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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위기를 극복합시다. (빌 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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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기를 극복합시다.
빌1:12-21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큰 주님의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도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최소한 13권의성경을 기록하고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또 누구보다도 훌륭한 지도자로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바울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바울사도의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3가지 위기가 있었습니다.
첫째 위기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위기가 있었습니다.
둘째 위기는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위기였습니다.
셋째는 죽음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면 그 위기 앞에서 무너지는 삶이 있고 승리하는 삶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은 그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에서 반복하여 우리에게 소개하는 주제가 바로 기쁨이라는 주제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 삶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위기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란 단어가 무려 19번이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안에 있습니다.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빌립보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위기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의 위기로부터 기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기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버리고 있습니까?
대개 삶의 문제와 위기가 우리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선환경의 위기로부터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요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내 가정의 환경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때로는 교회의 환경이 우리를 기뻐하게 못하는 환경입니다. 이런 환경의 위기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또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간관계의 위기가 우리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가정속에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기쁨을 빼앗아갈때가 있습니다. 또 자녀와의 관계,부모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업에서의 인간관계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이 얼마나 많습니까?
에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때로 질병 앞에서 죽음 앞에서 결코 기쁨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였습니까?

1. 환경의 위기에서 복음의 진보를 생각했습니다.(12-14절)

여기 바울은 감옥의 환경의 위기의 상황으로 볼때 그것을 복음의 진보의 상황으로 이해햇습니다. 지금 바울이 나의 당한 일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위기의 상황입니다. 분명히 감옥은 기분좋은 장소는 아닙니다. 감옥에 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 감옥의 환경의 상황에서 내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히려 ‘나의 당한 이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감옥의 상황을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는 기회로 여긴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품은 비젼과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체포되어 죄수의 죄목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이송되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까? 그런 측면에서 바울은 돈안들이고 공짜로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여긴 것입니다.그리고 바울이 감옥 안에서 많은 죄수들과 간수들과 접촉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합니다. 즉 바울이 매여 감옥 안에 있지만 거기에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 안에 있으면서 복음을 증거하니까 오히려 더 효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14절을 보면 “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그러니까 바울이 같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 그 환경 가운데서 복음을 감옥안의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사람들이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로마복음화가 세계복음화가 오히려 차질이 일어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감옥안의 환경의 위기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적용했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고난과 어려운 환경이 와도 그것은 주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볼때에는 그것이 손해이고 잘못되는 것같지만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어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있습니까?
그 환경이 그 상황이 원망이 되고 부정적인 해석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어려운 환경에 두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두셨습니다.

어떻게 환경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배후에 역사하셔서 주권을 갖고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주님의 나타내심을 위하여 우리를 다루어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섭리를 믿을때 어떤 고난과 위기의 환경 속에서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사람과의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여기 바울은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삶의 고난은 그런저럭 내가 참으면 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여서 힘들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나하고 관계가 먼 사람이면 괜찮습니다. 나의 가까운 사람,나의주변에 있는 사람,나와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과 어려운 관계가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할때가 있습니까?

여기 15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두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 중에서 투기와 분쟁을 일삼으면서 사역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착한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16절에 보면 사랑으로 사역을 하고 바울과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17절에 보면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합니다.

여기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바울을 중상모략하면서 공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소리가 바울의 귀에 들렸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 잘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어쩌면 바울과 가까이 교제하면서 사역을 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 안에 갇히자 바울을 중상모략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가까운 사람이 비수를 가슴에 꽂을때 얼마나 상처가 됩니까? 종종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줄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대개 보면 원수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많은 상처중에서 가까운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였을 때에 얼마나 상처가 되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1장 18절에 보면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비록 자신과의 적이 되고 자신을 공격하지만 저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울은 자신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 바울이 사람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받은 상처의 감정으로 문제를 다루어가지 않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교회 속에서 인간관계의 위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종종 교회에서 "아무개 때문에 교회생활을 못하겠다“라고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갈등의 위기를 경험할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빌립보교회에서도 이런 인간관계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에 보면 빌립보교회에 두 여집사가 서로싸우는 갈등의 위기가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여기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빌립보서 2장 5절에 말씀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내가 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하면 사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어떻게 품을 수 있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라고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마음은 종이 될 때 갖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어려움을 당합니까?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이 자존심은 나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이 자존심을 나를 교만하게 합니다. 이 자존심은 나의 생각과 나의 입장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오늘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움을 겪고 힘들어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종이 되고 내가 먼저 섬기려고 하면 상처가 없고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종종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경험할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정황에서 다양한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 잇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관계하면 상처를 자주 받는 경우는 결국 내 안에 대접받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나의 자존심이 앞설때입니다. 내 위신이 떨어지고 나의 권위를 건들렸다고 하는 자존심을 앞세울때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나를 모욕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미국의 에브라함 링컨대통령이 모욕적인 언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세장은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링컨과 표를 다투는 상대방 후보가 유세장에서 이렇게 떠벌렸습니다.
“링컨은 가난하고 못생겼습니다. 게다가 그는 젊은 시절 점원 노릇할 적에 술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
그 다음 차례가 링컨이 되었습니다. 많은 유권자들이 과연 링컨이 어떻게 대응할까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예상을 뒤엎고 대중을 향해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조용히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맞습니다. 저는 못생긴 사람입니다.또 저는 가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술을 파는 상점에서 일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저를 고발한 저 분은 그 시절에 제 가게의 단골 손님으로 술을 매일 사갔다다는 사실입니다.”그러자 사람들이 여유있는 링컨의 모습에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부터도 누가 나를 모욕하면 얼마나 분노하고 얼마나 공격적인 경우가 많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인 것이 무엇입니까? 종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이땅에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종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자기를 팔고 자기를 배신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여러분 주님께서 자기를 파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섬김을 실천하되 나와 반대되고 나의 대적까지도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높아지려고 할때는 싸웁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싸웁니다. 그러나 내가 낮아지려고 하면 싸우지 않습니다. 내가 섬김을 행하려고 하면 싸우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관계가 자꾸 싸운다는 것은 결국 서로 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만일 서로 싸우는 관계가 있다면 서로 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종이 되어 살기를 바랍니다.


3. 죽음의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20-21절을 봅시다.

여기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서서히 드리어지고 있는 죽음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바울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제도 온전히 膽大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바울은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그러면서 21절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합니다.여기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라고 하면서 죽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가장 기독교가 힘이 잇을때가 바로 장례식을 치를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고 믿음 안에서 장례식을 치루는 가정에 가면 오히려 주님의 임재하심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여기고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기회로 삼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왜 사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까 ?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그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실제적으로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나를 위해서 살려고 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열심히 수고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누가 사도바울에게 삶을 묻는다면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땅에서 우리는 한번 죽을 것입니다. 죽음은 반드시100%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면 지금 죽음의 위기 앞에서 고통을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까?
요즘 우리나라 영화들이 히트를 치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히트를 치는 영화가 요즘 상영하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여러분 시간이 있으면 한번 꼭 가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영화에 보면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습니다. 형과 동생이 함께 전쟁터에 가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형이 북한군장교가 되어서 전쟁터에서 극적으로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그리고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자기가 동생의 가는 길을 지켜주기 위해서 총을 쏘면서 싸우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그 영화를 보면 뜨거운 형제애,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형의 사랑은 한 가족의 피가 섞인 관계와 가정을 지키려는 형으로서의 책임감이 수반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인간관계,어떤 책임이 따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죽음의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게되면 나타나는 공통되는 마음의 반응이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사람과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둔 사람과는 다른 마음의 정서가 있다는 것입니다.큐블러 로스라는 유명한 정신병리학자가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둔 사람은 5가지 심리위기를 갖는다고 합니다. 첫째단계가 부정의 단계라고 합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그럴 리가 없다”합니다. 둘째단계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첫째부정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왜 다른 사람도 많은데 나인가?“라고 합니다.신경질을 내기도 하고 고함을 치기도 하고 배우자,가족,의사,부모를 원망하기도하고 때로는 하나님께도 원망합니다. 셋째단계는 협상의 단계입니다.이제 죽음의 위기를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위한 타협안을 찾기 시작합니다.때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넷째단계는 우울의 단계입니다. 모든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초라하게 비칠까봐 우울하게 됩니다.다섯째 순응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제 혼자있고 싶어하고 자주 잠을 자면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작별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이런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뛰어넘고 있고 모든 심리학의 이론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고 있고 죽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여기 23절을 보면 ‘내가 그 두사이에 끼엿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이라고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더욱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죽음을 끝으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주님과 동거동락하면서 사는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땅에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리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죽음을 오히려 환영하고 소원하지만 이땅에서 사는 이유는 바로 너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축복과 섬김을 위해서 산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오래사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바울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래 장수하고 내가 감옥에서 빨리 탈출하는 것이 바울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바울의 관심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사는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다하고 우리가 가는 곳 그 나라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저 너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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