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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3) / 출 28:3, 31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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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3) 
출애굽기 28 : 3, 31 - 35
(3월 7일 주일 설교 말씀)


에봇 받침 겉옷(robe of the ephod)은 제사장이 에봇 안쪽에 입는 옷입니다. 이 옷은 에봇을 받쳐주는 옷이라는 점에서 에봇 받침 겉옷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이 반드시 입어야만 했던 이 옷이 주는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Ⅰ. 제사장은 에봇 받침 겉옷을 입어야 합니다.

본문 28장 31절에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라고 했습니다.
{에봇 받침 겉옷}은 모두 청색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에봇 받침 겉옷'이 에봇을 위해서는 속에 받쳐 입는 옷의 역할을 하며 세마포 속옷을 위해서는 겉옷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에봇 받침 겉옷은 한 조각으로 된 긴 천에 머리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내어 만들었습니다.

이 에봇 받침 겉옷의 밑단에는 금방울 그리고 청색, 자색, 황색실과 가는 베실로 만든 석류방울을 달았습니다.
이 옷은 성소 내에서 사역하는 동안 반드시 입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출 28:35).
'에봇 받침 겉옷'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마포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이 겉옷을 입고 그 위에는 에봇을 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옷은 에봇의 받침옷인 동시에 세마포 속옷의 겉옷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적으로 옷을 디자인하거나 또는 옷을 코디하여 입을 때 속에 받쳐 입는 옷과 그 위에 걸치는 옷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 두 옷이 서로 이러한 상관관계를 가지듯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대제사장의 예복 또한 에봇과 에봇 받침 겉옷 사이에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사이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에봇 받침 겉옷'은 대제사장이 행하는 사역 즉, 에봇, 판결 흉패, 견대, 띠에 나타난 모든 사역의 근본 속성과 본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 대제사장의 사역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샤렛트( ) 의 의미입니다.
본문 28장 35절에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방울소리는 에봇 받침 겉옷의 밑단에 달려있는 금방울 소리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론의 일과 관련된 히브리어의 의미입니다. 본문을 통해 볼 때 아론의 일은 성소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글 성경은 아론의 일을 "섬김"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아바드( )와 샤렛트( )가 있습니다.
아바드는 가장 일반적인 일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아론의 일은 샤렛트(sharet)인데 이 샤렛트는 일반적인 일을 의미하는 아바드와(abad)와는 구별되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 용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성소에서의 사역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시103:21; 101:6; 대상6:17; 심상2:11; 욥1:13; 민4:12; 대하24:14).

2) 하나님께서는 에봇 받침 겉옷을 특별히 청색으로 디자인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성막에 사용된 색깔은 흰색, 청색, 자색, 홍색 꼭 네 가지 색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에봇 받침 겉옷'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청색을 사용하셨겠습니까? 모든 색깔들은 그 색깔이 상징하는 고유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청색은 하늘과 생명을 의미하는 색입니다. 그래서 청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런 하늘을 연상하게 하는 동시에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며 생명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봇 받침 겉옷'을 파란색으로 디자인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즉, 샤렛트(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봇 받침 겉옷'을 특별히 파란색으로 디자인하셨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특별한 분류의 사람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오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하는 동업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적 삶을 살기 위하여 모든 삶을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저급한 자신의 영예와 욕심을 채우려고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Ⅱ. 제사장은 생명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28장 31절에 {…전부 청색으로 하되}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에봇 받침 겉옷'은 청색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청색은 하늘과 생명을 의미하는 색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늘의 일을 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 사역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 가운데 최대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이 바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최대의 목표입니다.
'에봇 받침 겉옷'의 밑단에는 아주 특별한 장식을 달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옷의 밑단에 금으로 만든 방울과 실로 짜서 만든 석류방울을 달도록 했습니다.
먼저 금으로 만들어진 방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금방울 소리가 나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금방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의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지성소 밖에서 대제사장 발목에 묶었던 줄을 당기게 됩니다. 이 때 죽은 대제사장의 시체가 끌려 나오게 됩니다.

성막에서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우리들 편에서 금은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에봇 받침 겉옷'의 밑단에 달려있는 금으로 만들어진 방울은 우리에게 있는 변치 않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또한 금방울의 특징은 색깔보다는 소리에 있습니다. 방울의 목적은 소리를 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금방울 소리는 변치 않는 믿음의 소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파란 겉옷에 생명의 소리를 상징하는 금방울을 달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소리를 직역하면 곧 성경적 소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른 신앙적 소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혼재 되어 있는 오늘날 현대인들은 바른 신앙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제사장의 옷에는 금방울을 달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움직일 때마다, 입을 열 때마다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외쳐야만 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침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메시지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사도행전 27장 22-25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선원들을 구해주셨습니까? 배는 어느 해안 근처에서 암초에 걸려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44절에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폭풍우 가운데에서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으며 한 치의 의심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의 폭풍우 가운데서도 생명을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의 소리입니다.
대제사장은 항상 금방울 소리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성소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출 28:35). 성도들은 믿음의 소리를 항상 내야만 합니다. 믿음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도 죽고 맙니다.

Ⅲ. 제사장은 생산하는 창조적 사역자입니다.

본문 28장 33-34절에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방울, 한 석류, 한 금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석류}는 고대 근동에서 장식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석류 열매는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방울과 함께 청색, 홍색, 자색 그리고 흰색 실로 석류를 만들어 달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출 39:24). 석류꽃과 석류열매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석류는 아주 많은 알맹이를 가지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수가 무려 수백 개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리고 석류의 모양은 마치 왕관을 씌어놓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석류}는 '생명' 또는 '자손의 풍성함', '번영과 영광'을 상징하는 대표적 열매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의 에봇 받침 겉옷의 밑단에 달도록 디자인한 석류는 생명, 그리고 풍성함과 영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석류가 상징하는 생명의 풍성함과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 즉, '제자'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석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한 가지는 빨간색입니다. 석류의 껍질도 석류의 안도 모두가 빨간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석류를 빨간색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 그리고 흰색을 사용해서 석류를 만들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이 네 가지 색깔의 조화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색깔들로 사용되었습니다. 석류가 상징하는 생명의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영적 열매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소리를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만드는 일이 만인 제사장이 된 곧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반포 속옷을 입고 에봇을 입고 청색으로 된 에봇 받침 겉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표식입니다. 제사장의 옷에 금방울을 단 것은 소리를 내기 위함입니다. 죽음의 소리가 아닌 생명의 소리를 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성경적 소리 곧 바른 나팔소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7-8절에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나팔 소리가 따로 있고, 합리주의자들의 나팔이 따로 있고, 범신론자의 나팔이 따로 있고, 복음주의자들의 나팔이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개혁주의 나팔을 불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성경을 가지고 사상적 시이소(seesaw)게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성경을 집어넣고 즙짜기식 망령된 게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흥미(funny) 주의로 해석하거나 성경을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꾸미는(fancy) 일을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듯이 요즘 KBS와 MBC를 오가며 소위 Gold Time에 연재로 강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조선 초기 사상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사상적 논리를 전개하면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넘나들으며 나름대로의 해박한 이론을 가지고 조각난 오늘의 현실을 비판할 때 청중들은 연신 박수를 보내곤 합니다.
그의 철학의 정의는 무신론적 범신론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천당과 지옥을 현실에서 발견해야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곳에 천당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하는 발상은 비판대상마저 되지 않지만 그의 강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나 기독교의 천당은 선을 유도하고 선에 대한 보상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불교와 기독교를 싸잡아서 일축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神)은 곧 역사(歷史)라고 했습니다. 선에 대한 보상은 역사가 보상해줄 뿐 내세에서의 상급 따위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금세주의적인 이상국가 논리는 막스와 레닌의 주장입니다. 진정한 Vision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역사는 절대 완벽한 것도 없고 객관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아니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교가 비판받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했는데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비판받을 만한 그렇게 허술한 종교라면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본질적인 기독교의 정도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이미 비판을 받아왔고 사람들이 심판하지 못할 때는 말 못하는 짐승을 통해서 심판한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22:21-30).
제가 정작 분개하는 대상은 강의를 하는 사람이나 공영 방송국인 KBS나 MBC 보다도 인기만 있으면 된다는 결과 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이 강의를 하게 된 동인에 대한 분노입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T.V 방송이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감안하고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적 정체성이 확립된 이 땅에 그 어떤 나라에서 특정 종교가 특정 종교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비판하도록 한 적이 있던가? 객관적 시각으로 판단하여 잘못된 개인을 대상으로 한 비판은 모르겠으나 전국민을 대상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선동적이고도 파괴적인 비판은 종교적 음해 정도가 아니라 종교적 모독입니다.
기독교 T.V에서도 공개토론은 가능합니다만 공식적으로 타종교를 비판하지 아니합니다. 종교에 대해서 막연한 갈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의 값싼 인기에 영합하여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질서입니다. 제가 잘못 듣고 오해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수정하겠습니다.

그의 강의가 인기가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대다수의 국민 정서와 영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의 학벌지상주의 산물이고 다른 하나는 학벌과 소위 덕(德)을 등식화(等式化)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의 논리에 감히 반론을 재기할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국민정서를 감안해 본다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그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사상적 논리를 소개할 뿐 불행하게도 진정한 본인의 주장이 아니기를 바랄뿐입니다.

오늘날 학벌은 그들의 출세를 위해서 가내 공업적 도구로 사용된 학이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까지는 생각하지 아니하더라도, 적어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도 달성하지 못한 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 급격히 노블래스 오블리제가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학벌이 이 땅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 행여 자기를 배불리는데 급급한 도구적 학문, 도구적 학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절대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 새사람을 입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지식인들과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자들에게 거침없이 기대를 거는 것은 그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기독교의 나팔이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춤을 추는데 그치면 안 됩니다. 나팔소리를 듣고 창조적 삶, 생산적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는 국가나 어떤 단체에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국가적 교회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와 국가 두 기관을 주셨습니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바른 메세지를 전해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메세지 전달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대통령을 무시한다는 편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모든 위에 있는 권세는 비록 악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평등이 유린당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리방황하게 하지 말고 석류처럼 풍성한 결심을 거두도록 우리는 분명한 복음의 나팔을 계속해서 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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