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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혜사를 보내리라 (요 16: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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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5-13                 
보혜사를 보내리라.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가는데도 너희는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오히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 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라고 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라고 한 것은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찌니라(요4:25)”했습니다. 성경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4)”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영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고전2:11)”라 했습니다. 생각 하는 것 아는 것은 영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비교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은 물질이 아닙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무게도 없습니다. 어떤 모양도 없습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생각과 같은 것 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영을 어떻게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 할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가 계십니다. 이를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데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 사역이 끝나시고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승천하면 성령을 보내 이를 보혜사라고 하리라‘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3-4에 성령을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고전2:10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리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성령은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요6:63)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의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마12:31)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님은 감동을 주십니다. 곧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시대는 감동이 멈춘 시대 같습니다. 웬만한 사건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명설교자가 많습니다. 인터넷 문화로 세계를 컴퓨터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운 것은 왜 그럴까요. 변화를 싫어해서 그렇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에 끊임없이 감동케 하십니다. 오순절 이였습니다. 대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예루살렘 광장이었습니다. 강사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신학자도 아닙니다. 어떤 교회를 목회한 경험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3년 동안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설교내용이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결합니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인 살인범이라 했습니다. 겁 없이 설교했습니다. 당시 누구도 십자가에 죽으신 사형수 예수청년에 대한 얘기도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그의 설교로 사람들이 이상해졌습니다. 성령이 불같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뜨거워졌습니다.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이는 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선한 감동들을 주십니다. 이를 억누르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갑자기 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찬송이 부르고 싶습니다. 누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구제, 십일조, 감사 등의 헌금이 하고 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야지, 전도를 해야지, 이런 감동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감동을 자꾸 묵살하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상한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는 동성연애자가 신부가 되고 주교가 됩니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릅니다마는 동성끼리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에이즈라는 무서운 병이 이런 것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화를 일찍 내다보신 것 입니다. 지금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처신이 매우 어렵습니다. 1960년대는 히피(탈사회적 행동을 하는 청년층)의 시대였습니다. 머리나 수염을 기르고 헐렁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방황했습니다. 1980년대는 여피족(고등교육을 받고 도시 근교에 살며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 소득층의 젊은층)시대였습니다. 21세기는 지피족(Zippies) 시대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 매지 않는다면 지피족 때문에 직업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조선일보2004.2.25) 이는 정보통신 기술과 도전정신, 영어구사 능력으로 무장한 인도의 젊은이를 말합니다. 미국, 유럽은 지피들이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위에서 지피족은 지퍼가 달린 바지를 입는 15-25세 사이의 인도의 젊은이를 말합니다. 그들은 창조적이며 자신에 차 있습니다. 도전과 모험을 즐깁니다. 인도 인구의 54%인 5억 5천만 명이 지피족이라 합니다. 이들은 서구문화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이루게 하는 통로가 성령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성령은 언제나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또 악합니다. 사람은 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늘 손쉬운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대문명의 변화를 기계화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편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너무 그런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됩니다. 그저 대충대충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신앙생활 하자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라는 말이 색이 바래가고 있습니다. 한 주일에 예배 1번으로 떼우자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서양에서 그렇답니다. 주일 밤, 수요일 밤, 예배가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범죄 집단이 득실거린답니다. 미국공립학교에서는 성경의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들이 수업시간 전에 기도합니다. 공립학교에서 왜 기독교식 기도를 하느냐고 시민 단체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현상 이후 미국에서 히피족이 생겼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전국에 기독교 중, 고, 대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칩니다. 또 예배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들어서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채플(예배)를 없애자고 합니다.  어느 신학대학교에서는 매일 드리는 예배를 없애자고 교수님들과 일부 학생들이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정답을 주십니다. 그것은 선한 결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으뜸입니다. 아무리 내 상각이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으시면 포기해야 합니다. 반면 내가 싫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내 마음에 감동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이 중심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입니다. 일찍 바울사도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고 한 것을 잘 압니다. 지금 망설여지는 일이 있으십니까? 어떤 결정에 고민이 있으십니까?
어떤 이가 결혼을 하려고합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잘 믿습니다. 그러나 학벌이 별로입니다. 경제적 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돈도 많습니다. 학벌도 좋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우선 결정이 망설여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해서 전도하면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니 더 좋은 일 아니냐? 합니다. 그럴까요? 앞으로 믿고 안 믿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돌팔이의사가 있습니다. 불법으로 사람의 치료했습니다. 앞으로 의대에 가서 공부해서 의사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거역하지 맙시다. 우리는 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몰라서 짓는 죄는 거의 없습니다. 알면서 죄를 짓습니다. 물론 약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맺는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끝났습니다. 예수님도 다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의 십자가의 보혈로 만족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재림)그때까지 성령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믿는 사람은 다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더 충만히 받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십니다. 마음을 움직여주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삶이 다릅니다. 늘 기뻐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늘 사랑합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살라고 끊임없이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이 지속됩니다. 간단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늘 주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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