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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라를 생각하는 신앙 (시 137: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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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라를 생각하는 신앙 
본 문 : 시편 137 : 1 - 6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정치사회 문화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 이런 설문에 대해서 지난해 2월 한신대 신학연구소에서 20세 이상 성인 남녀에게 1000명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전체 결과는 우리 기독교 개신교가 40.2%, 불교가 27.5%, 카톨릭교가 20.4%에 해당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제는 우리 기독교 개신교인들한테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압도적으로 72.7%가 우리 기독교가 가장 영향력이 컸다. 우리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은 제외하고 다른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기독교가 19.7%, 불교가 39.1%, 카톨릭교가 29%에 해당되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긍정적인 대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종교가 없는 비종교인들은 어떻게 응답을 했는가? 기독교가 39.3%, 불교가 18.9%, 카톨릭교가 18% 그래도 기독교에 대해서 그 많은 공헌이 있었고 이것은 다시 뒤집어서 표현한다면 앞으로도 이 역사와 이 민족 속에 이런 공헌을 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감에 대한 표시라고 생각됩니다. 응답자들은 대부분이 “한국 사회가 도덕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원인이 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는 이기주의가 막연하고 있다 25%, 지도층에 윤리의식이 부재하다 20%,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다 15%를 그렇게 뽑아 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란 개인이 예수 믿고 개인이 나중에 천당 가는 그런 개인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랑 공동체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우리의 가정이 변화가 되고 우리의 가정이 변화되면 내가 속한 직장과 공동체가 바뀌어지고 공동체가 바뀌어지고 이 민족의 사회와 우리의 전체 민족사가 바뀌어질수 있다하는 그런 가능성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내일 또 다시 3.1절 85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참을 우리의 이 사회와 우리의 이민족을 살리는 그런 살아있는 신앙인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께서 다시 믿음의 사람들을 이 땅을 회복하고 살리는 일에 사용하실 것인가? 우리는 다시금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3.1민족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33명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이것은 숫자적인 측면만은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6월말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약 2만명정도 됩니다. 그 중에 기독교인이 3373명. 약 17% 해당되고 천두교인이 2297명 11%에 해당됩니다. 당시에 천두교인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20만 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전체인구를 1600만 명이라고 생각할 때, 이 숫자는 기독교인구의 1.5%에 해당되는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은 17%에 해당된 다는 것을 보면 약 10배 이상에 독립에 대한 열정과 헌신과 그리고 사랑을 쏟아 부었음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선교사 보고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세운동이 허리케인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예배, 성경공부들은 마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 전도사, 장로와 직원들 대부분이 감옥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3.1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런 참여의 내용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글이 있습니다. 1919년 3월 3일 강서 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고 하는 전단이 뿌려지게 됩니다. 그 안에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비폭력운동이었고 평화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말이니, 독립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각각 주의할 찌며 신자는 매일 세때에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례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읽을 것이다.” 여기 내용을 보면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오히려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비폭력 평화운동을 실시하라고 얘기합니다. 일본에 대한 도덕적인 우의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살릴 것을 기다리면서 독립운동을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1919년 11월 28일자 평남 도지사의 보고에 평남에 사는 장로회 신학교 학생에게 보낸 인쇄물이 평양경찰서에 압수됐습니다. 그 안에 ‘한국 내 예수교회 기도 제목’ 이런 것이 들어가 있는데 어떤 기도 제목이 들어가 있느냐면 월요일에는 우리나라 교회에 대해서 기도하라! 화요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서 기도하라! 수요일에는 부흥사업에 대해서 기도하라! 목요일에는 독립운동으로 순교한 자의 유적, 옥중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자, 그 유족에 대해서 기도하라! 금요일에는 우리의 자유 독립이 조속히 완성되기 위해서 기도하라! 토요일에는 국제연맹을 하나님의 뜻대로 조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고 기독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그 자체가 개인적인 신앙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주 독립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교회에 그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우리의 역사 속에 참여 하게한 귀한 하나의 모습이고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민중에 삶에 뿌리깊게 박힐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교회가 기독교가 민족 종교로써 부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인 소름들을 교회가 달래주고 침체된 한국사회에 새로운 소망을 주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건져내었던 그 믿음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 고통과 억압에서 자유케 되는 그 역사를 신앙을 통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민족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집회와 결사와 언어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있을 때에 교회 안에서 예배들이면서 함께 위로하고 함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이 민족의 앞길의 미래를 꿈꾸면서 서로 만났던 장소가 바로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또 하나 교회 지도자들이 민족을 보존하는 길, 나라가 독립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나라의 그 고통스러운 현장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귀중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무려 70년 동안에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하게 되는데 그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사랑하는 조국을 보면서 자기 신앙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원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이 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너를 잊을 진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아예 기억치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 진데 내 혀가 내 입 천창에 붙을 지로다.”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쏟겠다고 하는 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들은 우리 민족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들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에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옵소서.” 옛 지도자들은 멋이 있었고 덕이 있었고 품위가 있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3.1운동의 지도자였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 독립선언문을 다 기초하고 맨 마지막에 그 앞에 누구 이름을 써야되는가? 이승훈 선생을 된다고 하는 사람들과 손병희 선생님을 써야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옥신각신 하면서 말다툼하게 되었을 때에 이런 일화가 정해져 옵니다. “이 사람들아! 순서는 무슨 순서! 그거는 죽는 순서야! 성경에 이름 먼저 써!” 이렇게 말하면서 그 어려운 처지를 극복해 나갔다고 합니다.

  이 순서, 여러분, 공동체의 이름에 앞에 쓰는 그 이름은 죽는 순서입니다. 희생할 순서입니다. 모든 것을 쏟아 놓아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이름을 먼저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까? 기독교 행사 때마다 그렇게 많은 이름을 갖다가 써놓고 거기에다가 앞에 그 많은 타이틀을 집어넣는 것이 이제부터 너는 죽는 순서다. 그렇게 생각하고 써놓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을 결코 성서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일제의 고난과 옥중 생활로 순교했던 주기철 목사님께서 마지막 양심의 보류로 남겨져 있었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하고 국민의례라고 가결하게 되자 그는 ‘일사각오’ 라고 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에 피 한 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척 체 하오리이까 다만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일제에 목사파면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1940년 7월에 5번째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황실 불경죄, 치한 유지법 위반이란 제목으로 10년 징역형을 받다가 5년 동안에 감옥살이를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수감돼있었던 평양 형무소에서 49살의 나이로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이 민족이 이 만큼 우리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리고 이만큼 우리가 발전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곳곳에 어디에선가 이렇게 믿음을 갖고 이렇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외적인 모양은 어쩌면 부와 성공과 화려한 것들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부정과 부패가 우리들의 안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남과 북이 반세기 이상 갈라져서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저 북녘은 거짓 이데올로기와 사람을 억압하는 왜곡된 사상에 의해서 고통받고 있고 억압받고 있고 굶주림에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때에 우리들의 죄악을 다시금 들여다보면서 이야기하지 아니하면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정치인들은 정치적 야망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전투구를 하는 것일까요? 왜 노사는 그렇게 화합하지 모 못해서 그렇게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가진 자와 없는 자들은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일까요? 왜 우리들은 서로의 삶을 변화시킬 수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젊은이들은 가치관을 상실하면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오, 이완용도 아니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손톱을 받게 했으며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도록 내버려두어서 그러므로 만국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요, 그는 상해에 가서도 동포들에게 외칩니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민족불행의 책임을 자기이외로 돌리려 하니 왜 낙망 책망하시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 나때문이로구나! 하며 가슴을 두드리며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이오. 어찌하여 저놈이 죽일 놈이요, 이놈이 죽일 놈이요, 라고만 하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역대야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스스로 경배하고 주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땅을 고칠지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여 자기 죄를 고백하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이 땅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서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리라” 의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 많으면 영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백성이 욕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 나라가 무너져 가는 것은 그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겐가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더 정직하게 말하면 나의 죄, 나의 게으름, 나의 불성실, 나의 회계하지 않는 그런 못된 모습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그래서 회개하면서 바로 서는 것이 애국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까지도 타락하면 어디에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교회가 성도들이 마지막 보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민족시인 시무는 봄의 소곡이라고 하는 그의 시에서 어두움 속에서 빛의 희망을 바라봅니다.

  진달래동산에 새소리 들리거든
  너도나도 즐거이 노래 부르자.
  봄 나비 쌍쌍이 날아들거든
  우리도 덩달아 어깨 춤추자
  밤낮으로 탄식만 한다고
  봄은 저절로 굴러들지 않으리니
  그대와 나 개미떼처럼
  한데 뭉쳐 꾸준하게 부지런하게
  땀을 흘리며 폐허를 지키고
  굽히지 말고 싸우며 나가자.
  우리의 역사는 눈물에 미끄러져
  뒷걸음치지 않으리니.
  동무여,
  봄의 서곡을 아뢰라.
  심금에 먼지 앉고 줄은 낡았으나마
  그 줄이 가닥가닥 끊어지도록
  새봄에 해조를 뜯어라.

  이렇게 해서 이것이 1981년 2월에 쓴 것입니다. 새롭게 독립에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시대에 너무 탄식과 자조적인 한탄만 하지 말고 다시 이 민족의 봄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오면서 다시금 우리가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눈물이 없이는 쓰지 못하는 역사, 쓰다가도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 그래서 섹시피어는 몰라도 우리의 역사는 알아야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분명히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더욱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그 역사로부터 보복을 당한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금 우리의 과거 속에 부끄러웠던 과거들 그리고 남의 억압을 당했던 과거의 민족사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경고가 되어야 되고 새로운 결심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민족의 그 문제점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우리의 민족에 봄의 역사, 생명의 역사, 꽃피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랑하는 조국을 주시고 이 땅에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의 복을 주셔서 마음껏 주님께 예배하며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저 북녘 땅에 잇는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에 한반도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화와 자유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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