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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이레-채우시는 하나님 (빌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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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채우시는 하나님
빌립보서 4:19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성경은 거듭 거듭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 하나를 본문으로 선택해서 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엄청난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필요를 채워주마”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필요가 채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좀 과장을 하셨습니까? 듣기 좋은 말씀이지만 실현가능성이 없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때때로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모든 약속에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이 약속의 전제도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할 때에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소경의 눈을 만지시며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마9:29) 마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채워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도록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흥미로운 실체입니다. 그룹성경공부에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하고 바라고 기대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근육과 같습니다. 사용해야 발전하는 면에 있어서 서로 닮았습니다. 사용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주어진 믿음을 사용해야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성령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마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께 순종 할 때에 더 큰 성령님의 영역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활용해야 더 큰 믿음을 받게 되고 큰 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활용하도록 하는 환경을 일컬어서 우리는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믿음이란 불로 연단하면 더욱 순수해지는 금이나 은처럼 시련의 불길을 통과해야 우리 마음도 더욱 순수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네 가지 일반적인 시련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 시련 가운데 하나를 어쩌면 여러분이 지금도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겪고 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살다보면 시험을 몇 번씩은 통과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시험을 받을 때에 내 신앙을 발전시키는 기회이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런 시련을 통해 여러분이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면 더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첫 번째 시험은 스트레스입니다. 우리 삶에서 당하는 이 압력을 어떻게 여러분은 처리하십니까? 그럴때 일수록 자신을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뢰하십니까? 다른 것들을 기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시편은 말합니다. “너는 환난 날에 나에게 부르짖어라. 내가 너를 구할 것이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현대인성경) 문제를 만날 때 어려움을 겪을 때에 나에게 부르짖으라 그렇게 성경이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겪는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는 하나님의 손짓이요 음성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문제를 당할 때, 시험을 겪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향합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하고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전화통을 붙들고 스트레스 받는 것들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스트레스를 만나면 무조건 먹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라면이든 떡볶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포만감이 결코 스트레스를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닥치는 대로 구입하므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든지 정신없이 게임을 하든지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모두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스트레스는 ‘내게로 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삶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필요를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너무 급히 서둔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각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고발을 들어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두 가지 잘못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에게 돌아서서 자기 나름대로의 우물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저장할 수 없는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막을 여행을 하다가 목이 탑니다. 더 이상 가면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덕을 하나 넘어가니 네온싸인이 있습니다. “생수 무한정 공급. 하나님이 공짜로 주심” 그런데도 그것을 통과해버리고 다른 동네 가서 사람 만나서 삽 한 자루 빌려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보다 더 악한 것은 자기 우물을 파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우물에 물이 콸콸 나오는 복 주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 우리 모두가 다를 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당대 하나님의 백성의 짓거리가 그러하다고 고발합니다. 생수의 근원은 버리고 파도 물이 안 나고 물이 뽑힐 수도 없는 자기 웅덩이를 파고 있는 그 어리석음과 그 죄악 때문에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는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복 주시도록 소원하는 분은 없습니까? 꼭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면서 돈 있는 사람인체 하면서 카드를 긁고 나서 독촉이 들어오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내 경제적인 처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가 지금 돈이 꼭 필요해요”라고 손을 모우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처지에 지금 있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욕망과 필요를 구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여러분의 욕망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산다고 과소비를 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우리는 서둡니다. 우리 스스로의 계획을 세워 우리 필요를 채우려고 들며 그 계획에 복 내려 주시라고 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 여러분의 머리 위에 얹도록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에 복 내려 주실 리 만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지금 경제적인 압박 가운데 씨름하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급한 불을 꺼보고 싶은 유혹이 클 것입니다. 비용을 절감할 빠른 방법이 없는가를 살필 것입니다. 십일조라도 당분간 중단하고 세금이라도 줄일 방법이 없나 살필 것입니다. 절세만 아니라 탈세의 유혹도 받을 것이고 잘못된 거래도 하고 싶은 유혹도 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엄청난 성적인 긴장아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폭발할 만큼 욕구가 커서 만나서 안 될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수정처럼 분명한 선을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핑계와 이유를 찾을 것입니다. “우리 둘 다 신자인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고” 등등 합리화를 시키려듭니다. 자신의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 뿐 만 아니라 어떤 분은 엄청난 정서적인 압박 아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서 우리 마음을 열지를 않고 오히려 구급약 상자를 열어서 약병을 찾습니다. 임기응변식 처방을 찾지만 문제해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50:10)

비록 캄캄한 길 어느 곳에서나 희망의 빛을 찾지 못하여도 여호와의 구원만은 확실하게 믿을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틀림없이 그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시험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할 것인지 우리 사람이나 그 어떤 다른 것에 향할 것인지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골치 아픈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두 번째 시험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의 경우 어떻게 그 실망을 처리하십니까? 삶이란 가끔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일들이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꿈꾸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혼생활이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계획했던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자주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저는 가끔 조그만 아이들이 제 하고 싶은 대로 안 된다고 앙탈을 부리면서 울면 옆에서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그럽니다. “얘야 살면서 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많이 있다” 살면서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것만 아니라 많이 있다고 가르쳐야 됩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뿐 아니라 엄마 아빠나 남편이나 아내도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리라 생각하면 엄청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그런 필요를 채워주도록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도저히 채워줄 수 없는 기대를 사람에게 거는 것이 잘못입니다. “결혼만 하면 행복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내 남편만 좀 변하면 행복해 질거야”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이가 옆집 아이처럼 되면 만족할 텐데”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조금만 변하면 우리 식구들 모두가 좋아 할건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대답도 아닙니다.

불안감에 대한 대답도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열등감에 대한 대답도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대한 대답도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침체와 절망, 낙담과 실망에 대한 답도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에 대한 답도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삶의 무의미에 대한 답도, 무목적, 지겨움도,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대답이 되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자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확실히 실망을 준비하는 격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어떤 사람이 여러분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기대하면 여러분 자신을 실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는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옵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49:23)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 그동안 실망했는지 답이 나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행복할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면 나를 도와줄 거야 그러다가 그 사람으로부터 실망합니다. 이 수준에 달성하면 행복할거야 그러다가 실망합니다. 이 사람, 이 사건, 이 일만, 이 차만 구입하면 행복 해질 걸로 생각하면 실망합니다. 어느 때나 실망하면 경고 등이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외에 엉뚱한데에 내가 지금 내 인생을 걸고 있다는 것을, 잘못되었다는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도 결혼을 하면서 자기 인생이 비참하게 귀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멋진 장면이 연출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상상하지 황량한 사하라 사막을 연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보니 예상했던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불평하며 슬퍼하며 소리치며 실망감을 노출시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수긍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직도 사랑하시며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드리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받아들입니까? 여러분이 이해를 하든 말든 실망조차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시험입니다. 실망시키는 일들을 두고도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49: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련은 견딤입니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서원에 따라서 삶을 결정됩니다. 여러분의 인격은 여러분의 헌신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여러분의 성공도 어디에 헌신했느냐에 따라서 영향을 입습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도 여러분의 서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서원에 따라서, 헌신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자신을 쏟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성품이 결정되며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수많은 일들에 적당하게 헌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혜로운 자는 오늘과 영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한두 가지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허비하기 때문입니다. 방만한 경영보다는 전략적인 몇 가지 일에 집중하라고 세상도 충고합니다.

어떤 기술을 연마하든지 어떤 성숙한 인격을 추구하든지 거기에 헌신하고 집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피아노를 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매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앉아있기만 해서는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악기를 연주를 해도 매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기량을 닦아야 합니다. 헌신에는 끈질김과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헌신하지 않고는, 집중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헌신이 없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월이 여러분을 성숙시키지 않습니다. 나이가 여러분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훈련이 여러분을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훈련, 사역자훈련, 이런 훈련들이 교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훈련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세월과 함께 성숙해진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 아이 노릇을 하는 거지요. 나이는 어른이 되었는데 하는 짓은 아이들 같아요. 뭐든지 내 것 먼저 챙기고 내 입장만 생각합니다.

헌신할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지속적인 댓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말씀을 통독하는 것도 그렇고요 말씀 묵상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일예배 헌신이나 구역모임 헌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올해는 주일예배 다른 일 때문에 절대로 제끼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댓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의 진보가 있습니다. ‘바쁜 일 없으면 참석 하지뭐’ 신앙의 진보가 없습니다. 중요한 일에 아무런 헌신을 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일에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결심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헌신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려움 닥칠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한다. 내가 그 약속 계속 지키겠다. 우리 올 들어서 2004년 제직 헌신했습니다. 그 헌신대로 살기 위해서 여러분 2003년 12월 31일 밤에 헌신서약 한 것으로 될 걸로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적어도 한번 이상은 매일매일 성경에 붙여놓은 이 헌신 서약을 따라서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 내가 교회 하나 됨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울산교회를 더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에 내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헌신하고 거기에 대해서 밀고가지 않으면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면서 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뭔가 제대로 하나라도 하려고 하면 결심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결심대로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지금 이 순간 그런 시험을 받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결혼서약(헌신)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과연 “죽음이 두 사람은 나눌 때까지”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 모든 증인들 앞에서 한 서약, “죽음이 두 사람을 나눌 때까지”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중도 포기할 것인지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자기의 인격에 대해서 시험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해야 할 바른 일을 알지만 쉽고도 편리한 쪽을,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쪽, 많은 사람이 바라는 일을 행할 것인지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시험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전5:4) 서원했으면 울산 교회 성도답게 살기로, 제직답게 살기로 서원했으면 서원한 것은 갚는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 됨을 위해서 노력해야 되고 책임을 나누어지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서원을 하나님께 했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그대로 따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매일 성경읽기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교회에 등록하는 문제입니까? 구역에 속하는 일입니까? 사역에 대한 헌신입니까? “섬기는 기쁨이 가득한 해”라는 표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아무런 섬김의 장을 갖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작년하고 달라진 것이 뭐가 있냐 이 말씀이죠. 새해 들어서 육분의 일이 지나갔지 않습니까?

내 생애에 소중한 분 가운데 누구에게 복음으로 섬길 것인지 아직도 생각 없이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습니까? 오늘은 이번 축제 때까지 기도로 섬기며 축제에 초청할 분을 결정하고 써서 제출해야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왕의 명령을 지키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왕의 명령을 수행할 시기와 방법을 안다.”(전8:5, 현대인성경) 슬기로운 사람은 말하고 행동할 때와 그 방법을 가릴 줄 압니다. 자기가 서원한 바를 언제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핑계꺼리를 찾습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변명합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져서 서원한 것을 지킬 수 없다고 어물거립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말할 때와 행동할 때를 압니다. 서원한 것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어리석은 변명을 하는 사람입니까? 변명 찾는데 머리를 쓰게 되면 일 하는데 머리가 안돌아 갑니다. 언제 어떻게 이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엄청나게 탁월하게 지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 합니다. 키울 때부터 그렇게 키웠다니까요. 지 마음대로 안 되어서 울면 가르쳐 줘요. ‘인생이란 그렇게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가르쳐 줘요. 한 번 지키려고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해 버립니다. 신혼여행 갔다 오면서 가정법원 가는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정이란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데 이걸 한번 지켜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혼이 다반사가 되어 갑니다. “더 이상 못 살겠어” 성격이 안 맞아서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혼자 살아야 됩니다. 혼자 살아도 그 성격 때문에 또 부딪혀야 됩니다. 사람은 얼굴 생긴 모양만큼 서로 다르게 지음 받았거든요. 그런데다 또 하나님이 만들 때에 왜 남극은 북극과, 북극은 남극과 지남철이 만나듯이 그렇게 만나도록 되어있다니까요. 우리 안에. 그래서 자기하고 성격이 다른 사람을 끌리게 되어 있어요. 성격이 달라서 갈라서기 시작하면 또 골라도 또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원하지 않았습니까?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기까지’ 그러면 상대방이 어쩌던지 나는 그 약속을 지킨다고 결심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우리 약속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생각하니까 그 결혼을 지켜본 증인들에 대해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십일조 낼 형편이 못돼. 지금은 경제적인 압박이 너무 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립니다.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정직하기란 너무 힘들어.” 바른 일만 하다가는, 공정한 거래만 하다가는 곧 파산할 것 같은 그런 위험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 그런 책을 어떤 분이 쓰셨는데 한번 크리스찬 사업가들이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크리스찬 사업가답게 살려면 이 풍토에서 왕따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 도 변치 아니하며”(시15:4)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시험에 봉착했습니까? 넘어지지 마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시험은 우선순위 선택입니다. 시험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시험입니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위대한 약속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어떤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는 너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리고 너희가 그를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의 기본적인 관심사로 삼으면 날마다 너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마6:33, NLT)

삶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필요도 그 가운데 하나고 정서적인 필요도 그렇습니다. 좋은 관계도 필요하고 신체적인 건강도 필요합니다. 물론 영적인 평강도 필요하지요. 그 모두는 타당한 것들이고 우리 삶에 꼭 있어야 될 것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첫자리에 두면 이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말만 하나님이 우리의 기본관심사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 인생의 첫째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티셔츠에다 그렇게 써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 첫 자리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 가지를 물어보면 됩니다.

1. 무엇을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가? 시간이 나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살펴보십시오. 가장 자주 많이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2. 내 돈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어디인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거기가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있는 곳입니다. 돈이 아낌없이 가는 곳, 써도 아깝지 않는 그것이 여러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입니다.

3.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가?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었으면 하고 소원하냐고 제가 묻는 게 아니라 실제로 무엇이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인가를 묻습니다. 우리는 집념이 대단합니다. 우리의 모습의 실체를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거기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가 나오는데 우리는 항상 지혜로운 사람하고 나하고 동일시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저 아무개나 해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어리석은 사람이, 그 게으른 사람이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번 보니 그렇더라고요. 하나님께서 말씀 읽고 말씀에 시간을 투자하면 투자 할수록 내게 풍성한 것을 주시는데 어떤 때는 하기가 좀 게으름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비로소 잠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잠언서 열심히 읽었는데 그때 이런 게으른 사람이야기가 나왔더군요. 손을 떡 그릇에 갖다놓고 떡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괴로워하는 게으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내가 중학생 때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설마 그렇게 게을러터진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유학 가서 보니까 그게 바로 내 모습이더라고요. 우리는 자기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업니까? 그러면 당장 마태복음 6장 33절이 떠오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성경시험이나 도덕시험을 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계부를 보여주시고 여러분의 일정표를 보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시간 사용하는 방법, 돈 쓰는데, 무엇을 자주 그리고 열심히 생각하는지 그게 여러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정신적인 필요, 관계적인 필요, 신체적인 필요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마음에 정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네 가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당하는 것, 압박 받는 것, 스트레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스트레스를 다루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환경에 대한 억눌림 뿐 아니라 사람 때문에 괴로워합니까? 실망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불평하고 하소연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주신다고 받아드립니까? 여러분이 실망하셨다면 무언가를 잘못 신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다르게 번역하면 결코 실망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시험을 받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서약한 것을 지키고 계십니까? 누구든지 마라톤을 시작할 때는 대단한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처럼 두 달 달리면서 연초에 했던 결심이 허물허물 되어져 가는 분 없습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에 대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그냥 세월 보내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우선순위 테스트는 어떠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에 가장 중요합니까? 이 네 가지 시험 중에서 어느 게 여러분에게는 제일 큰 문제입니까?  지치고 피곤하고 퍼졌는데 무슨 시험을 치룰 남은 힘이 있겠냐고 되묻고 싶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주,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사30:15, 표준새번역) 구원을 받고 힘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서 온전히 순종하면 살길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시험을 잘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1:12)

하나님은 생의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을 견뎌낸 사람들을 위해서 영원한 상급을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세상 살 때에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끝날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여러분을 짓누르고,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며, 생각뿐 아니라 물질과 시간 사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첫 번째 자리에 두면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 때도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게 될 때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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