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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사랑하사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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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하나님이 사랑하사
본문:요 3:16

우리 인생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얻어집니다. 그 경험이란 삶일 수도 있고 열심히 연구한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경험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고 그것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됩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 방법이나 지식을 얻는 통로는 매우 다양합니다. 많은 경우 배움을 통해서 지식을 얻게 됩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가장 빨리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가르치는 자들은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배움이란 지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훈련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배움이란 배울 수 있는 방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서 제자가 스승을 가르칠 수 있느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과 바로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 통역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성령님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종들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를 한 절로 압축한 내용으로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결국 이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구원의 세계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판가름 지을 수 있는 잣대가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가지와 줄기가 하나의 나무 기둥에 속해 있듯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이 한 구절 말씀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기둥을 붙잡지 아니하고 말씀의 가지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믿으면 그는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매우 단순합니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고 진리는 명료한 것입니다. 사실 본질에 접근할수록 단순하고 명료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에 참 신앙인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 대해서 정말 분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슷비슷한 것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선택이 어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구원의 진리 가운데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사랑 안에서 창조하시고 사랑 안에서 보호를 받고 사랑 안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생명은 오직 사랑 안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으로 보면 사랑은 바로 생명의 도구요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존율에 대한 데이터가 있습니다. 물론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어머니가 양육한 아이들은 생존율이 거의 100% 인데 부모 아닌 다른 환경에서 양육한 아이들은 사망률은 37%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동물도 자기 어미가 키우는 것보다 더 높은 생존율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성도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음이 약한 성도는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분명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이웃과의 관계에도 사랑은 언제나 본질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사랑의 도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느냐고 물으면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환상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모 사랑이 가장 순수하다고 하지만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에 따라 그 순수성이 언제나 훼손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상처를 받는 이유도 사람에게 너무 완전한 사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올바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관계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관계를 연결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랑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함께 살아도 타인과 같습니다. 모든 관계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사 구원하신 것입니다. 인생 역시 사랑하므로 관계가 비로소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서약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서약을 통해서 비로소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혼인 서약의 내용을 보면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조입니다. 알고 보면 모두 다 사랑에 대한 약속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주겠습니까 라고 묻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어 주겠습니까 라고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하겠는가 그리고 정조를 지키겠는가를 묻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 없으면 관계라는 것은 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에 있어서 두 번째 교훈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혹시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은 죄로부터 왔고 죽음은 죄의 결과임을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사망이 왕노릇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우리와 다른 두 가지 사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즉 죄값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죄로 죽은 죽음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주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무죄하심에 대한 증거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성인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는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기독인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사실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믿는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믿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 분만이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행 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구원에 있어서 세 번째 교훈은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내게 있어야 합니다. 내게 돈이 있어야 남에게 돈을 줄 수 있고 내게 힘이 있어야 남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내게는 금과 은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영생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다 죽었고 예수님만 죽음에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신 것입니다. (요일 5: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리고 모든 것을 주려면 줄 수 있는 방식이 다릅니다. 사물은 직접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줄 때에는 바로 줄 수 있습니다. 물건을 준다고 하면 바로 전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지식은 직접 줄 수 없습니다. 지식은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학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오직 믿음의 방법으로 얻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요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가장 쉬운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얻는 방법은 오직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아내가 믿으면 사랑이 되지마는 믿지 않으면 적어도 그 아내에게는 전혀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전제입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전제를 믿음으로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믿는 자에게는 자신의 사건이 되고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많은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으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성도가 하나님의 것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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