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들은 바를 부탁하라. (삼상 3:1-10, 딤후 2:1-2)

  • 잡초 잡초
  • 309
  • 0

첨부 1



  들은 바를 부탁하라. 
  삼상 3:1-10, 딤후 2:1-2

어느 목사가 주일예배를 마친 다음 성도들과 인사를 끝내고 교회 문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집사 한분이 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더니 목사에게 다가와서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참으로 구구절절이 제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설교는 참고로만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가 참고로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다 옳은데 실제 나가서 생활해 보면 목사님 설교하고 제 생활 사이에 그 간격이 너무 커서 그 말씀을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참고만하지 실제 생활과는 깊은 관련이 없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성도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깊이 살펴보면 참고도 안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만 하고 생활에 실제 적용시키지 않는데에 신앙적 병폐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고 마태복음 7장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했고, 누가복음 8장 1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야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들이라 했고,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7절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했고, 야고보서 1장 25절에 듣고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1장 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 2장 말씀은 두 절 밖에 안되는 짧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 속에 귀중한 선교학적이고 신학적인 복음의 속성이 나타나있습니다. 깊이 상고하면 참으로 그 뜻이 크고 위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은 우리의 인간적인 힘을 배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은 도덕적인 의를 배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는 자기 도덕성에 있지 않습니다. 도덕성이 중요하지만 거기서 용기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베드로가 생각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는데 모른다고만 하지 아니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는 못질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으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참으로 창피하고 한 없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달 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두 달 후에 수천명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고 담대하게 증거할 때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비난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한 것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사람들이 우리가 어찌 할꼬 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3천명이나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니 강하고 담대해졌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가 병자를 고치고 담대히 전도할 때 공회가 모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병자를 건강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공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때와는 확실히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므로 강해졌습니다.
부흥사 무디는 원래 공부한바가 없고, 구두직공으로 있다가 은혜를 받아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무디는 말을 잘하지 못하니까 가르치려고 하면 아이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과자를 사다가 줘가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 무디가 큰 은혜를 받아 큰 부흥사가 되었는데 어느날 수천명 앞에서 설교할 때 대학교수 한사람이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교수가 설교 끝난 다음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하는 말이 오늘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 유감스러운 것은 영어 문법적으로 틀린 말씀을 열여섯번을 하셨습니다. 그것만 없으면 진짜 은혜가 되겠습니다. 공부 좀 해가지고 그런 실수를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무디가 껄걸 웃고나서 조용히 말하기를 잘못 세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 50번 틀렸습니다. 저는 제가 지식이 있고 문법을 잘 알고 말을 잘해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기에 전할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물읍시다. 교수님은 그렇게 잘 아시는데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 말을 듣고 그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고 문법을 잘 알고 말을 잘하여 실수가 없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완벽하다는 말을 듣는 최고 여자 무용가가 인터뷰시간에 말하기를 저는 연기 할 때마다 무용가로 무대에 설 때마다 실수를 합니다. 실수를 안한때가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오히려 인간적입니다. 실수하는 것 상관없습니다. 나는 실수 안하려고 하는 생각 안합니다. 실수 안하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설교할 때마다 실수를 많이 합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말은 자기능력과 자기경험과 자기지식과 자기용기와 자기의지로 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은 율법이라는 말의 반대입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은 율법 주의적인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예수 안에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므로 강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고 나 같은 죄인을 통해 역사하시니 그지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강해집니다. 베드로처럼 무디처럼 은혜를 받으면 은혜 속에서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 읽은 말씀 2절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내게 들은 바를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한 사람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설교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수 있고, 전도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들어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들은바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법궤 가까이에서 잠을 자고 엘리제사장은 자기 처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하나님이 세 번이나 부르셨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하지 못하고 엘리제사장이 부르는줄 알고 엘리에게 달려가 부르셨기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갔을때 엘리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 것 같으니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을 때에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셔서 사무엘이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큼 깨끗한 사람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도 있었지만 엘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깨끗함이 없었고 엘리의 두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만큼 지식이 없었습니다. 엘리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거룩함이 없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으로 40년이나 직무를 감당했으므로 성경도 알고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아니하고 사무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것을 식별하지는 못했고 엘리가 가르쳐주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가르쳐준 지식을 가지고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었을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 순종의 마음, 전폭적으로 위탁하는 마음으로 듣는 자세가 신앙의 근본입니다. 듣는 자세가 좋아야 되고 듣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들음에 대한 응답이 좋아야 합니다. 이시간도 우리가 아무 복잡한 생각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듣는 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는 각오와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듣고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 봉사를 하든 교회학교 교사를 하든 찬양대를 하든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의 제1의 기본자세는 듣는 것입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새 학생들이 공부하느라고 굉장히 애를 많이 쓰고 고생도 무척이나 많이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업시간에 잘 들어야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합니다. 잘 안들으면 공부를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학원 저 학원 다니다가 막상 중요한 수업시간에는 졸고 잘 안들으면 공부 잘하기가 어렵습니다. 강의시간에 잘 듣고 잘 기억하면 됩니다. 젊은 나이에 정확하게 잘 들으면 머리에 입력이 되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신문에 보면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는 졸고 공부 안하고 학원만 좋아하고 학원만 열심히 다닌다는데 참으로 문제입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잘 들으면 되는데 잘 듣지 아니하고 딴데 마음을 두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학 대학에서 40여년간 강의한 교수가 강의 첫 시간에 꼭 주는 주의사항이 있는데 내 강의에 질문은 없다 강의도중에는 질문하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말고 의심은 집에 가서 하고 질문은 다음에 와서 하라. 강의를 듣는 중에 이렇게 의심하고 저렇게 의심하는 것은 학생 자신에게 손해다 듣는 이 시간만은 전적으로 믿고 전적으로 듣기만 하라. 그것이 공부 잘 하는 방법이라고 일러 줍니다.
이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도 전적으로 가슴을 열고 마음을 기우려 들으면 가장 좋습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웃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 좋은데 어떤 사람은 나는 절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하고 요지부동인데 참으로 딱한 사람입니다.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 다해봤어 다 지내봤어 합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가 경험했으면 어디까지 했고 안다면 어디까지 아는지 깊이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경험을 절대화하고 더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성도에게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바로 들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들어야 됩니다. 전적으로 수락하며 들어야 됩니다.
다음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라는 말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냥 강의실에서 들은게 아니고 증인들 앞에서 들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하나님 말씀 증거하는 것을 보았고, 핍박 받는 것도 보았고, 매 맞는 것도 보았고, 돌에 맞은 것도 보았고, 감옥살이 한 것도 보았고, 수 없이 죽을 고비를 아슬 아슬하게 넘기는 것도 보았고, 그 환난과 핍박 속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 전하는 그 모습을 보았고 동참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해준 말씀은 이론이 아니고 철학이 아닙니다. 그대로가 생활이고, 그대로가 사건입니다. 말로 증거 한 것이 아니고 몸으로 증거 한 것입니다. 목숨 걸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뜻 깊은 말씀입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 증거 한 바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했던 디모데로서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 부탁하라는 말은 의탁하라 위탁하라는 말입니다. 잠깐 말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전적으로 받은 것처럼 아주 전적으로 당신이 전하세요 하고 맡기고 마치 유언을 하듯이 하고 그에게 책임을 떠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듣고 받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 네가 들은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 내가 너에게 부탁한 것을 너는 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는 말입니다.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목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목사의 아들도 목사인데 아들 목사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버지가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 아버지는 한 평생 훌륭한 목사님으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전하시고 교회도 많이 세우시고 여러 목사님들 중에서도 귀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훌륭한 목사입니다. 저는 언제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굉장한 일을 한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려고 애를 썼다. 너도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업적이라는게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네가 전하라는 말을 명심하고 실제로 전해야합니다.
유대 사람의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영리한 여우가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물고기 여러분 바다 속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고 하고 큰 물고기들이 자꾸 따라 다니면서 잡아먹고 답답하고 괴로울 텐데 그러지 말고 육지로 훌쩍 뛰어 올라오세요. 여기는 그런 일이 없고 편안합니다. 이 말을 듣고 물고기들이 회의를 했는데 한 물고기가 정말 이 바다 속에서 살기가 힘들어 그런데 여우가 원래 영리하니까 여우가 하는 말이 옳을거야 우리 육지로 뛰어 올라가는게 어떨까?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른 물고기가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 우리가 지금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못 살 정도는 아니잖아 그 여우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내 생각에는 그냥 물 속에서 사는게 더 좋겠어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대로 결론을 내리고 여우에게 우리는 육지로 올라가지 않겠소 하였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자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라 죽지요 다 말라서 죽게 되고 아니면 여우가 잡아먹지요 라고들 대답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바로 그거다. 유대사람은 좀 괴롭더라도 유대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어디가나 유대사람으로 살고 불편하고 괴로워도 유대사람은 유대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유대 전통 속에 살아야 한다. 하고 교훈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대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아버지는 한마디 더합니다. 이 말은 너희가 앞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 그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말해 주어야 한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들은 이야기를 너희 후손들에게 말하라 그 후손들은 또 그 다음 후손들에게 말하라 계속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사람들의 유명한 전승입니다. 유대사람들 마음속에는 아무리 괴롭고 답답하고 핍박이 심해도 유대사람은 유대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습니다. 물고기가 꼭 물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유대사람은 유대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괴롭고 답답하더라도 반드시 언제 어디서나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전적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믿을때 신뢰가 있고 충성이 있게 됩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에게 들은 바를 전하라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혼자 전하면 몇 사람밖에 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 사람이 또 전하고 그 다음 사람에게 또 전하게 하면 효과적입니다. 이게 생산적인 방법입니다. 한두 사람만 전할 것이 아니고 전체 교인이 다 동원되어서 전해야 합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