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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성숙의 요건(4 )/ 겸손함 (마 11: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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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성숙의 요건(4) / 겸손함
마 11:29,30


지금 우리는 시리즈로 신앙요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다릅니다. 성장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로 "자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은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사고의 깊이가 쌓여가고, 마음의 폭이 넓어가고, 인격이 고상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은 우리말로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성장과 신앙성숙은 다릅니다. 신앙성장이란 신앙의 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에 관해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교회생활에 이력이 붙습니다. 점점 직분도 중한 것을 맡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성숙이란 신앙의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인격이 원숙해 집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이 성숙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장해야 하며 동시에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요건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 성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첫째가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묻자 둘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성숙의 우선적인 요건은 바로 겸손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1. 겸손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겸손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 밑에서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보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비굴함은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둘째로 겸손은 자기학대도 아닙니다.
이상 심리자들 중에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성도들은 부흥사들이 집회 중에 막 욕을 하고 거친 말로 해 델 때 쾌감을 느끼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여성을 가학, 학대, 폭력을 휘두를 때에 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새디즘(sadism), 또는 매저키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것들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셋째는 겸손은 자기 가장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천함으로 자기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교묘한 위선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가장 역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전주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있는데 금산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양반 조덕삼씨와 그 집에서 머슴 생활하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양반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할 때 재미있는 것은 머슴인 이자익은 피택이 됐는데, 양반이던 조덕삼은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질투심이 생길까요? 그러나 양반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이 훌륭하다고 높이며 잘 도와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다음해 양반이었던 조덕삼도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섬기며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후에 조덕삼은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신학공부를 시킵니다. 목사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후에 이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 나아가 교단의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번도 힘든 총회장을  세 번(13회, 33회, 34회)이나 역임하게 됩니다. 한국교회 유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가문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자신을 바로 깨닫고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2. 우리가 겸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겸손은 시작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떤 결과가 옵니까? 이사야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습니다. 너무나 황홀하고 장엄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뵈고 나니 그는 두려워 거의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첫 번째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한마디로 무순 말입니까? 거룩하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완전 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그 자신의 죄인 됨과 그 백성의 죄악 됨을 깊이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33:14)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본 자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출33:20,삿13:22)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이 노출되는 고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겸손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창18:2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기도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을 티끌과 같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되면 될수록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존재인가를 확연히 느끼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5:9절을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사도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니 사도 중에 정말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엡3: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사도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 반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딤전1:15절을 보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성도의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의 반열로 더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죄인들 중에서 괴수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전의식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에 "정말 내가 별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눈으로 보니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다 낫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다운 겸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고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성장되었으나 성숙치 못하기에 교회의 거침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첫 사람 아담은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성품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아담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런 교만이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담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함입니다. 겸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채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이 겸손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우리의 모델 삼아서 본 받고 배워가되 특히 주님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겸손이 어떤 것입니까?

1) 낮은 곳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주님의 모습은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왕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습니다. 저 높은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저 낮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지도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그들 곁을 버리시고 병자들,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철저하게 낮은 곳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웃의 한 주민이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수녀님 잘 사는 사람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 때 테레사 수녀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허리를 굽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2)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빌2:8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죽으라고 하셨을 때 죽는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정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짐승들을 길들이고자 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하도록 하기 위해 씌운 것입니다. 주인이 끄는 데로 가도록 하기 위해 어깨에 씌운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멍에를 메고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3)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병자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찾아가셔서 기꺼이 친히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선생이십니다. 그런데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인으로서 하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13:14-5) 사랑하는 여러분! 종이 섬기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선생이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이렇게 섬기며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직분도 많이 맡고...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품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특히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멍에를 부담으로 알지 말고, 주인이라도! 선생이라도! 어른이라도!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겸손을 닮아 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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