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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름(롬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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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름] (로마서 16:1-16)


[1] 서 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 석자를 사람들이 알아주고, 기억해 주기를 원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높은 산 바위 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기도 하고, 무덤의 비석을 크게 세워 놓기도 합니다.
어떤 자는 죽은 조상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무덤을 왕능처럼 만들고 값비싼 비석을 세웁니다.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요 죄악입니다. 불신앙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믿는 자요, 따라서 우리는 세상사람들처럼 무덤에 갇힌 자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 석자가 담게되는 인생의 내용입니다. 아무개라고 그 이름을 부르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또는 그의 살아간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무덤의 비문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가 보니, 이런 비문도 소개하고 계셨습니다: "참 말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 다물다." 또 이런 비문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 여기에 잠들다. 제발 내 아내를 깨우지 말아다오."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6:1-16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끝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부탁과 함께 문안의 인사를 전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27명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는 여자도 9명 정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들은 모두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브리스가와 이굴라 그리고 바울의 친척같은 유대인들도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상당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사회적인 지위면에서 보아도 다양성이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암블리아, 우르바노, 허메, 빌를로고 등은 당시 노예의 이름으로 많이 쓰여진 이름들이었고, 또 아리스토불로와 나깃수의 권속들은 당시에 왕족 혹은 상류층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명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와 그의 어머니도 등장합니다. 어쨌든 다양한 종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로마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로마교회는 이 다양성 속에서도 건강한 하나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귀한 이름들이었습니다. 모두가 귀한 이름을 남겼습니다. 모두가 그들의 이름 속에 신실한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삶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부딪쳐오는 도전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인생이 가치 있는 삶입니까?

[2] 하나님께 칭찬받는 이름으로 사는 법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가치있는 삶을 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의미를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동서남북 상하를 관통하는 4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길이의 차원 (주안에서의 자기사랑)

첫째는 길이의 차원입니다. 길이의 차원이란 자신을 위한 삶의 영역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재능을 최선을 다해서 개발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세상에 영향력이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독특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능력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게으름으로 이 귀한 달란트를 파묻어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참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길이의 차원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최선의 그릇이 되면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길이의 차원, 내 자신을 위한 삶의 영역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데서 찾고 하나님을 닮는 변화와 성숙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 심방 예배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그 집의 여자 집사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 목사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나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 지금 마음에 큰 회의가 듭니다. 딴 것이 아니고 어느 분은 기도도 잘하고 성경 지식도 박식하고 믿음이 좋은데 그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화가 없는데, 그분을 보고 크게 시험이 듭니다."
그 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남이 보기에 기도 잘하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실 필요없이 말씀만 하옵시더라도 자기 신하 아들이 고침받을 수 있다고 부탁할 때, 예수님은 " 이 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귀신같은 믿음입니다. 귀신도 우리보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있는 최선의 믿음의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넓이의 차원 ( 이웃 사랑)

그러나 우리의 이름 속에 담겨질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은 길이만 가지고는 불충분합니다. 둘째 영역이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넓이의 차원입니다. 넓이란 남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섬기는 넓은 폭을 가진 삶을 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나 혼자만을 위한 삶이란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함께 나누며, 함께 돕는 삶이란 자연적인 것이고 또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마지막 자리에서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는가? 바로 그 기준이 아닙니까? 얼마나 이웃을 가슴에 품는 넓은 폭을 지니고 살았는가? 이것이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스타일은 주는 자이십니다. 그래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열심히 주를 약속의 말씀과 예수님을 붙잡고 기도하면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받은 것으로 두루 나눠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줄 때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세상의 법칙은 '1+1=2'이지만, 4차원의 세계인 하나님의 승법법칙은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입니다. 십자가는 플러스 신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함께 섬겨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 속에 가치 있는 삶을 담기를 원하십니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까? 넓이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폭, 이웃을 위한 삶의 차원을 넓혀 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가치 있는 삶의 길이 있습니다. 뜻있는 인생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3) 높이의 차원 (하나님 사랑)

그러나 우리 인생은 길이와 넓이만으로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 더욱 중요한 인생의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높이의 차원입니다. 인생의 높이란 하나님을 위한 삶을 뜻합니다.

여러분, 길이와 넓이만 있으면, 훌륭한 인도주의자(Humanist)가 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두 차원만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바로,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뜻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 내 주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natural)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큰 어려움이 없이 모든 일이 잘 되어가면,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분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며, 신앙은 속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온전한 삶입니까? 이런 인생에서 나타나는 것이 영적인 시달림, 갈증, 무의미함을 느끼는 공허함입니다. 따라서 자살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21세기되어 과학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화성에 로봇 로켓까지 보낸 시대에 살고 잇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과학처럼 큰 인격변화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인격은 더 악화되고 속 사람은 부셔져 버리고 정신적 불구자는 더 많아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영적 존재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고 악한 불순종의 영을 받으면 구조적으로 그 영에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라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영혼의 상쾌함과 지혜로움이 있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는 인생의 진정한 만족,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맛보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로 대리만족을 찾아보지만, 결코 충족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앞에서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인생의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특별히 인생의 높이의 차원은 길이와 넓이의 차원에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길이와 넓이를 최대한 발전시켜 갈 수 있습니까? 그 길은 바로 높이의 차원에 달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우리는 그만큼 길게 또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은 모두가 이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높이 떠서 가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큼 길게, 멀리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넓게, 많이 내다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의 영역에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내 인생의 길이, 내 자신의 능력은 최대한 개발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이 다섯밖에 안된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함께 하시면 나의 능력은 열도, 스물도 될 수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게되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우리의 지혜,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바로 높이 오르므로 길이를 넓혀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넓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우리는 이웃을 폭넓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사랑하는데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폭을 간직하게 됩니다. 어떻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넓은 폭, 그 넓이에 어떻게 이를 수가 있습니까? 내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능력만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갖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하나님께 그만큼 더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넓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넓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 높이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담기를 원하십니까? 높이를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 빈약하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가치 있는 삶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귀천을 불문하고, 높이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에 넉넉하고 부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집중하며 믿음의 부자가 되십시오.  몇 단어 밖에 안되는 짧은 소개의 문장이었지만, 그 이름 속에 아름다운 삶의 내용을 남기고 갔습니다.

(4) 깊이의 차원(영성의 충만)

이제 주님께 모든 것을 올인하는 깊이가 있는 성령충만의 삶을 사십시오.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고백적 삶을 사십시오.
나의 모든 것인 시간과 물질 그리고 생명은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 속으로 흘러 들어 갑니다. "약한데서 강하여 지는 역사"가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믿음의 깊이를 더하시고 뿌리가 든든하게 하여 세파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사십시오. 

[3] 결 론

  한신대학교 대학원 원장이신 정태기 교수님의 말씀 속에서 기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자라나신 섬마을에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되자, 이 여인은 결국 소박을 맞고 시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수치와 절망 속에서 자살을 계획한 이 여인은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올라와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유명한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는데, 대낮이라 사람들이 많아서 자살할 수가 없어 밤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밤이 되어 다시 한강에 나아와서 자살을 하려는데 가까운데서 손뼉을 치면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비관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저 사람들은 뭐가 좋아서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를까? 죽기 전에 구경이나 해보고 죽자고 이 여인은 생각하고 찾아가 보니 바로 교회였습니다. 이 여인은 들어가지도 못한 채, 교회 문가에 앉아서 찬송소리를 듣고 또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외치셨습니다. 낙심하고 실망한 사람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애기 못나아 소박맞고 쫓겨난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병들고 가난한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걱정과 근심에 쌓인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여인은 그날 거기서 이 부르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흥회가 끝난 후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사 목사님은 이상한 소리에 교회 문밖에 나가 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되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군디, 예수가 누군디 ..." 이 여인의 사정을 다들은 이성봉 목사님은 당신께서 섬기시던 목포의 교회로 데리고 가서 2년 동안 신앙의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고향인 섬마을로 보냈습니다. 섬마을로 돌아온 이 여인은 시댁의 양해를 얻은 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 찬송을 해서 사람이 모이면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외쳤습니다.

이렇게해서 정태기 교수님의 고향 섬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의 전도를 통해서 그 섬마을에서만도 60명 가까운 목사들이 배출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신 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님, 한국 켐퍼스선교의 대부이신 김준곤 목사님, 한국신학대학 학장이신 고재식 목사님, 또 정태기 교수님도 그 섬마을이 배출한 목회자 속에 포함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약속하십니다(단12:3). 이런 사람의 이름을 높여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도 이름을 남기고 갈 것입니다. 어떤 이름을 남기고 가실 것입니까? 아니 우리 이름 속에 어떤 삶을 남기고 가실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가 크게 뻗어 가고 믿음의 깊이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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