받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자는 여동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분은 '여동생은 아직 준비가 덜 됐어. 때가 아니야, 여동생이 축복권이 아직 없어. 그것을 누리려면 다음주 월요일부터 여기 와서 40일 작정 기도해 봐. 결혼 상대자인 남자는 괜찮아.'라고 하더랍니다. 다른 곳에서도 거의 대동소이한 말을 하면서 한 사람도 여동생이 없는 것을 밝히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받으려고 여기 저기 너무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자기 집에서 주는 음식을 잘 먹어야 됩니다. 때로는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는 것도 필요하나 허구헌날 음식점에서 끼니를 때운다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는 기도원이나 특별집회에 참석하여 은혜의 양식을 먹을 때도 필요하지만, 자기 교회는 등한히 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은혜를 받는데 열심인 사람들은 자기 교회에서는 교인 구실을 잘 못하는 건강치 못한 교인이 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 받으려 하고 몸된 자기 교회에서 은혜 받으려고 힘쓸 때 건강한 교인이 되는 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은혜를 받습니까? 오늘 본문은 네 가지 은혜의 단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발목의 은혜입니다.
3절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점점 불어나게 되었는데, 에스겔은 안내인을 따라서 거룩한 산에서 물을 따라 일천 척(약 300미터)을 내려온 후 건넜는데 물의 깊이가 발목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는 발목의 은혜를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발목이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발목의 힘이 생깁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열심히 참석하게 됩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등 열심히 참석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아내에게 마지 못해 끌려오던 남편이 이런 은혜를 받으니까, 자진해서 예배에 참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적은 충성이 있다면 예배 출석입니다. 구역예배 시간이 되었음에도 구역원이 오지 않아 속을 태우는데 어느 분이 오면 구역장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주일날 어느 분은 차를 몇 번 갈아 타면서 멀리서 참석하면 우리 목회자들은 너무나 귀해 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열심히 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억지로 안됩니다. 발목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첫번 은혜 받은 증거는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결혼식이나 친구 모임에는 열심히 참석하면서 주일날 예배 참석하는 일에 게으른 자는 "하나님, 내 발목에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부터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 힘이 생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단계는, 무릎의 은혜입니다.
4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라 했습니다. 다시 물이 흘러가는 동쪽으로 안내자를 따라 일천 척을 내려오니 물이 계속 불어서 무릎까지 차게되었습니다. 무릎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기도의 은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은혜를 받고 나면 발목에 힘이 오므로 출석하는 열심이 생긴다면 2차 은혜를 받고 나면 무릎의 은혜, 곧 기도하는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성장과정에서 처음에는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예배에 출석하던 사람이 점점 더 은혜를 받더니 기도에 열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은혜를 받아야 열심이 생기고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기도의 맛을 잘 모르는 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게 무릎의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날부터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기도에는 열심이 있어야 응답을 받습니다. 잠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는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어린 딸이 중병에 걸린 선교사인 자기 어머니를 위해 의사를 모시고 왔더니 의사는 진찰한 후 "애야, 지금 어머니는 몸이 불덩어리 같구나. 어머니를 구하려면 얼음이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여름에 어디서 얼음을 구합니까? 당시는 그곳에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어린 딸은 의사에게 외치기를 "선생님, 엄마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은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한 후 골방에 들어가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그 날 오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후 늦게 시커먼 구름이 피어오르고 가벼운 비가 내리면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딸은 우박을 모아다가 어머니의 환부에 얼음찜질한 결과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무릎의 은혜를 받아서 그 주신 열심으로 간절히 구함으로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 받는 역사를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의 단계는, 허리의 은혜입니다.
4절 하반절 "다시 일천 척을 측량하고 나로 물로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라고 했습니다. 허리의 은혜란 힘써 충성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허리는 힘을 쓰는 곳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강한 운동선수라도 허리를 다치면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열심히 기도만 하고 주님을 위해서 몸으로 아무 충성을 못한다면 아직도 어린 아이 단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다면 소년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요, 어느날부터 큰 짐도 어깨에 번쩍 메고 다닌다면 이제 청소년의 단계에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충성의 은혜를 주셨음에도 오늘 바쁘다고 내일, 내년으로 미루면 허리의 힘, 충성의 열심도 점점 약해져서 나중에 막상 충성하려고 해도 의욕도, 열심도 미약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내년으로 자꾸 연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 마귀가 좋아할 일입니다. 과거에 한국을 다녀간 중국인 목사 조세광 박사는 하나님의 달력에는 '오늘'이라는 말이 적혀 있고 마귀의 카렌다에는 '내일'이라는 말이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내일 하라'고 유혹합니다. '기도도 내일 하라, 봉사도 내일 하라, 예수도 천천히 60살이나 70살을 지나서 믿어라, 열심도 천천히 하면서 서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은 재촉하십니다. '지금 봉사하라, 지금 믿으라, 지금 충성하라, 지금 열심을 내라,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재촉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리의 은혜, 충성의 은혜를 주실 때 열심히 땀흘려 충성하십시오. 일하는 팔에 점점 힘이 오듯이 충성도 하면 할 수록 충성할 수 있는 열심이 붙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 큰 달란트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존 와나메이커라고 하는 백화점 왕에게 찾아와 일거리를 하나 달라고 청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고 처음엔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은 무엇이든 좋으니까 좀 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할 수 없이 "정 일을 하려면 이 유리를 닦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고 충성스럽게 일을 했던지, 유리 닦는 청소부에서 시작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그 백화점에의 매니저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긴 달란트, 직책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직책이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줄 믿고 충성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점점 허리의 은혜, 충성의 능력을 강하게 부어주시고 더 큰 달란트를 맡기시는 축복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단계는, 헤엄치는 은혜입니다.
5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되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물이 점점 깊어져서 온 몸, 온 머리까지 잠기게 되니 차고 넘치는 은혜입니다. 이 큰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깊은 은혜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강에서 헤엄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여기를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 저기를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니 절로 감사의 찬양이 나올 수밖에 더 있습니까?

은혜를 받아 아무리 능력이 강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권능과 능력은 무익한 것이라 했습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큰 능력, 큰 권능을 행하고 역사 했던 사도 바울이 깊은 체험에서 울어난 진정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가 가득찬 우리의 온 몸, 온 머리가  사랑의 깊은 사랑 속에 잠기어 헤엄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강 속에 들어가 헤엄을 치려면 세상에 붙어 있던 애착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물 밖으로 나와있던 머리도 덮이게 되니 이제는 세상소리에 솔깃하던 귀, 남의 허물을 보던 눈, 남을 비평하고 비방하던 이 입술, 이 모든 것이 은혜의 물 속에 잠겨 버리고 오직 은혜의 물만이 넘칩니다.

발목 은혜 때에는 여전히 내가 살아서 나를 주장하기 바빴고, 무릎 은혜 때에도 기도할 때는 충만하다가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근심 걱정에 싸였던 우리이었습니다. 또한 허리 은혜 때에는 많은 충성을 할 때에 남들이 칭찬하면 우쭐거리고 알아주는 이 없으면 공연히 교회를 향해 불만을 일으키던 우리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강 속에 잠기어 헤엄칠 때는 세상도 간 곳 없고, 나도 간 곳이 없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므로 감사만이 가득 찰 뿐입니다.

때로 우리는 믿노라 하면서 왜 근심과 염려에 매여 삽니까? 왜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강조하면서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벗어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충성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내 충성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흥분할까요? 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불평과 불만을 우리 입에 달고 살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십자가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자아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그 십자가 사랑의 강 가운데 내가 잠기고 자아를 못 박으니 오직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빛을 만나 거기에 빠지고 마니 오직 예수님만 있을 뿐입니다. 가장 큰 은혜의 단계는 나는 십자가 안에서 사라지고 오직 부활의 예수님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나 따위는 누가 알아주든 말든지, 칭찬을 받든지, 무시를 당하든지, 전혀 개의치 말고 그저 하나님의 사랑의 강에 나를 모두 잠기고 헤엄을 쳐보십시오. 그러면 이상하지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보일 뿐이요, 감사할 일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가」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두 사람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약속 장소를 가려면 말을 타고도 몇 날 며칠을 가야 했고, 거기다가 낯선 초원지대로 지나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약속 장소를 만났을 때, 한 농부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오다가 중간에 겪은 일을 들어보게. 내 말이 길을 가다가 무엇엔가 놀랐는지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내가 그 자리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지 뭔가?"

"다행히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기 망정이지, 사람도 지나지 않는 곳에서 다리라도 부러졌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않은가? 나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일에 감사를 드렸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농부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자네보다 훨씬 놀랍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왜냐하면 내가 탄 말을 아주 침착하게 아무 사고 없이 나를 이곳까지 태우고 왔다네."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의미가 깊은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무슨 특별히 좋은 일을 만나거나 위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득별한 보호하심을 받았거나 간절히 바라던 것을 이루거나 응답을 받아야 하나님께 감사하지, 그렇지 않고 평안한 때는 감사를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할 것 투성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공기와 물, 햇빛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히 살고 오늘도 세계 곳곳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배불리 양식을 먹었습니다. 오늘도 차를 타고 다녔지만 아무 사고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그는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기뻐하며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그 어려운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 소년을 마침내 목사까지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맹인 소년의 가정보다 엄청난 감사조건 속에 살면서도 감사를 잊고 삽니까? 우리는 여전히 욕심 가운데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90%의 받은바 감사의 조건은 보지 않고, 받지 못한 10%의 불만의 조건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강에 깊이 잠기어 헤엄을 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은혜를 발견하고, 저기서도 은혜를 발견하면서 온통 감사할 것 투성인 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주시므로 온통 감사할 것 투성인 우리가 감사는커녕 이루지 못한 욕심 때문에 불평과 불만으로 매여 산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감사하지 않다가 그 감사할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예배 출석에 게으른 자는 발목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직도 기도에 열심이 없는 자들은 무릎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직도 충성에 열심이 없는 자들은 허리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강에 나를 모두 잠기어 버리고 헤엄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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